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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무투대회(7)
“위그드라실 님. 여기입니다. 자리가 비었어요.”
“그래. 휴우. 살았네.”
답답한 가슴에 쌓인 고통을 한숨으로 뱉어내고, 빈자리에 앉아 의자에 몸을 맡겼다.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몸을 부딪힌 사람만 백 명은 거뜬히 넘는 것 같다.
“사람이 너무 많아.”
식당에서 나와 경기장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오후부터 입장이라고 해서,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보고 숨이 턱턱 막혔었다.
재빠르게 줄을 섰지만, 과연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다행히도 우리는 1층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 앉았던 그 자리를 똑같이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앉으니까 좀 낫네.”
시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들어오면서 받은 종이에는, 개최식을 먼저 거행한 뒤에 선수를 소개하고 시합을 시작한다고 되어 있었다.
시합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꼭 TV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아서 신기하다.
프로그램의 방청객이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 있을 프로그램에 가족이 나온다는 점이지만.
“위그드라실 님. 드셔보시겠습니까?”
“팝콘이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라디온이 고소한 냄새가 나는 봉투를 들고 왔다.
안에는 노란 눈송이 같은 팝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냄새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팝콘 한송이를 입에 넣었다.
물론 그 뒤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속이 니글거려서 당장에라도 토하고 싶으니까.
우웩.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작인가?”
잠시 지친 속을 달래주기 위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반 쯤 자고 있는데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듯한 큰소리가 나의 잠을 깨웠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자, 모두 환호하십시오. 지금부터 루카스 왕국 제일의 실력자를 뽑는 대회가 열립니다!」
눈을 뜨고 시합장을 내려다보니, 한 남자가 요상하게 생긴 도구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법도구인 것 같은데 마이크와 같은 효과를 내는지, 그의 목소리는 큰소리로 증폭되어 경기장 내부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고함소리에 맞춰 사람들의 환호성을 질렀다.
경기장을 채운 함성소리가 귀가 아닌 온 몸으로 전해졌다. 그들의 함성에 나까지 절로 기분이 흥분되는 것 같았다.
축제란 이렇게 함성을 통해 열정이 전염되는 걸까.
“와아!”
그 열정에 전염되어 나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그어억!”
“위그드라실 님!”
소리를 지르자마자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내 위장이 놀라 구역질을 시작했다.
아라디온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걸쭉한 팝콘 스프를 흘릴 뻔했다.
“미안해. 아라디온…….”
“아닙니다. 환호도 좋지만 우선 진정하세요.”
“응…….”
모두가 열정을 불태우는 이 와중에 나만 아라디온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서 눈을 감고 라디오처럼 축제의 상황을 듣고 있자니 소외감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그 와중에 키가 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지금처럼 눕지도 못했겠지.
「그럼 시작에 앞서서 이번 대회를 주최하신 개최자이자, 루카스 왕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귀족으로 꼽힌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가장 신뢰받는 귀족이라니. 뭐냐. 너희 투표 같은 것도 하냐?
왕이 있는 걸 보면 민주주의는 아닌데 투표라니. 내가 이 세계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나?
「에반슈트 가문의 가주이자 루카스 왕국의 대공이신, 린셀 에반슈트님을 소개합니다!」
사회자의 큰 소리에 맞춰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 시작보다 열광적인 환호 소리가 린셀이라는 자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왔다.
톡톡.
마법도구…… 그냥 마이크라고 하자.
마이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곧 뒤따라오는 린셀이라는 자의 목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며 그를 찾았다.
경기장 제일 꼭대기에 있는, 딱 봐도 VIP룸으로 보이는 곳에서 정장을 입은 한 노인이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저희 에반슈트 가문의 천 주년 기념 대회에 와주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망원경을 VIP석으로 향했다.
그곳엔, 분수대에서 만난 그 노신사가 있었다.
“평범한 할아버지가 아니었구나.”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을 수가. 내게 인생을 상담해 주었던 그 친절한 할아버지가, 우리들이 숲을 나오게 된 계기인 대회주최자라니.
노신사, 린셀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가 경기장의 열기를 잠시나마 잠재웠다.
「여러분들이 긴 이야기를 싫어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짧고 간략하게 이야기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곳에서, 루카스 왕국에서 가장 강한 위인이 탄생할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역사상 가장 강한 위인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요.」
‘역사상 가장 강한’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다시 열광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이라는 말은 사람을 뜨겁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오늘 시합에서 최종적으로 우승한 선수에겐,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이자 모든 아인족의 족장이라 불리시는 여기 이분과 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노신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옆에서 한 아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자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팔씨름 하던 아인?”
