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11화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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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노신사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였구나.”

노신사에게 들려준 나의 이야기는, 약간 각색을 더한 이야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정으로 몰아넣어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는 쏙 뺀 채, 그저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나는 그를 원망해야 하는지, 원망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참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나쁜 짓을 저지른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아니?”

“몰라요.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르는걸요.”

그건 사실이다.

분명 용사는 세계수의 마력을 잔뜩 손에 넣었을 테니까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본인이 직접 왕이 되어 계속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과연 세계수의 마력이 그 정도로 전지전능할까?

드워프인 벨룸도 나를 찾아왔을 땐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이지 않았는가?

제아무리 세계수의 마력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인간인 용사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벌써 노환으로 죽지 않았을까?

“그래서 복수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용서해 줘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거로구나.”

“…….”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고민이로군. 이렇게 어린 소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소녀라 불렸지만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노신사는 그 후로 조용히 내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 심심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아인을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꼬마아가씨처럼 말이야.”

분수대의 물보라가 슬슬 내 옷을 축축하게 적셔올 즈음, 마침내 노신사의 굳은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아가씨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군. 이 할아버지의 일은 할아버지가 선택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었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노신사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멀리 있는, 나는 알 수 없는 그만의 기억 속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지. 그 사람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단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몰랐지.”

“짝사랑이었나요?”

“짝사랑이라.”

노인이 기침을 하며 클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향한 비웃음일까. 자기 자신? 아니면 아직 사랑도 모를 꼬마아이가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어서?

“그래. 짝사랑이라 해도 좋겠군. 세상에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니까. 아, 이제 꼬마 아가씨도 알고 있군.”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는 생각이 망설여졌다.

짝사랑과 후회.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 낸 이야기의 결말이 훈훈하게 끝났을 리가 없다.

해피엔딩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서나 가능한 새드엔딩으로 끝났겠지.

개인적으로 그런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노신사의 이야기가 부디 나의 예상을 빗나가기를 바랐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단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소꿉친구로 자란 사람이라, 처음엔 내 감정을 몰랐지. 그저 친한 가족 간에 느끼는 그런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단다.”

소꿉친구를 짝사랑했구나. 흔한 이야기다.

어렸을 적부터 가족처럼 지내온 이성은, 상대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노신사, 할아버지의 경우엔 본인만 깨닫고 상대는 깨닫지 못한, 서로 그 감정이 엇갈린 것이다.

“처음엔 부정했었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리 없다고 말이야. 이건 우정이라고 몇 번이나 마음을 고쳐먹고 또 고쳐먹었단다. 하지만 우정이라고 계속 다짐해도, 그 친구를 만나면 가슴이 뛰는 것이 결코 우정이 아니라고 내 몸이 먼저 반응했지.”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노인이 턱을 받쳤다.

이제 그의 눈은 나를 향하지도 않았고,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단다. 나는 계속 감춰두고 또 감췄지만 그 마음은 퇴색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지기만 했지.”

“고백은 안 하셨어요?”

“고백?”

실언이다. 어떤 경우의 수를 생각해봐도 안 좋은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다.

고백에 성공했다면 이렇게 후회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

다행히도 나의 실언에 노인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과거의 후회를 모두 정리한 듯싶었다.

“생각이야 해봤지. 하지만 두렵더구나. 세상이 나를 뭐라고 할지,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지.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그 친구가 나를 벌레 보듯이 혐오하는 눈동자가 아른거려서 도저히 고백을 할 수 없었단다.”

말을 끝마친 노인이 또다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꿉친구에게 고백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일인가? 가족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볼 일인가?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특별한 환경에서 자라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계속 괴로웠단다. 그래서 결국엔 도망치기로 결심했지. 하지만 집안에서 모두가 나만 믿고 있는데 멀리 떠나는 건 불가능했단다. 결국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다른 쪽으로 도피하는 일뿐이었지.”

“설마…….”

“후후. 꼬마아가씨가 눈치가 빠르군. 그래. 나는 친구에 대한 마음을 잊으려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방법을 택했지. 그게 그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역시 비극적인 결말인가. 나는 이런 결말이 싫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인 것을.

때로는 현실이 더 잔혹한 법이다.

갑자기 노신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요. 꼬마 아가씨’라며 나를 달래주었다.

