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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용사의 후손
우리들은 경기가 끝나고, 핀과 함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본래의 경기 일정은 오후 늦게까지 진행돼야 했지만, 핀과 베르제의 경기 여파로 인해 관중들이 모두 빠져나간 터라 남은 경기는 내일 다시 진행하기로 일정이 바뀌었다.
“다들 혼비백산이네.”
경기장 밖에서는 아까 도망친 관객이 있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용감한 자들은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었고, 몇몇은 너무 놀란 나머지 힘겹게 도망친 뒤 밖에서 쓰러져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주 그냥 죽을 뻔했다니까.”
“진짜? 아. 노점만 아니었으면 직접 가서 보는 건데.”
“대박이었구먼. 관중석까지 여파가 미칠 정도의 마법이라니. 왜 도망친 거야. 끝까지 봐야지.”
경기를 보지 못한 몇몇 시민들은 그 좋은 구경거리를 놓친 게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바로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것인가.
하긴, 인간의 본성이 어디 쉽게 사라지겠는가.
아무리 큰 재난이 일어나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무한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지닌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나만 아니면 돼’라고 하니까 갑자기 무한도전이 보고 싶네.
전생에 꼬박꼬박 챙겨봤었는데. 지금은 어디까지 진행됐으려나. 완결은 했으려나?
“아빠. 숙소로 돌아가실 건가요?”
“응? 글쎄.”
핀이 내게 행선지를 물었다. 경기를 끝마치고 나온 핀은 다행히도 상처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꽤나 위험한 경기였기에 혹시나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고, 다친 부위도 전부 치료가 된 상태였다.
나는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핀의 손을 잡고 그곳을 향해 이끌었다.
“아니. 숙소 말고 식당으로 가자. 좋은 곳을 발견했거든.”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손님들에게 약수를 제공하는 전의 그 식당이었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이 먹을 음식을 주문한 뒤, 종업원이 식기와 함께 가지고 나온 물을 따라 핀에게 건네주었다.
“어때?”
“으음. 그냥 평범하네요.”
역시 물맛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나뿐인가.
참으로 아쉽다. 함께 이 맛을 구분할 수 있는 동지를 원했는데. 핀조차 구분할 수 없다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물맛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소믈리에가 아니라 ‘소물리에’라고 할까.
……곰이 없으니까 자꾸 내가 개드립을 시전하는군.
이거 위험해! 빨리 숲으로 돌아가 곰에게 이 역할을 떠넘기고 싶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음식이 나오고, 테이블 위로 우리들이 시킨 음식을 각자의 앞으로 배달하듯이 정렬되었다.
핀은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구운 스테이크, 아라디온은 양의 갈빗살을 구운 폭찹, 필로우는 양상추 샐러드를 받았다.
나? 나는 물론 그냥 물이지. 알면서 왜 그래.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핀이 손바닥을 모아 감사 인사를 한 뒤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마음에 든 듯싶다.
“아빠. 진짜 맛있네요.”
“다행이네.”
“그런데 아씨. 그 녀석은 대체 뭐였던 것이오?”
양상추를 갉아먹으며 필로우가 물었다.
나도, 아라디온도 쭉 궁금했지만 이제 막 경기를 끝낸 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섣불리 묻지 않았던 질문이다.
“나도 모르겠는데. 이상한 느낌은 계속 들었어.”
“저희도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 본 적이 없거늘, 살짝 낯이 익은 선수더군요.”
“소인은 가슴이 아렸소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처럼 말이오.”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베르제라 불린 마족소년. 확실히 아라디온의 말대로 본 적이 없는데 낯이 익었다.
하지만 아라디온은 낯이 익은 정도로 끝났다고 말했지만 나의 경우는 필로우처럼 가슴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인물인데 서로 조금씩 다르네. 핀. 핀은 어땠어?”
“처음엔 저도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었는데, 싸우다보니까 그런 느낌이 없어지던걸요.”
“자꾸 공격해 대니까 정 떨어져서 그런 건가?”
“혹시 위그드라실 님의 숨겨진 혈연관계라도 되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먼 친척이라거나…… 사돈의 팔촌에 칠촌 정도?”
“……아라디온. 나 나무거든? 그런 족보는 없다고.”
다들 차분하게 음식을 먹으며 마족 소년에 대해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는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이번 무투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 구경 가고 싶다.”
“그냥가면 되지 왜 안 가는데? 입장비도 안 받는구만.”
“소란스러운 건 싫어서.”
“후후. 나는 오늘 경기 보고 왔는데. 장난 아니었다고.”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소란스럽구만.’
대회를 관람한 손님이 친구로 보이는 자에게 열심히 대회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그의 눈에도 딱히 선수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지 대부분의 설명은 어떤 선수가 어떻게 망가지고 최후엔 어떤 모습으로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마지막에 있었던 엘프랑 마족의 경기였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가 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핀을 힐끔 돌아보았다.
핀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부끄러웠는지, 방금 전까지 큼지막하게 썰어 먹던 고기를 자그맣게 썰어서 조신한 아가씨처럼 먹고 있었다.
