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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무투대회(6)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경기장 내부 선수 대기실.
제각기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는 선수들이 있었다.
어떤 선수는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복도를 서성거렸고, 다른 선수는 음식을 먹으며 긴장감을 해소했다.
또 어떤 선수는 시도 때도 없이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고, 고개 숙인 채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선수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범하게 행동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다들 속으로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숨기며, 다른 선수들에게 얕보이지 않도록 평온을 가장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긴장하고 있지 않은 선수가 한 명 있었으니…….
“다들 엄청 긴장하네.”
그녀가 바로 핀이었다.
오전에 경기장으로 향한 핀은, 직원들이 하는 경기에 대한 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역시 없네.”
교육도 듣네 마네, 흘러가는 시간도 흥청망청 보내고 있는 그녀가 찾고 있는 대상은 지난 번 팔씨름을 했었던 늑대 귀의 아인족 싱이었다.
“온다고 하더니만. 도망갔나.”
그녀가 느꼈던 세계수의 마력에 대한 건은 위그드라실의 조언을 얻어 이제 잊기로 결심했지만, 아직 싱과는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다.
“장갑은 이제 됐으니 싸워보고 싶은데…….”
그러나 그와는 아직 끝내지 못한 승부가 있었다.
처음이었다. 힘으로 누군가에게 밀리는 것은.
전신의 힘을 모두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팔씨름에 불과했으니, 작은 여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경기장에서 하는 시합이라면, 서로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대기실에서 둘러본 바로는 다들 실력은 있지만 그저 그래 보이는 선수들밖에 없었기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제일 강해 보이는 사람도 예전에 숲에 들어왔던 모험가 대장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기에, 전혀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엔 우승자에게만 상품이 있다고 했지?”
“아까 교육시간에 뭘 들은 거야.”
근처에 있던 두 선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핀은 할 일도 없거니와 기다리던 사람도 찾지 못한 무료함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우승 아니면 말짱 꽝이구먼. 기운이 안 나는데.”
“그래도 계속 올라가다보면 이름이랑 명성은 올라가겠지. 그럼 모험가로서 명성도 올라갈 거고. 우승을 못해도 득은 될 거야.”
사전교육시간에 딴짓을 했던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하아. 명성이고 뭐고 우승이나 했으면 좋겠다. 우승 상품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해.”
“광룡의 비늘로 만든 갑주라니. 혹시 가짜 아니야?”
“에반슈트가문에서 사기를 칠 리가 없잖아.”
‘에반슈트 가문?’
핀은 그 단어가 어쩐지 낯익었다. 골똘히 생각해보니 교육시간에 얼핏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대회를 개최하신 에반슈트 가문은…….’
그 뒤로는 전혀 듣지를 못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싱을 찾느라 집중을 못한 것이다.
‘전혀 기억이 안 나!’
……솔직히 말하자면 찾는 도중에 이야기가 길어져서 깜빡 졸아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본인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그녀였다.
“광룡의 갑주라. 평범한 갑옷은 아니겠지?”
“설마. 듣기로는 그 갑옷을 입으면 어떠한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던데?”
“그냥 갑옷이?”
“그냥 갑옷이 아니라 그 유명한 광룡의 갑옷이니까. 그것뿐이겠어? 명검으로 베도 흠집하나 나지 않는다고.”
“그거야 뭐 좋은 철을 쓰고, 명장이 만든 갑옷이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겠어?”
“뭘 모르시는군. 한 때 실험한 적이 있는데, 천검(天劍)도 베지 못하고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했다 이거야.”
“……그건 좀 사기로군. 말도 안 돼. 그 인간이 베지 못하는 물건도 있었어?”
‘천검(天劍)?’
상당히 흥미가 가는 인물이다. 벨루스의 비늘로 만든 갑옷을 베지는 못했다지만 시도한 것만으로도,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만으로도 한 번 싸워보고 싶은 호승심이 들었다.
‘그때 그 모험가보다는 세려나?’
“어쨌든, 우승만 하면 모험가 생활도 끝이지 뭐.”
“천 년 전에 죽었다던 광룡의 비늘은 왜 하나만 남은 거야.”“글쎄. 전력을 다해 토벌하다 보니 몽땅 사라졌겠지. 안 그러고서야 어떻게 그 용을 잡을 수 있었겠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용은 죽어서 비늘을 남긴 건가?”
“……농담한 거냐?”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바람을 쐬기 위해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하아.”
바깥 공기가 그녀의 폐를 채워주며 상쾌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불쾌함을 씻어주었지만, 손톱에 낀 모래처럼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이제 이해는 하겠는데, 그래도 쫌. 돈으로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그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찾기 위해 나온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갑옷의 뛰어난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차라리 착용한다고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굳이 돈을 받고 팔아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방금 이야기한 자들 역시 인간. 그동안 인간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려 했지만, 핀은 아직도 인간들은 왜 그렇게 돈을 밝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밖에서 바람을 쐬던 그녀는, 시합장을 구경하다가 멀리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앗!”