문득 분수대에 비친 내 얼굴을 보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래서 지금까지 그 친구와도 잘 지내고 있고, 사랑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아내와도 계속 살다보니 정이 들더구나. 웃기는 이야기지. 우정으로 이어져야 할 친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이어져야 할 아내와는 우정이 쌓였으니.”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알려주려는 듯, 몇 번이고 높게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가 광장 위로 지나갔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가 꼬마 아가씨께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고민…….”

여전히 분수대에 비친 내 모습은 시무룩했지만, 어린아이가 뾰로통해 있는 얼굴이라 심각하기 보단 귀여워 보였다.

“작은 깨달음이지만, 어쩌면 깨달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점이 있단다. 그것은 인간은 너무나도 작다는 거지. 뭐든지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투성이란다.”

과거의 기억을 보던 노인의 눈빛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리고 주름지고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품 안의 필로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움찔거렸지만, 나는 그의 손길이 썩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꼬마 아가씨가 말하는 부모님의 원수는 지탄받아 마땅할 자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지만,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희생시킨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지. 개개인의 행복을 짓밟는 자가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단다.”

노인이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조적인 웃음이 아닌, 보는 것으로도 따라 웃고 싶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하지만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르는 원수를 생각하며 마음 졸이고, 고통받는 것은 좋지 못하지. 이 할아버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매일 고통받았을 때처럼 말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 일이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단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아뇨. 몰라요.”

“운명에 맡기는 거란다. 불가능한 일을 해결하고 싶다며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실패하는 자신을 욕하고 홀로 고통받는 것보단,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언젠간 기회가 올 때, 그때 노력해도 늦지는 않지.”

그럴까. 그의 말이 사실일까. 나는 지금까지 괜한 고민을 하고 있던 걸까?

“인생이란 생각보다 짧단다. 게다가 한 번 지나간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 꼬마 아가씨. 꼬마 아가씨가 언젠간 오늘을, 또는 과거를 돌아봤는데 항상 고민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만 있다면, 언젠가 인연이 닿아 복수를 하고 난 다음에도 과연 행복할까?”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네요.”

“그래. 하지만 꼬마 아가씨고 고통받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에 복수를 성공한다 해도 기쁨보다는 허무함만이 남을 것이야. 어쩌면 지난 삶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이 할아버지처럼.”

그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어두워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미아처럼 떠도는 나의 앞을 조금은 비춰주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응? 조금은 도움이 됐니?”

“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런. 옷이 다 젖었구나. 내 이야기가 너무 길었나?”

“괜찮아요. 금방 마르겠죠.”

“그러면 안 돼. 잘못하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단다. 감기란 아주 아주 무서운 병이야.”

“이걸로 갈아입으면 돼요.”

나는 내가 필로우와 함께 껴안고 있던 원래의 내 옷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노신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럼 이 할아버지 집에 가서 갈아입자꾸나. 여기서 가깝단다.”

“으음…….”

뭐, 그리 나쁜 할아버지인 것 같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알았어요.”

나는 노신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가 또다시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었다.

주름진 얼굴에 핀 웃음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 그럼 함께 가자꾸나.”

“잠깐만요!”

그때, 뒤에서 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화가 난듯한 표정이었지만, 금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옆에는 아라디온이 함께 무서운 표정으로 동행하고 있었다.

맞다. 얘네들, 나 따라오고 있었지.

“죄송해요. 휴. 저희 아이가 폐를 끼쳤죠?”

“이 아이의 부모님 되십니까?”

노신사가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죄송해요. 그만 손을 놓치는 바람에…….”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지경입니다만, 상당히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요.”

노인의 손에서 건네지듯이 나의 손이 핀에게로 넘어갔다. 노인은 품에서 작은 사탕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자. 꼬마 아가씨 선물이에요. 아까랑 다른 맛이랍니다.”

“……감사합니다.”

먹지는 못하지만, 선물이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노신사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아빠?”

“응? 왜?”

“모르는 사람이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랬죠?”

“아, 아니야! 사탕 준다고 해서 따라간 게 아니라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을 뿐이야!”

“그럼 다시 말할게요.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죠?”

“…….”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핀에게 혼나고 말았다.

아아.

나의 자존심이여.

나의 체면이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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