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12화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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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무투대회(1)

핀에게 잔뜩 혼이 난 뒤로, 우리는 숙소를 잡고 그곳에서 며칠 머물기로 정했다.

무투대회는 내일부터 예선을 시작하고, 본선까지 합쳐서 3일간 진행된다고 들었으니 숙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숙소를 잡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내가 마음에 드는 숙소가 보여서 그곳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바람이 머무는 여관.」

별 이유는 없다. 그냥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머무는 여관이라니. 뭔가 시적인 느낌이 팍팍 들어서 이곳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여관을 숙소 삼아 방을 잡은 우리들.

우리들이 잡은 방은 두 개로서, 각각 인원 배치는 다음과 같다.

나와 핀, 필로우가 같은 방을 쓴다.

그리고 아라디온이 혼자 방을 쓴다.

“위그드라실 니이이임!!! 왜 저만!”

“너는 남자잖아. 다른 애들은 여자고.”

“아가씨랑 필로우만 함께 자고 위그드라실 님은 저랑 같이 자면 되잖아요.”

“안 돼. 너랑 같이 자기엔, 넌 너무 위험해.”

“제가 왜…….”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어? 너, 다른 엘프들이 내 위에 올라타려고 할 때 몰래 끼어 있었잖아.”

“그, 그게 그러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아라디온이 뜨끔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숲에서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오밤중에 들리는 부스럭 소리. 눈을 떠보니, 달빛 아래에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어오는 엘프들.

깨어난 핀이 그들을 말리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보던 와중에 발견한 한 남자.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라디온.

“그때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데.”

“……죄송합니다.”

얼마나 배신감이 심했는지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아라디온, 너마저!’라고 외치고 싶었다.

“히이잉…….”

아이처럼 훌쩍이며 아라디온이 자기 방에 짐을 풀러 나갔다. 나는 방 안 침대에 누워 푹신함을 만끽했다.

처음이다.

이런 집다운 집에서 지내보는 것은. 숙소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인지 간판부터 오래된 낡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방 안에서 숨을 크게 들이켜 보면 오래된 책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아빠. 먼저 씻으실래요?”

방 안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방을 구경하는 도중에 발견했는데, 신기하게도 현대의 욕실과 비슷한 구조였다.

“아니. 나는 좀 더 침대에 누워있을래. 먼저 씻어, 핀.”

“그럼 먼저 씻을게요.”

욕실로 들어간 핀을 보며, 나는 욕실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욕실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큰 욕조가 있었고, 샤워기와 비슷한 수도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구에서처럼 배관으로 지하에서 물을 끌어오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배관 대신에 수도관이 연결된 곳은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돌이었는데, 물을 틀어보니 그것이 반짝이면서 물을 쏟아내는 시스템이었다.

낡은 외형과 다르게 마법으로 수도 시스템을 구축해 두었다는 점에서 나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일일이 우물에서 물을 떠올 필요도 없고, 방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니.

“여기서 살고 싶다.”

진짜로 여기서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기분은 그렇다.

흔히들 여행지에서 하는 소리랄까.

괜스레 생소한 곳에 와서 여행 기분을 만끽하면서, 기분이 업 돼서 하는 소리 있잖아? 며칠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무인 상태에서 느낄 수 없는, 숲에서는 즐길 수 없는 인간의 삶.

잠시 동안 향수를 느끼며 인간의 삶을 즐기자.

“아빠. 일어나세요. 어휴. 벌써부터 이렇게 나태해지시면 어떻게 해요.”

“으응? 아. 깜빡 잠들었네.”

잠시 침대에 누워서 편안함을 만끽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보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창밖을 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빨리 씻고 자야지. 으.”

여행의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침대가 푹신해서 그런 걸까. 이제 막 어두워지는 초저녁인데 벌써부터 잠이 몰려온다.

피곤한 상태에서 옷을 벗으려니 자꾸 몸에 걸려서 잘 안 벗겨진다. 옆에 있던 핀이 ‘아빠도 참’이라며 나의 옷을 벗겨주었다.

“고마워 핀.”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모습이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속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부터 하는 짓을 보면 그냥 영락없는 어린아이지 않은가.

전이었다면 부끄러워서 말도 못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아니, 익숙하다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어려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나란 놈은 정신이 어린 걸지도.

하긴, 성인이 된 이후로 내가 제대로 사회생활을 한 기억이 없다.

집 안에서 처박혀 있었으니 성인으로서 제 역할을 한 적이 있을 리가 있나.

“아빠. 저녁은 어떻게 하실래요?”

“나는 괜찮아. 물만 마시면 되니까.”

“으음. 그럼 저…….”

“괜찮아. 먹고 와.”

이곳에 와서 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핀 역시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주변에 신기한 것들을 눈에 담았다.

그중에서도, 핀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음식.

항상 내 나뭇잎이나 과일만 먹던 핀이지만, 이곳에 와서 새로운 음식들을 접하고는 신세계를 깨달은 표정으로 전에 없던 표정을 지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냄새를 맡을 때마다, 핀의 입가에 군침이 흐르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나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본인만 먹는다는 죄책감으로 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마 그 인내심의 한계도 숙소에 들어오면서 깨진 것 같다.