경기장 가장 꼭대기에 있는 귀빈석 자리에, 그녀가 찾아다니던 싱이 있던 것이다.
“저기에 있었어!?”
그는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 상대 역시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은?”
그녀는 위그드라실이 분수대에 있을 때, 그를 데리고 가려 했던 노신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착하게 생긴 외모였지만 길 잃은 어린 아이를 마음대로 집으로 데리고 가려 했던 납치미수(?)범.
싱과 대화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그 노신사였다.
“무슨 관계지?”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인물이기에, 이번 대회를 구경하러 온 인물이겠거니 했지만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관심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노신사 역시 뭔가 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아는 사인가?”
그러면 어떠하리. 방금 전까지의 불쾌함은 사라지고, 호적수가 참가할지도 모른다는 즐거움에 기분이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시합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도 멀었고, 괜히 대기실에 들어가서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보단 이곳에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핀은, 관중석에 앉아서 싱을 쳐다보았다.
선수 대기실에 없었으니 정말 그는 선수일까? 그런 의문이 들던 찰나, 그녀의 시선을 느낀 싱이 관중석으로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이윽고 싱이 팔을 내밀었다.
“엄지?”
팔을 뻗어 주먹을 쥐고, 엄지를 세운 싱.
그리고 핀이 그것을 보는 순간, 엄지가 아래로 향하게 주먹을 돌렸다.
명백한 도발.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경기에 참가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수 대기실에선 볼 수 없어도 그가 경기를 참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핀이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를 꼬아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싱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후.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우리 아빠랑 나만 아는 비밀이야.”
그것은 지구에서만 통하는, 그것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제스쳐. 싱이 알 리 만무했다.
“반사다. 메롱!”
혀를 삐쭉 내밀고 시원하게 웃은 핀은, 도망치듯이 선수 대기실로 돌아갔다.
남아서 그녀를 보고 있던 싱만이 손가락을 꼬며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라며 중얼거렸다.
* * *
“왜 그러십니까?”
경기장 귀빈석에서 싱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노신사가 싱의 손가락을 보며 물었다.
검지와 중지를 비꼰 모양은 식견이 풍부한 그로서도 처음 보는 제스처였다.
“자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아뇨. 잘 모르겠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제스쳐가 아니라 손가락이 간지러워 긁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싱은 계속 그 모양을 유지하며 쳐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손가락을 풀었다.
모르는 것을 계속 생각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으니까.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규칙이었다.
“그나저나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상관없다. 어차피 잠시 들리는 길이었으니까. 여관도 나름 머물만 해.”
“머물 만하긴요. 족장. 어제도 침대가 너무 작다며 투덜거리셨잖아요.”
“그건 좀 그렇더군. 인간들 침대는 너무 작아. 발이 침대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싸구려 여관을 써서 그런 겁니다.”
“음? 거기 싸구려였나? 왜 싸구려로 잡은 거지?”
“족장이 식비로 기껏 벌은 돈을 다 쓰셨으니까요.”
옆에서 란이 구박하듯이 말했지만, 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나보다 란, 네가 더 많이……!”
발등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에 싱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란의 뒤꿈치가 싱의 발을 짓뭉개는 것을 본 노신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자네 눈엔 사이가 좋은 걸로 보이나?”
“원래 사이가 좋을수록 티격태격하는 법입니다.”
의자에 앉아 욱신거리는 발등을 문지른 싱은 노신사를 보며 생각했다.
언제나 한결 같은 미소를 짓는 남자. 귀족이지만 귀족답지 않은 이 자는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관이 불편하시다면 저희 저택에서 머무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아. 그건 안 돼. 이 녀석이 징징대거든. 전에 자네 집에서 잤을 때도 이 녀석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끼고 있는 장갑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예전 일을 기억하고 계신건가요?”
“뭐, 나야 딱히 그런 일 따윈 신경 쓰지 않지만, 이 녀석은 그게 아닌가 보더군.”
“혹시 시합에도 그걸 사용하실 생각은?”
노신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상대가 없는 그이거늘, 장갑까지 사용한다면 누구도 이기지 못하리라.
“아아. 사용 안 해.”
“다행이군요. 굳이 그걸 안 써도 상대가 없으시거늘…….”
“있다.”
“……!?”
그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노신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떠오른 한 명의 선수. 노신사는 방금 전 싱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눈 소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의심의 의심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노신사는 해답으로 가는 빠른 길을 택했다.
“그게 누구입니까?”
정답을 아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투제(鬪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