핀. 이제 와서 그래봤자 늦었어. 입가에 지저분하게 묻은 소스나 닦고 연기하시지.
부디 저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지 않기만 기도하라고.
“마족이 마법을 잘 쓴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마법을 쓸 줄은 몰랐다니까.”
“무슨 마법을 썼길래?”
“엄청 거대한 물로 된 공을 만들었는데, 딱 봐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더라고. 바닥에 떨어지면 경기장에 홍수가 날 정도로 거대한 공이었어.”
“겨우 물 때문에?”
“네가 거기서 직접 봤어야 한다니까.”
그래. 확실히 위험한 마법이긴 했지.
거기에 서린 마력만 해도, 예전에 드렌 왕자가 썼던 마법이랑 비슷한 마력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몰라. 바로 도망쳐 나왔거든. 싸움 구경은 좋지만 휘말리는 건 사양이라고.”
아쉽다.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핀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뭔가 딸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이랄까.
“뭐, 진짜로 위험한 순간이었다면 린셀 님이 무슨 수라도 쓰셨겠지.”
‘린셀이라면…….’
내 기억으론 분명 대회를 개최한 그 할아버지 이름인 것 같은데.
하긴, 원래 축제나 이런 경기에서 문제가 생기면 개최자가 책임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걸 대비해서 그분도 뭔가 대책을 세워놨었겠지?
“과연 그럴까.”
“어째 말하는 게 심드렁하다?”
“그래봐야 그냥 평범한 귀족 노인이잖아. 그 사람이 어떻게 막겠어.”
“그냥 노인이 아니잖아. 용사의 후손이니까 무슨 능력 하나 쯤은 있겠지.”
순간, 우리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던 일행들이 모두 석화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굳었다.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아라디온뿐이었다.
“다들 왜 그러세요?”
“쉿. 아라디온, 조용히.”
나는 입에 검지를 대며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용사의 후손이라지만, 딱히 모험가인 것도 아니고, 마법사나 검사인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막아.”
“글쎄. 내가 알기론 용사의 후손이면 그 전설로 내려오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지. 무기가 좋으면 뭐하나. 능력이 돼야 쓸 수 있는 거지.”
“그런가.”
그 이후로는 시시콜콜한 잡담들뿐이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보냈다.
핀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고, 필로우는 살짝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아라디온만이 딱히 걸리는 게 없는지 식사를 끝마치고 입가를 닦고 있었다.
“주공. 혹시 이번에도 무슨 일이 나는 게 아니온지…….”
“에이, 설마.”
필로우가 내 옆에서 속삭였다. 아마도 드렌 왕자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내가 또 혼내주면 돼. 필로우. 너무 걱정하지 마.”
핀이 필로우를 무릎위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안을 달래주었다.
“흐음.”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드렌 왕자의 경우, 비루스 국왕이 주축이 되어 일을 벌인 것이니까 지금과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할아버지가 용사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그다지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굉장히 점잖고 착하신 분이었으니까.
용사의 후손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비루스 국왕이 특이 케이스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와서 용사의 후손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냥 이야기만 들었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처럼 내가 분수대에서 쉬게 되고, 그런 내게 용사의 후손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식당에서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마치 하늘에서 촘촘히 짜둔 운명의 실을 걷는 것만 같았다.
세계수가 무슨 스탠드사도 아니고 이렇게 서로 만나게 되다니. 스탠드는 스탠드를 끌어당긴다던데. 설마 진짜로 세계수의 마력은 스탠드가 아닐까.
“오. 꼬마 아가씨가 또 왔구만.”
부엌에서 주방장이 나와 나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또 와주다니 반갑구나.”
나 역시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맛있는 약수를 내게 준 사람이라 그런지 고마움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느껴졌다.
“옆에 계신 분들은 누구니?”
“엄마랑 아빠예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핀과 아라디온을 부모님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응? 엄마?”
주방장이 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나랑 핀이 안 닮아서 그런가?
하지만 딱히 입으로 꺼낼 문제는 아닌지라, 주방장은 다시 활짝 웃으며 우리 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았다.
먹음직스러운 딸기향이 물씬 풍기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맛있게들 먹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핀과 아라디온이 주방장에게 인사했다. 주방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빠. 괜찮으시겠어요?”
“글쎄…….”
근데 문제는 과연 내가 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은 먹을 수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이 뭐로 만들더라? 우유랑 설탕이랑 물을 섞어서 만들던가? 기억이 안 난다.
“그럼 어디 한 번 먹어볼까.”
그래도 우리를 위해 준 음식이니, 꾹 참고 한 번 도전해 봐야지!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내 육체가 바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감사고 뭐고 뱉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맛있지?”
저 멀리서 주방장이 큰소리로 물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나도 거기에 보답하여 억지로 웃으며 엄지를 내밀어 주었다.
“아빠.”
“괜찮아…….”
기대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치운 뒤, 숙소로 돌아가 위경련을 일으키며 나의 육체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앞으로 그 가게는 못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