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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아인과 핀
“아빠는 괜찮겠지?”
위그드라실의 허락에 가게 밖으로 나온 핀이 쇼윈도 너머의 그를 보았다.
필로우를 꼭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당장에라도 곁에서 지켜주고픈 마음을 그녀에게 들게 했다.
“으으. 아빠 곁에 계속 있고 싶은데…….”
숲에서 나왔을 때부터 쭉 아빠 곁에서 그를 지켜주겠다는 것이 핀의 다짐.
하지만 그 다짐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어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좌판을 열고 팔씨름으로 돈을 벌고 있던 아인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녀의 아빠를 위해서라도 그와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잠시 길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응? 아가씨. 아가씨도 참가해 보려고?”
한적했던 아까와 다르게, 잠깐 사이에 좌판은 구경하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병풍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인과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었지만, 길게 선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아가씨한테는 무리일 텐데.”
“팔씨름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인파를 뚫고 좌판으로 향한 핀. 핀은 곧바로 아인에게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한 치의 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만큼 희미한 감각이었기에, 어서 궁금증을 해결하고 위그드라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쉿.”
늑대 귀를 한 아인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핀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규칙이란 무엇이지?”
“네?”
“대답해. 규칙이란 무엇이냐?”
갑자기 물어오는 생뚱맞은 질문. 하지만 아쉬운 건 그녀였기에 성실하게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규칙이란…… 지켜야 하는 사회적 규범이 아닌가요? 사람들끼리 약속을 한, 사회적으로 공공의 이익과 도덕적인 삶,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해진 일종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에, 엥?”
위그드라실에게 받은 수많은 지식들 중에 섞여있는 규칙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말한 핀.
어째서 이것만 이토록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는 묻지 말자.
“그게 아니야! 규칙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뭔가요?”
“규칙이란…….”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늑대귀 아인. 그는 곧 손가락으로 줄 끝을 가리키면서 핀에게 말했다.
“줄을 서고 있는 걸 보면 따라서 줄을 서는 것. 그것이 규칙이다.”
“족장. 지금 생각 안 나서 마음대로 지어낸 거죠?”
“생각 안 나긴. 원래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구차해요.”
옆에 있던 곰 귀를 단 소녀가 핀잔을 주었지만, 늑대 귀 아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핀에게 줄을 설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저는…….”
“쉿. 조용. 대답은 듣지 않겠다. 나와 이야기 하고 싶다면 줄을 서도록. 그것이 규칙이다.”
결국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줄 맨 끝으로 향하는 핀이었다.
‘쳇, 뭐야. 그냥 잠깐만 시간 내주면 되는데.’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였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 규칙은 규칙. 순순히 줄 맨 뒤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팔씨름…….’
“자. 다음 도전자.”
줄 맨 앞에 서 있던 육중한 몸을 가진 한 남성이 의자에 앉았다. 나무로 된 의자는 비명을 질러대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자. 여기 10실버. 이기면 열 배 맞지?”
“아아. 당연하지. 그것이 규칙이니까.”
팔을 내미는 도전자. 늑대 귀 아인도 상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전자의 손과 아인의 손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손만큼 차이가 심했다.
도전자는 과연 인간인가. 그런 생각은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인간 맞아?”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20연승의 기록이 깨지겠는데.”
“그걸 일일이 세고 있었어? 자네도 참 할 일 없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당신?”
티격태격 싸우는 관중들은 뒤로 두고 다시 팔씨름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단단하게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의 시합이 막 시작되었다.
“끄응!”
힘을 주는 도전자. 얼굴이 벌게지도록 달아올랐지만, 아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인가?”
하품을 하며 지루하다는 듯이 아인이 팔에 힘을 주었다. 도전자의 팔이 뒤로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끄아악! 내 팔!”
비명을 지르는 도전자. 너무 힘을 주며 버틴 나머지 팔이 부러진 것이다.
도전자가 팔을 붙잡고 치료를 받기 위해 자리를 뜨자, 뒤이어 줄을 선 사람들이 연달아 도전을 시작했다.
