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15화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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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무투대회(4)

“아빠. 저 어땠어요?”

“아주 멋있었어.”

시합이 끝나고, 인파를 헤치며 핀이 우리가 있는 관중석으로 돌아왔다.

나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핀에게 칭찬해 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내 자신이 무섭다.

“정말로 보신 거 맞아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그럼 제가 주먹으로 이겼게요. 발차기로 이겼게요?”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뒤에 있는 아라디온에게 몰래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당연히 발차기지.”

“앗. 정말로 보셨어요?”

“그럼. 아까 내가 손 흔드는 거 봤잖아.”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내 옆으로 핀을 앉히고 다시 시합을 구경했다.

옆에서 핀이 ‘흐음.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라며 중얼거렸다.

앞만 보자. 시합에만 집중하는 거야. 마음의 평온을 찾아야지.

그냥 여기서 끝내고 돌아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앞으로 핀의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선수들을 안보고 그냥 갈 수는 없다.

“다들 열심히네.”

뭐, 그렇다고 본다고 해서 내가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선수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내 눈으로 움직임을 따라가기 힘든 선수들.

이 경우엔 아라디온에게 핀과 싸우면 누가 이길지 물어봤는데, 아라디온은 한 번도 빠짐없이 전부 핀의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그저 그런 경우.

평범하게 싸우는 선수들은, 움직임을 내가 따라갈 수 있었지만 진짜로 평범해서 절대로 핀에게 이길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이쯤 되니 시합에 흥미가 떨어진다. 시합보다는 선수들의 생김새에 더 집중을 하게 되어버렸다.

우락부락한 선수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스테로이드도 없는 세계인데 어떻게 그 정도로 근육을 키웠는지 참 궁금하다. 팔뚝이 어찌나 굵은지 과장을 좀 보태서 내 허리만 하다.

혹시나 이것도 마력의 효과일까? 마력을 지구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헬스 하는 사람들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텐데.

인간은 제쳐두고, 아인들이 정말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인들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늑대 귀를 한 아인부터 시작해서, 강아지 귀를 한 아인, 뿔이 달린 아인과 날개가 달린 아인도 있었다.

날개가 달린 아인의 경우, 평범하게 땅에서 싸우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어떤 아인은 새처럼 하늘을 날며 싸우기도 했다.

“실격!”

근데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시합장 밖으로 나가 버리기도 하니 참으로 허망하다.

공중에서도 시합장 밖으로 나가면 바로 실격처리 당한다. 싸우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인은, 바로 고양이 귀를 한 아인이다.

대부분의 고양이 귀 아인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뾰족한 고양이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를 달고 있었다.

“오.”

게다가 싸우는 스타일도 특이했다. 진짜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변칙적으로 움직였고, 짐승처럼 네 발로 시합장을 뛰어다니며 싸우다보니 상당히 역동적인 시합이 돼서 눈이 즐거웠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있고.

선수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가서 쓰다듬어 보고 싶다.

궁금하다. 쓰다듬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진짜 고양이처럼 반응할까?

내가 생각해 놓고도 상당히 차별적인 발언이라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들을 잊으려 애썼다.

“아빠.”

“왜 그래 핀?”

“흐음……. 아니에요.”

고양이 아인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와중에 핀이 말을 걸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었는지 다시 시합으로 눈을 돌렸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던 걸까?

시합은 계속됐고, 그 이후로 눈에 띄는 시합은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일어나서 숙소로 돌아가든지, 좀 더 관광을 하자고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어린아이가 시합에 나왔네.”

한 시합이 내 관심을 끌었다.

시합에 참가한 자는 마족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눈에 띄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족이 아니더라도,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참가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살?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마족 아이는,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남자아이로 보였다.

짧은 머리카락이 눈썹 바로 위까지 내려온 스타일이었는데 성인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당당히 마주보고 있었다.

“핀. 지금 저기 저 아이. 뭐라고 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망원경으로 보니 상대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있는 곳에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먼 거리로 인해 들리지 않아서 핀에게 물어보았다.

“으음. 지금 ‘꼬맹이라 하지 말고 빨리 덤비기나 하시지. 떡대 자식아’라고 하네요.”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입이 참 걸걸한 꼬마로군. 무섭다.

소년의 도발이 먹혔는지 상대방이 소년을 깔아뭉갤 듯이 덮쳐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뒷모습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소년을 덮친 참가자가 갑자기 다리가 풀린 듯이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소년 바로 앞에서 다 죽어가는 생선처럼 바닥에 쓰러져 축 늘어졌다.

심판이 소년의 승리를 알렸다.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마력을 볼 수 있는 내 눈에, 잠시나마 진하고 두터운 마력으로 상대를 감싸는 모습이 얼핏 엿보였다.

