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10화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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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고민

부서진 책상의 파편을 하나씩 자루에 담는 핀과 싱.

“빨리 주워 담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곰 족 아인, 란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까지…….”

“당신도 족장님이랑 같이 책상을 부수는데 일조했으니까요.”

바닥에 흩어진 나무쪼가리들을 주우며, 핀은 속으로 ‘내가 부순 거 아닌데’라며 조그맣게 항변했다.

“핫하! 이거 무승부로구만.”

자루에 쪼가리를 담으며 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핀은 괜스레 그가 밉게 느껴져, 톡 쏘듯이 말했다.

“그래서, 승부는 어떻게 된 거죠?”

“응? 무승부니까 아가씨가 원하는 대답은 못 해주겠는데?”

“그런 게 어디…….”

“규칙은 규칙. 이기면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승부니까 알려줄 수 없네.”

핀이 볼을 크게 부풀렸다.

뭐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확실히 사전에 했던 약속은 이겼을 경우였다는 것을 떠올린 핀은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대로 승부를 끝내는 것도 찝찝하긴 하군. 핀이라고 했나?”

“그런데요.”

“내일 열릴 무투대회. 참가하지 그래? 거기서 나를 이긴다면 그대의 질문에 대답해 주도록 하지.”

무투대회라는 단어에 핀이 귀를 기울였다.

처음부터 루카스 왕국에 온 이유가 그 대회의 상품으로 걸린 할아버지의 유품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짐짓 모른 척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좋아요. 당신도 그 대회에 참가하나요?”

“그럼. 거기 참가하려고 세상에 나온 건데?”

“족장. 거짓말은 나쁩니다. 당신은…….”

“겸사겸사지. 가는 길에 꼭 참가하고 싶기도 했다고.”

“하아…… 그래서 루카스 왕국에 들리자고 하신 거였습니까?”

싱의 귀가 파닥파닥거렸다.

그것이 그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행동을 알고 있기에, 란은 괜스레 화가나 그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다시는 밖에 못 나가실 줄 아세요.”

“족장은 난데 흐음. 야얏! 그만 당겨!”

싱은 꼬리를 붙잡힌 채 란에게 끌려갔다.

그렇게 핀과 헤어지면서도 그는 무투대회에 대해 다시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가 궁금한지는 몰라도, 듣고 싶다면 무투대회에 출전하라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싱이라는 인물은 핀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단지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라는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크게 다가왔다.

비록 모든 힘을 쓴 건 아닐지라도 처음으로 자신과 힘으로 맞먹는 상대였으니까.

“아빠한테 돌아가야겠다.”

핀은 자신이 궁금해했던 물건에 대해 떠올리며 가게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녀가 궁금했던 것은 단 한 가지.

그가 끼고 있던 글러브였다.

나무와 같은 짙은 갈색의 글러브.

다른 장식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글러브였는데 처음 스쳐 지나가듯이 본 순간부터 그녀는 글러브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세계수의 마력이었던 것 같은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그의 글러브에서 세계수의 마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운은 아주 잠시뿐, 어째서인지 다시 봤을 때는 평범한 글러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팔씨름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직접 만지기까지 했는데 그냥 평범한 글러브였던 것이다.

“내가 착각한 건가?”

정말로 그 글러브가 세계수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면, 그녀의 아버지인 위그드라실이 먼저 눈치챘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지 않았는가.

“으으. 모르겠다.”

골치 아픈 문제는 접어두고 그녀는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위그드라실의 모습.

“핀…….”

예쁜 청록색의 드레스를 입고, 프릴이 달린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원판부터 여자아이같이 생겼었거늘, 이제는 완전히 귀족 집 아가씨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핀이 자신도 모르게 벅찬 마음을 끌어안고 외쳤다.

“아빠, 귀여워!”

* * *

“아빠 귀여워!”

1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던 핀이 드디어 가게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있었던 1시간은 내게 있어서 1년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지만, 핀은 그런 나의 마음도 모른 채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글쎄. 저기 계신 저분한테 물어보렴.”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나는, 아동복 코너로 끌려가서 목욕탕에 간 어린아이처럼 강제로 옷이 벗겨졌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하다. 강제로 나의 옷을 벗긴 그녀들. 그리고 나를 보는 흥분된 시선. 게다가 제일 끔찍했던 것은…….

“이 아이. 남자잖아!”

“그래요. 저 남자예요. 그러니까 옷은…….”

“귀여워!”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귀부인들이 더욱 흥분했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인형놀이에 사용되는 인형의 입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입고, 또 입고, 또 입고. 아무리 입어도 새로운 옷은 또다시 그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아동복을 내게 입히기 전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시간처럼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나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아라디온이 너무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다.

핀. 내 감정이 격해지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 자. 빨리 가서 한 대 때려줘!

“아라디온.”

“네. 아가씨.”

“아빠를 괴롭히면 못 써요.”

