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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무투대회(3)
도시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예선을 등록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숙소에서 나섰다.
괜히 늦게 갔다가 등록을 놓치기라도 하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모두 헛수고가 되기에 조금 일찍 나섰다.
“잠깐. 거기 엘프양반. 돈 내고 가시지.”
“무슨 소리십니까. 숙박비는 3일치 모두 선불로 드렸을 텐데요?”
“어제 자네의 부인께서 드신 음식 값은 계산 안 했거든?”
분명 어제 숙박할 때만 해도 친절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줬던 것 같은데, 오늘은 주인장이 상당히 신경질적이다.
저혈압인가? 저혈압이 있는 사람들은 아침이 힘들다던데.
“식사 비용만 60실버라니……. 핀 아가씨. 대체 얼마나 드신 겁니까?”
“그게, 먹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해요.”
그렇게 식비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상당히 매섭다.
이 동네는 저혈압이 유행병인가. 으음. 자세히 보니 아라디온을 노려보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시합이 열리는 곳은 어디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전에 조사를 끝마쳤는지, 아라디온이 앞장서서 우리들을 이끌었다. 하는 짓은 좀 그렇지만 이래저래 믿을 만한 녀석이다.
“이곳입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다보니 어느새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은 우리들이 머문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구 출신으로서 이 세계의 건축기술을 조금 무시했던 경향이 있다.
뭐라 해도 현대기술의 발전이 아직 오지 않은 이쪽에선 거대한 건축물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경기장이라고 해봐야 그저 그런 수준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크네.”
미안. 이세계 사람들. 미안. 건축기술자 아저씨들.
경기장은 거대한 석조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큰 석재 기둥이 원형으로 외벽 쪽에 배치되어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2층에도 같은 방식으로 3층을 받치는 기둥이 있었고, 그렇게 5층까지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형식의 건축물을 지구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콜로세움이다.
뭐, 직접 가본 거는 아니고. 사진으로밖에 못 보긴 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입구 근처에서 줄을 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거기가 예선을 등록하는 곳임을 알았다.
“안에 먼저 들어가서 쉬고 계시겠습니까?”
“아니야. 나도 같이 기다릴게.”
아라디온은 본인이 줄을 설 테니 먼저 들어가라 권유했지만, 나는 함께 줄을 서기로 결정했다. 내가 원해서 온 여행인데 나만 편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차피 등록은 참가자가 해야죠. 가서 아라디온이랑 같이 쉬고 계세요.”
“으음. 그래도…….”
“전 괜찮아요. 사람도 많은데 같이 서 있기 힘드시잖아요.”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보아하니 사람들도 슬슬 몰리는데, 미리 가서 아가씨의 경기를 잘 볼 수 있도록 자리라도 잡아두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은근히 설득력 있다.
나는 아라디온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핀. 먼저 들어가 있을게. 예선전 힘내!”
“헤헤. 넵!”
핀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우리는 경기장 안으로 입장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줄을 설 정도는 아니었고 곧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장 안은 장엄했다. 마치 축구장처럼 가운데 있는 정사각형의 돌로 된 시합장을 두고 관중석이 빙 둘러져 있었으며 학교 스탠드처럼 그곳에 앉아서 구경할 수 있는 구조였다.
본격적으로 선수들이 시합을 겨루는 시합장은 방금 설명했듯이 관중석에 둘러싸여 있었다.
잘 만든 바둑판처럼 정사각형의 시합장이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시합장 외에 작은 시합장이 주변에 사방진처럼 포진해 있었다.
“예선을 치루기 위한 작은 시합장들인가.”
“하긴, 아까 보니 인원도 많던데 한꺼번에 치룰 예정인가 보네요.”
그런데 경기장에 막상 들어와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안 보여.”
가장 앞줄에 가서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건물이 크다 보니 시합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예선이 시작하기 앞서 시합장을 쓸고 있는 청소부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원. 이거 막상 시합이 시작하면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몰라.
“자. 이걸로 보세요.”
“망원경?”
정확히는 손잡이가 달린, 안경처럼 생긴 망원경이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오페라를 관람할 때 귀부인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그 망원경이 아닌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더니, 이계에서도 이 정도 기술력은 갖추고 있는 건가.
하긴, 그러니까 이런 건물도 지었겠지. 아니지. 기술력이 아니라 마법으로 지은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아라디온에게서 망원경을 받아들고 시합장을 다시 관람했다.
방금 전까지 엄지손가락 만하게 보이던 청소부가 얼굴의 표정까지 일일이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야?”
“아까 입구에서 팔더라구요. 미리 사왔죠.”
과연. 우리의 가이드이자 물주. 믿음직하다.
“그런데 이런 대회는 갑자기 왜 하는 거야? 연례행사인가?”