「소개드립니다. 투제(鬪帝)라는 이명을 가지고 계신 아인족의 족장, 싱 님이십니다.」
“오오!”
사람들은 이제 열광하다 못해 미쳐가고 있었다. 저 아인이 그렇게 대단한 아인일 줄이야.
아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팔씨름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모험가 3대 전설 중 한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모험가 3대 전설이라니. 저 늑대귀 아인이?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관광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그들은 전설이라고 말한 이후로 환호성만 질렀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설이라니. 아라디온. 너도 알고 있어?”
“으음. 제가 여기 온 이후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지만,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할 거까지야…….”
그때였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챙이 넓은 신사모를 쓴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눈가에 흉터를 가진, 젊은 사내였다.
“투제의 전설에 대해서 궁금한가?”
“누구세요?”
낯선 인물이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놀랐다.
서양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던데. 그게 사실이었나.
……여긴 서양이 아니라 이세계잖아. 착각하지 말자.
“내 이름은 슬로우 웨건.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루카스 왕국의 신사지.”
저기, 혹시 당신도 전생자세요? 지구에 있다가 전생해서 좋아하는 캐릭터 코스프레 하는 거 아니죠?
“아. 그렇군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인지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별말이 없자 투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말 자기소개대로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다.
“과거 모험가 길드에서 활약하던 전설적인 인물이 셋 있었지. 천검(天劍) 홀랜드, 마제(魔帝) 렉슬럼, 그리고 지금 이곳에 나타난 투제(鬪帝) 싱이 바로 그 전설의 인물들이다.”
전설적인 모험가라는 건가. 천검이면 검사일 테고, 마제는 마법사인가?
그럼 투제는 격투가?
“그들이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한 역사는 짧지만 그 명성은 전 대륙에 퍼져나갔지. 그 어떤 의뢰라도 수행해 내는 실력을 가진 자들. 그 얻기 힘들다는 S등급을 받아낸 모험가 파티. 실력만으로도 전설이 되기 충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특이한 성격이 양념처럼 그들을 전설로 급부상시켰지.”
“특이한 성격?”
“바로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강자만 보면 의뢰를 무시하는 일이 있더라도 싸우는 그 호승심. 그러한 호승심이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전설로 이끌어주었지.”
“그건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닐까요?”
“아니. 성질이 더러운 게 아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길을 똑바로 걷는 것이지. 그리고 그 길 끝에 다다른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러운 성질머리의 끝을 봤다는 걸로 들리는데.”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에겐 너무 어려운 대답이었나. 후후.”
그냥 한마디로 성질이 불같다는 거잖아! 뭘 그렇게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어!
“어쨌든 그들은 각자 여러 가지 전설을 만들어냈지. 그 전설을 모두 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야기가 이번 대회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테니 생략하도록 하지.”
“전설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S급 모험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굉장한 등급이라는 것은 알 것 같다. 그럼 굉장히 강하겠지?
그런 인물이 좌판을 열고 팔씨름으로 사람들을 등쳐먹고 있었다니. 애초에 당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냥 사기 치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전설적인 실력을 가진 자들이다. 홀랜드는 검, 렉슬럼은 마법, 그리고 싱은 주먹에서 전설이 되었지.”
“주먹…….”
“쉽게 말하면 그냥 싸움이다. 막싸움.”
“…….”
확실히 굉장하긴 하군. 막싸움으로 전설이 되다니.
그런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를 이기면 또 다른 전설이 될 수 있어서 역사상 가장 강한 위인이 될 수 있다고 한 건가.
참견쟁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노신사의 연설이 끝나있었다. 처음 말한 대로 진짜 짧게 끝낸 것 같다. 보통 이런 연설은 30분은 기본인데.
「그럼 무투대회의 개최를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이런. 연설이 끝났군. 그럼 이만. 시합에 집중하도록 하지.”
“네…….”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자기 마음대로 끝낸 사내를 잠깐 바라보다가, 괜히 신경 쓰면 나만 손해인 것 같아서 시합장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 예선을 통과한 선수들이 하나 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전부 한 실력 할 것처럼 생긴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 중에서 핀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핀!”
핀의 신체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이 많은 사람들의 고함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정확히 찾아낸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불가능했을 테니까.
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입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저 엘프 아가씨 귀여운데.”
“나는 저쪽에 돈을 걸겠어.”
“뭐? 귀엽지만 강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귀엽잖아. 그거면 됐지.”
핀을 귀엽다고 칭찬해 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능글맞게 생긴 아저씨들이 핀 이야기를 꺼내서, 혹시나 이상한 소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렇게 입장하는 선수들을 보며, 그리고 시합장에 나와서도 밝은 미소를 띤 핀을 보며 나는 드디어 무투대회가 시작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