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0화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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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엘프와 마족

서로를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은 일체의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관중들이 그들을 보며, 서로 뭐하는 짓이냐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에에이! 지금 뭐하는 거야! 안 싸워?”

“저기 엘프 아가씨가 모성애라도 느낀 거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우하하!”

“주공.”

“처리해.”

험한 발언을 한 관객들은, 필로우에 의해 몰래 입을 꿰매지는 형벌에 처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두 사람을 싸우라며 보채고 있었다.

“저기,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어?”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핀이 마족 소년에게 물었다.

말을 건네는 지금도, 초조함이 가슴 안에서 요동치며 그녀를 떨리게 했다.

“아니. 만난 적 없어.”

초조함은 계속되고,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대기실에서부터 느껴지던 이 기분이, 더 이상 중압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눈치 챘다.

그 묘한 기분. 처음 느껴보는 그 기분은 바로…….

“그런데 꼭 만났던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리움이었다.

마족 소년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핀은 지금까지 엘퀴라즈 숲에서 나온 적이 없으니까.

마족소년, 베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마족의 땅을 벗어나 세상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리운 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관중석에서 시합을 관람하고 있던 또 다른 숲의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라디온.”

“네. 위그드라실 님.”

“나, 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느낌이 낯익어.”

“저도 그런데요.”

“소인도 그렇소이다.”

“근데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뭔가 그리운 기분이 드는데.”

그들 역시 베르제를 보며 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그와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핀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싸울 의지가 꺾인 핀이 베르제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였다.

“저기, 너…….”

하지만 그녀와 반대로, 베르제는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폴짝 점프를 뛰어 그녀의 머리 위를 난 베르제가 손을 뻗었다.

“우선 싸우자고. 사람들이 자꾸만 보채니까.”

그리고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의 화염이 그녀의 머리를 덮쳤다.

“잠깐!”

핀이 손을 휘둘러 화염을 받아쳤다. 붉은 줄기와 같은 화염이 그녀의 손에 튕겨져 시합장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화염은 태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바깥에서, 대지 위에 용암처럼 퍼지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핀이, 팔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입을 다물었다.

“팔이?”

팔의 피부가 벗겨져 안쪽으로 드러난, 보기만 해도 쓰리고 아플 것 같은 화상이 김을 내며 자리 잡았다.

“어떻게 내 몸에?”

핀의 표정에 고통과 놀라움이 나타났다.

세계수의 마력으로 강화된 자신의 육체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거늘, 평범해 보이는 마법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글쎄. 우리가 서로 뭔가를 느끼곤 있지만, 영 궁합이 안 맞나보지.”

그녀의 팔에 난 화상이 천천히 아물었다.

원래의 회복 속도보다 현저히 느리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건 그렇게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셈이야?”

공중에 뜬 상태로 베르제가 팔을 휘두르자 바람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칼날이 시합장을 덮쳤다.

옆에서 심판을 보고 있던 남자가 허둥거리며 시합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정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핀이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녀의 검에 바람이 옆으로 비껴져 시합장에 내리꽂혔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시합장이, 칼로 난도질당한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길게 홈이 팼다.

“나도 가만히 당하진 않겠어!”

핀의 신형이 모습을 감추었다. 고속으로 이동하며 시합장에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

관중들이 성난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드디어 선수들의 피 튀기는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어차피 꼬마아이. 마법도 보이지 않으면 맞출 수 없겠지.’

재빠르게 이동하며 핀이 도약했다.

베르제의 뒤쪽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핀이, 그의 뒤통수를 칼손잡이로 내려치려 했다.

“너무 무르잖아. 베지 않고 이기겠다는 거야?”

하지만, 이미 베르제의 몸 주변엔 그의 마법이 방어막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칫!”

베르제의 몸 주변에 바둑알 크기의 작은 액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공중에 고정이라도 한 것처럼, 핀의 몸이 닿는 순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피부를 태웠다.

평범한 물이 아닌 산성액체였다.

“이런 것쯤은!”

고통을 무시하고 그대로 물방울과 함께 베르제를 공격하려 했지만, 공중에 완벽하게 고정된 듯한 물방울은 밀려나지 않았고, 오히려 반작용으로 핀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나와 비슷하다면 고작 이 정도 힘만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지면에 닿기 직전 몸을 놀려 고양이처럼 착지한 핀이 그의 도발을 맞받아쳤다.

“잘못 쓰면 네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베르제가 공중에서 손을 높이 뻗었다.

그러자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물방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나도 딱히 누굴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근데, 어째선지 너는 죽여야만 할 것 같아.”

한데 모인 물방울이 점점 거대해졌다. 최종적으론 시합장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달처럼 부풀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제아무리 강한 화염 마법이라도 이 정도의 물은 증발시킬 수 없을걸?”

베르제가 아래로 내팽개치듯이 손을 휘둘렀다.

관중석에서 그걸 보고 있던 위그드라실이 외쳤다.