말하고 나니 연례행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이 아버지의 비늘로 만든 갑옷인데, 그건 딱 한 벌밖에 없으므로 연례행사에 내 놓는 상품치고는 꽤나 거창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루카스 왕국 국왕의 생일 기념일까? 건국 1000주년 행사라도 되나?
“제가 듣기론 유명한 가문이 개최하는 행사라고 들었습니다.”
“유명한 가문?”
“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은 안 나는데,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이름 높은 귀족가문에서 주최하는 대회라고 하더라구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빌려서 개인적인 대회를 주최한단 말인가.
이 세계의 귀족은 아직 만나본 적 없지만, 조금 어떨지 내 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분명 탐욕스러운 돼지가 아닐까. 서민들에게서 세금을 등쳐먹고 골수까지 빨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배부른 돼지. 기름기가 좔좔 흘러서 얼굴이 항상 번들거리는 그런 녀석.
내가 살던 한국에서도 그런 녀석들이 있었지.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가 만났던 그 노신사도 귀족이 아니었을까?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품격 있는 행동과 어린 나에게조차 정중한 말투를 보면 많이 배우신 분 같던데.
“근데 왜 이런 대회를 열었대?”
“올해가 가문 성립 1천 주년이라고 하더군요.”
“1천 주년? 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가문이란 말이야?”
상상도 되지 않는다. 1천 년이라니. 현대 한국을 예로 들어보면 고려시대 때부터 있던 가문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렇다면 이런 대회를 개최하는 것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천 년이나 존속한 가문이라면 분명 국가 내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겠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경기장도 임대해서 사용할 수 있는거고.
어쩌면 임대가 아니라 그 귀족가문의 소유일지도 모르겠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가 있었다.
드문드문 빈 자리가 보이던 관중석도 콩나물시루를 보는 것 같았고,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경기장은 소란스러웠다.
경기장 아래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들 우락부락한 몸이라 한 성질 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현실에서 마주치면 말 한마디 못 걸고 그대로 눈을 깔 법한 외모들이랄까.
거기에 참가자들은 인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많기는 했지만 드문드문 엘프들도 보였고 동물 귀를 한 아인들도 섞여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마족들도 있기는 했지만, 찾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었다.
비율로 따져본다면 인간 > 아인 > 엘프 > 마족순으로 시합에 참가한 것 같다.
“오?”
참가자들을 구경하던 도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저기 핀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핀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 쪽을 보며 따라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마 마음이 통했나 보다.
“핀이 저기 있다는 것은,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시합 참가자라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가 본데요.”
내가 예상했던 대회랑 다르다. 아무래도 예선전은 딱히 별다른 해설이나 개회식 없이 시작하나 보다.
하긴, 예선이니까. 뭘 바랐던 거야 나는.
잠깐.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본선도 아니고 예선시합을 보러 온 거야?
아무래도 이 시대엔 놀 거리가 많이 없다보니 모두 이런 이벤트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듯싶다.
“아. 저기 시작하네요.”
경기장에 입장한 선수들이, 각자 자신의 시합장으로 올라가 상대 선수와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흥미를 가지고 망원경으로 그들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평범하구만.”
그냥 평범하다. 현실에서 싸우는 것처럼 투닥거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째 내 눈엔 평범해 보인다.
가끔 마법을 쓰는 선수들도 있고, 체조선수와 같은 몸놀림을 보이는 선수들도 있다.
근데 그래도 평범해 보이는 걸 왜일까.
“평범해 보이십니까?”
“응. 너무 평범해서 김이 팍 새는걸.”
시합을 구경하면서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본 싸움들이 하나 같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서 그런 것 같다.
아버지랑 싸웠던 일이라든지, 벨룸이 보여준 그 결이라는 기술이라든지, 핀이랑 모험가들이 싸운 일이라든지, 드렌 왕자가 보여준 화염마법이라든지.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니, 나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숲에서만 있었는데 무슨 싸움을 이렇게 자주 겪은 거야.
“저기 핀 아가씨차례가 온 것 같네요.”
“그래?”
따분한 시합에 망원경을 내리고 있던 내게 아라디온이 핀의 시합을 알려주었다. 나는 곧바로 망원경을 핀의 시합을 살펴보았다.
심판으로 보이는 사내가 손을 들었다. 아마 시합을 시작하려는 신호를 보내려는 것 같다.
심판의 손이 내려가자, 핀이 움직였다.
그리고 상대 선수가 시합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면서 시합이 끝났다.
뭐야.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역시 핀 아가씨는 굉장하네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저런 속도를 가진 고수는 흔치 않았는데.”
“하나도 안 보였어. 으.”
분명 나무인 상태에선 잘 보였었는데, 정령의 상태로 보려니 움직임이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시합을 끝낸 핀이 내 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라디온에게 미리 말해두자.
“핀한테는 말하지 마. 멋있었다고 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아라디온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