마법인가. 그러고 보니 마족은 마법에 뛰어나다고 들었던 것 같다.

승리한 것이 딱히 기쁘지 않은지 마족소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합장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저 녀석은 체크해 두자. 나중에 또 싸우는 모습이 기대된다.

시합이 모두 끝났다. 웅성거리던 관객들이 하나둘씩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아라디온도 따라 일어났지만, 핀은 시합장을 아직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핀. 왜 그래? 시합은 끝났는데?”

“그러게요. 그냥 끝나 버렸네요.”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내 궁금증은 금새 풀렸다. 핀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리며 말해주었다.

“하아. 싱인지 샹인지 나중에 가만 두나 봐라.”

“그게 누구야?”

“어제 숙소 앞에서 팔씨름 장사를 하던 아인이에요.”

그 남자를 찾고 있던 거였군. 팔씨름으로 승부를 보지 못하고 무투대회에서 결판을 보기로 한 건가?

궁금한 것이 자꾸만 생겨서 핀에게 물어보았다.

핀은 나를 안아 들더니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서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으음. 세계수의 마력이라.”

“근데 잘못 느낀 거 같아요. 지나갈 때는 얼핏 느껴졌었는데, 막상 팔씨름을 하면서 만져 보니까 아무런 느낌도 안 들던걸요.”

세계수의 마력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만들어 준 무기거나, 아니면 다른 어린 세계수들로 만든 무기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용사들이 사용했던 무기라면 나나 핀이 확실하게 알아봤을 테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둘 중 하나겠네. 갑자기 새로운 곳에 와서 긴장감에 잘못 느낀 거거나, 아니면 내 형제들, 그러니까 어린 세계수의 마력이 조금 깃들었던 거라거나.”

“그런 걸까요.”

용사들의 무기는 확실히 수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외에 다른 세계수로 만든 물건들까지 수거할 생각은 없다.

분명 엄청나게 많을 것이고, 그것들이 세계에 어떤 큰 해악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

용사들의 무기의 경우, 상당히 위험한 일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내가 수거하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다.

하지만 다른 세계수는 아직 미숙하고 어린 나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세계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직 어린 녀석들을 이용한 것이기에, 천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선 대부분 마력을 잃고 평범한 장비가 됐을 것이다.

핀이 본 장갑도 그런 종류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남은 마력이 소멸되는 그 순간을 우연히 핀이 느낀 것이 아닐까.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

“벌써요? 해가 이렇게 중천인데.”

으음. 하긴 지금 돌아가 봐야 빈둥거리기나 하겠군.

나는 아라디온을 힐끗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있게 웃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역시 우리들의 관광가이드. 준비가 철저하군.

* * *

위그드라실과 핀이 사라진 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혹시…….”

경기장에서 나오는 인파들 사이에서 조용히 위그드라실 일행을 지켜보던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할,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착각이겠지.”

그리고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인파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드디어 도착이다.”

피곤하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왜 허락한 것일까. 그냥 빈둥거리더라도 숙소로 가자고 우길걸.

경기장에서 나온 직후, 우리들은 아라디온을 따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 세계에 택시가 있을 리 만무하다. 버스도 없고, 이동수단이라곤 마차뿐이다.

그렇다고 마차를 타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들리는 지점들은 모두 걸어서 가까운 곳들이라 마차를 타기엔 여의치 않았다.

가깝긴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하루 만에 거의 30여 곳을 돌아다니다니! 이건 미친 짓이야!

안 돼. 틀렸어.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핀이 업어주지 않았다면 필시 걸어 다니는 도중에 쓰러졌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피곤한 육체를 편히 쉬게 해주자. 아아. 정신이 빨려들어 간다.

그래. 이 느낌이야.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숙면에 빠져드는 이 느낌. 오늘은 최고로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아빠.”

“응.”

“이것 좀 봐주세요.”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실눈을 뜨며 핀을 보았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켜 핀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고양이?”

핀이 머리 위로 고양이 귀가 솟아나 있었다. 옆으로 살짝 보이는 머리띠가, 진짜 고양이 귀가 아닌 것을 말해 주었다.

“헤헤. 어때요?”

“귀엽네.”

핀이 폴짝폴짝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더니,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아서 버틸 만 했다.

그리운 감각이다. 핀이 다 자라고 난 이후론 언제나 내가 핀에게 안겼는데, 간만에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헤헤. 고양이랍니다.”

혹시 내가 고양이 아인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걸 눈치챈 건가.

핀의 머리카락이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조심스럽게 살며시 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핀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그렇게 핀을 쓰다듬어 주었고,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기분 좋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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