“원기옥이냐!”

그의 외침과 무관하게 산성액체 원기옥(?)은 천천히 시합장 위로 떨어졌다.

그대로 시합장에 떨어진다면, 시합장뿐만 아니라 관중석까지 초토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베, 베르제 선수? 그런 공격은 상대가 죽을 수도 있는데…… 아니, 저까지 죽는다구요!」

시합진행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지만, 이제 시합에는 흥미가 없는지 베르제가 시크하게 되물었다.

“그럼 이 공격 멈추면 내 승리로 해줄 거야?”

「그, 그건 좀…….」

“그럼 같이 죽어.”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느릿느릿하게 떨어지는 원기옥의 모습에, 방금 전까지 희희낙락하며 시합을 구경하던 관중들이 혼비백산했다.

“도망쳐! 터지면 분명 이곳까지 올 거야!”

“히익! 죽기 싫어!”

선수들끼리의,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시합에는 열광하던 관중들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들 경기장 밖으로 개미 떼처럼 빠져나갔다.

“이런 식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녀의 동공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백지장처럼 새하얗던 피부도 살짝 그슬린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의 레이피어 끝으로 거미줄처럼 얇은 실이 한데 뭉쳤다.

끌어올린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이었다.

“우선 그 원기옥부터 없애주지.”

이제는 완전히 원기옥이라고 단정 지은 베르제의 마법을 향해 핀이 만든 마력의 실이 가지처럼 뻗어갔다.

마력의 실은 원기옥을 둥지처럼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둘씩 침을 놓듯 원기옥을 찔렀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도, 부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야.”

“나도 알아.”

마력의 실에 찔린 원기옥. 그녀는 단순히 찌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결(缺)을 찔렀을 뿐이야.”

하나의 거대한 구체였던 산성액체가 찔린 부분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결(缺)을 찔린 물 덩어리가 안개로 분해되고 있었다.

“별로 효과적이진 않아 보이는데?”

찔린 부분은 안개로 흩어졌지만, 물이라 그런지 다른 부분은 멀쩡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물의 특성으로 인해 사라진 부분도 순식간에 메꿔지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마력의 실이 점차 늘어나더니, 계속해서 원기옥을 찌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백의 숫자에 불과했다면, 시합장에 가까워질수록 마력의 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론 수만 개의 실이 원기옥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럼 이제…….”

핀의 코앞까지 다가온 원기옥은 이제 사람 한 명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가 전보다 훨씬 더 마력을 끌어올렸다.

피부는 더 검어지고, 눈동자가 세로로 점차 길어졌고 조그맣지만 송곳니가 자라났다.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

고함을 치듯이 핀이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소리가 아닌 불꽃이었다.

화염방사기처럼 전방으로 뿜어진 화염이 작아진 원기옥을 덮쳤다.

화염과 물이 만나자 폭발하듯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수증기는 하늘에 떠있는 베르제를 덮쳤다.

“흐음.”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화염이 사라진 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시하네.”

수증기가 걷히고 베르제가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강하고, 화려하고,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이유인지는, 중간중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인물 때문이라고 베르제는 판단했다.

“그 이상한 마력을 끌어올리는 순간부터, 너한테서 느껴지던 이상한 기분이 옅어졌어.”

베르제가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핀이 귀찮은 짓까지 해가며 지키려고 한 상대.

그리고 그녀가 가진 세계수의 마력이, 용의 마력으로 뒤덮여 옅어지면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

“지금 나 쳐다보는 거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르제는 위그드라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핀이 지키려는 상대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제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자신이 끌리는 상대는 이 괴상한 엘프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그럼 어디…….”

그가 위그드라실에게로 이동하려는 그때, 전신을 감싸는 한파와 같은 오한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 이상으로 아빠한테 다가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합장 아래에서, 핀이 모습을 변형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게 변하지 않았기에, 날개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팔 쪽으로 보이는 비늘과 더욱 어두워진 피부가 금방이라도 변신할 것만 같았다.

“무섭네.”

어떻게 할까. 그녀와 싸우고 관중석으로 갈까. 아니면 이대로 물러날까.

잠시 저울질을 하던 베르제는, 여기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귀찮아. 그냥 갈래.”

그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시합장 밖으로 태연하게 걸어 나갔다.

「저기, 베르제 선수?」

직업 정신이 투철한 시합진행원이 다른 시합장 뒤에서 고개를 내민 채 그에게 물었다.

원칙적으로는 시합장에서 내려가는 순간, 장외패였으니까.

“포기. 어차피 이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한마디만을 남겨둔 채, 그는 어두운 복도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럼 승자는 핀 선수!」

위험한 폭풍이 지나가고, 환호하듯이 소리치는 시합진행원이었지만, 그 환호에 대답해 줄 관중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핀이 눈을 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다시 나타나 위그드라실을 노릴 것 같았기에.

자기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빠는…… 내가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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