상냥하게 아이를 때리듯이 핀은 아라디온에게 꿀밤 한 대를 때렸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아라디온이 과장되게 아프다는 연기를 했고, 핀은 ‘나 잘했죠?’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핀. 너마저…….”

처음부터 둘이 짜고 친 거 아니야?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핀이 바로 뛰쳐나간 거고.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그래. 이런 옷을 입을 수도 있지. 여자애처럼 생겼으니까. 긍정적인 마인드…….

“아빠. 잘 어울려요.”

“긍정적은 개뿔!”

나는 원래의 내 옷과 필로우만 챙기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나와 필로우 단둘이서만 여행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역시 무리였다.

홧김에 나오긴 했지만, 역시 갈 곳이 없다.

“아빠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요.”

“위그드라실 님은 마음이 넓은 분이시니까 곧 용서해 주실 겁니다. 게다가 덕분에 옷값도 그분들이 내주셨는걸요. 여비도 굳었죠.”

크윽. 내가 용서 안 해주면 나만 쪼잔한 놈이 되는 거잖아.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바로 돌아가겠는가.

뒤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으니까 조금은 이렇게 방황하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가도록 하자.

“주공. 어디로 가는 것이오?”

“글쎄. 생각해 둔 곳은 없는데. 그냥 돌아다니자.”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걷다보니, 분수대가 있는 공원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분수대 옆에 앉아서 시원한 물보라를 맞고 있었더니 기분이 한결 괜찮아졌다.

“아무도 뭐라 안 하는군.”

남자인 내가 이런 여자아이 옷을 입고 다니는데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분수대로 고개를 돌려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파란 거울 같은 분수대 아래에는 붉은 눈동자와 은빛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여자아이네.”

말 그대로 여자아이.

처음 이런 외모의 나를 봤을 땐 나무라고, 별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강제로 여자아이 옷을 입혀지니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화나는 건, 여자아이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정도 부끄러움은 상관없다.

하지만 강제로 입히는 건 화가 난다.

내가 자발적으로 입은 것도 아니고, 인형마냥 강제로 옷을 입히다니.

아니, 그것까지도 참을 수 있다. 그 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흥. 말려주지도 않고 웃기나 하다니.”

광대처럼 내 모습을 보고 웃는 아라디온이, 그리고 내 마음을 읽었으면서도 장난처럼 아라디온을 혼내주던 핀에게 화가 난 것이다.

“하아. 필로우. 우리끼리 숙소나 잡아서 같이 잘까.”

“가, 같이 잔단 말씀이옵니까!?”

“왜? 싫어?”

“시, 싫은 건 아니오만…….”오늘 따라 필로우가 뭔가 이상하다.

계속 허둥대는 모습이 불안한데. 사람이 많은 곳이 적응되지 않는 걸까?

가만히 분수대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현대의 일상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행복해 보인다. 현대에서는 길거리에서 웃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들 바쁘고, 일상에 쫓기는 삶을 살아가니까.

학원, 학교, 직장, 가족, 친구, 연인.

서로가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가끔 느끼는 행복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곳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 걸까? 길을 다니면서 왜 웃고 있는 걸까?

현대인의 감각에 찌든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용사가 한 선택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네.”

용사.

부모님의 원수.

은혜보다 대의를 선택한 인간.

그가 바라던 세상이 이런 세상일까?

모두가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세계.

전쟁이 없는 세계.

인종간의 차별이 없는 세계.

“하아.”

정말, 나쁜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세상이 평화롭지 않았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세상이 불행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원망하고픈 마음이 들었을 텐데.

마음껏 그를 떠올리며 ‘이게 네가 바라던 세상이냐?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지른 결과가 바로 이거냐?’라며 실컷 비웃어 줬을 텐데.

다들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 괜스레 심술이 나서 분수대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쳤다.

물보라가 첨벙거리며 솟구쳤다. 햇빛이 물방울을 스쳐 지나가며 작은 무지개를 피웠다.

나는 멍하니 무지개를 보기 위해 계속 물장구를 쳤다. 진짜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가 나서,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봐서 기분이 우울해지다니. 이게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꼬마야. 여기서 뭐하니?”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중절모를 쓴 나이든 신사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호감이 가는 외모였지만,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대충 대답했다.

“그냥 혼자 있어요.”

“길을 잃은 거니?”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나왔어요.”

노신사는 내 말을 듣다가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내게 주었다.

“자,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그럴 땐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손바닥 위에 올라온 사탕을 받아들고, 봉지를 까서 입에 넣었다.

순간 역하게 구역질이 올라와서 금방 뱉어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응? 맛이 없니?”

“죄송해요.”

사탕이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역시 물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는구나.

“무슨 고민 있니? 있다면 이 할아버지한테 말해보렴. 속에 든 불만은 가만히 두면 썩어서 곪는단다.”

“으음.”

그의 말이 맞다. 불만은 계속 쌓아두면 몸에 좋지 않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홧병이라는 병이 있고, 카운슬러라는 직업이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어차피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니 나는 최대한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평범한 사람의 고민인 것처럼 각색하여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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