숙소의 1층은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올 때, 식당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세계의 음식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새로 보이는 짐승을 노릇하게 구운 고기, 밀가루를 빚어 만두처럼 둥글게 만 음식이나 큼직한 고기를 육즙이 흐르도록 살짝 구어 내온 스테이크.

물 외에는 식욕이 돋지 않는 나조차도 순간 그 비주얼과 독특한 향신료 냄새에 군침을 흘렸으니, 핀이 흥미를 갖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즐겁게 밖으로 내려가는 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욕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아직 방에 남아 있는 한 명이 기억나서 침대를 돌아보았다.

“필로우?”

침대 위에 펼쳐진 이불. 그리고 거기에 머리를 감추고 있는 토끼 한 마리.

아니, 혼래빗이랬나? 혼래빗 한 마리.

“왜 그러시오. 주공.”

“같이 목욕할래?”

“히익!”

재미있다.

필로우가 암컷이라는 건 알지만,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거부감이 없다.

뭐, 인간처럼 생긴 핀에게도 알몸을 보인다는 거부감이 없는데 필로우에게 있을 리가 있나.

거기다가 저렇게 깜짝깜짝 놀라는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둘 수가 없다.

좋아하는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남자아이의 심리가 바로 이런 걸까.

……잠깐. 나도 남잔데 왜 그런 기억이 없지?

왜긴. 초등학교 때 조용히 공부만 해서 그런 거지 뭐.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었다. 이불 아래 숨어 있던 필로우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후후. 싫어?”

“어, 어찌 소인이 주공과 함께 목욕을 할 수 있겠소이까. 거기에 남녀가 유별난데…….”

“또 그 소리.”

흠. 어떻게 같이 목욕을 할 방법이 없을까.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필로우. 만약 내가 목욕을 하다가 암살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게 무슨 소리요?”

“암살자가 때를 가려서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만약 암살자라면, 목표가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릴 걸? 화장실을 갔을 때라거나, 지금처럼 목욕할 때를 노릴 것 같은데?”

“으으.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이건 목욕이 아니라 임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암살자가 없을 때, 미리 나랑 같이 목욕을 해서 상황에 익숙해지는 거야. 이러다가 막상 암살자가 들이닥쳤을 때, 욕실 문을 열었다가 나를 보고 지금처럼 몸이 굳으면 어떻게 해.”

필로우가 망설이면서 눈을 뜰랑 말랑 하고 있다.

후후. 조금만 더하면 넘어올 것 같은데.

“제가 같이하겠습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아라디온.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다.

너, 지금까지 밖에서 몰래 엿들었냐?

나는 열린 방문 앞으로 친절하게 걸어가, 그를 살짝 뒤로 밀친 뒤에 문을 닫았다.

“넌 안 돼.”

문 밖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는 없지. 너랑 같이 목욕하면 그건 그때부터 목욕이 아니라 내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하는 투쟁의 장이 될 것 같거든.

“자. 필로우. 봤지? 지금 들어온 건 비록 아라디온이지만, 만약 아라디온이 아니라 암살자였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랬으면 이불 속에 숨어 있다가 늦었을 수도 있잖아.”

최후의 설득이다. 이래도 안 한다고 하면 그냥 혼자 해야겠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심하게 하면 삐지기 마련이니까.

“아, 알았소이다.”

필로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날카로운 암살자의 눈동자가 열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의 몸을 보더니 순식간에 다시 닫혔다.

“하아. 하아.”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한 번에 번뜩였다.

“하아. 이제 되었소. 주공. 들어갑시다.”

“…….”

콧김을 씩씩거리며 내게 말하는 필로우를 보고 있자니, 조금 무섭다.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채,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는 모습이 약간 변태 같다고 할까.

생각해 보니 변태는 나로군.

토끼라고는 하지만 암컷인 필로우에게 알몸을 보여주고 있는데다, 같이 목욕까지 하자고 하다니.

나는 필로우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필로우의 거센 콧김이 자꾸 가슴에 닿아서 간지러웠다.

“우선 뜨거운 물에 몸이나 담가볼까.”

물을 틀자 뜨거운 물이 욕조 안으로 콸콸 쏟아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숲에 있는 온천만큼이나 뜨거운 물이었다.

크응. 크응.

“……필로우. 괜찮아?”

“괘, 괜찮소이다. 이것도 모두 수련. 소인은 아무런 사심이 없소!”

물을 모두 다 받은 뒤에, 한쪽 발부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전신의 근육을 노곤하게 풀어주었다.

숲에 있던 온천에서 즐길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그때는 전혀 아무런 운동도 없이 그냥 순수한 목욕이었지만, 지금은 사막을 건너고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다니고 들어와서 그런 것 같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같은 일을 해도 마음가짐이나 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하아. 시원하다.”

“뜨겁소만…….”

그런 뜻이 아닌데. 곰이 없으니까 네가 그런 개그를 하는구나. 어울리지 않는다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그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괜히 불가능한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인연이 닿게 되면 그때 걱정하면 되는 일이였다.

근데, 어째 물 색깔이 점점 빨개지는 것 같은데……?

“필로우?”

“흐에에…….”

필로우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필로우는 눈에 초점이 풀린 채, 이상한 헛소리를 시전했다.

“주, 주공…… 아니 되오…… 소인은 무사이온데…… 아아…….”

장난이 너무 심했나. 정신 차려! 필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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