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전의 모습을 보고도 왜 사람들은 저 아인에게 도전하는 것일까.
“아가씨. 궁금해?”
“네?”
그때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누군가가 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중절모를 쓴, 멋지게 생긴 중년의 사내였다.
“내 이름은 슬로우 웨건. 때마침 구경을 하던 중년 신사지.”
“아. 네…….”
“아가씨의 표정을 보니 사람들이 왜 계속 도전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 사람은 얼굴 표정만 보고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인가? 핀은 남자에 대해 의문을 느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저 아인은 지금 남자의 도전욕을 자극하고 있지. 남자란 자고로 강한 사람만 보면 싸우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가졌다네. 하지만 쓸데없는 싸움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법.”
“그래서요?”
“그렇기에 이런 평화적인 해결방법으로 서로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남자들은 놓치지 못하고 도전할 수밖에 없는 거라네. 여자는 자네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뭔가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핀이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중년 신사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 이만!”
“뭐야. 저 아저씨는.”
이미 떠나간 중년 신사를 머릿속에서 잊기 위해 핀은 아인을 쳐다보았다.
앉은키부터가 핀과 비슷한 늑대 귀 아인은, 얼굴에 흉터자국이 있었으며 반 쯤 드러난 상체에도 많은 수의 베인 자국이 있어서 그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장갑.’
하지만 그의 삶에 대해선 핀은 관심이 없었다. 핀이 관심이 있는 것은 그가 끼고 있는 장갑. 그 장갑을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지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으으.”
“후후. 여비를 버는 것도 참 쉽군. 어떠냐. 란.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애초에 족장이 지갑을 잃어버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짓은 안 해도 됐을 텐데요.”
“결과가 좋으면 뭐든 좋은 법이야.”
마침내 핀의 차례가 다가왔다. 사람들은 핀이 아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줄을 선 것을 옆에서 다 들었기에, 그녀의 팔씨름을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계속된 패배로 인해 이제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기에, 핀이 마지막 손님이었고 다들 하나 둘 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돈.”
“네?”
“10실버다. 그게 규칙이지.”
핀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조용히 10실버를 냈다.
그 돈은 아라디온이 혹시 모를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으라고 준 돈이었지만, 지금은 비상금보다 장갑의 정체가 더 중요했다.
“자. 여기요. 그럼 궁금한 게 있는데…….”
“뭐하고 있나? 팔을 올리지 않고?”
“아니, 저는 팔씨름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화가 난 핀이 톡 쏘듯 소리 지르자, 떠나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일 법도 한데, 늑대 귀 아인은 아랑곳않고 핀에게 손을 내밀라며 재촉했다.
“그 질문은, 내게 이기면 대답해 주지.”
“그렇게 팔씨름이 하고 싶으신가요?”
남자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라고 생각한 핀이었다. 아니면 이 늑대 귀 아인이 이상한 것이라고 뒤이어 생각이 따라왔다.
“당연하지. 넌 내가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하니까.”
“저 여자 엘프가?”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늑대 귀 아인의 말에, 다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말이 헛소리이든 헛소리가 아니든, 여자를 대상으로 팔씨름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꼭…… 해야만 하나요?”
“그럼. 그게 규칙이니까.”
“그럼. 해드릴게요.”
어서 묻고 위그드라실에게 돌아가고픈 마음이 산더미였지만, 완고한 성격의 늑대 귀 아인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고,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핀은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늑대 귀 아인과 손을 맞잡고 탁자에 팔꿈치를 기댔다.
지금까지 팔씨름을 해본 적은 없지만, 간단한 놀이와 같았기에 핀은 아무런 걱정 없이 제안을 받아드릴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물어봐야지.’
그녀는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들지 않았다. 자랑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의 힘은 비정상적으로 강했고 그 힘이라면 아인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이길 자신이 있었다.
“준비.”
곰의 귀를 가진, 란이란 불린 아인족 소녀가 손을 들었다. 핀은 줄 뒤에서 계속 보았던 시작신호에 귀를 기울였다.
“시작!”
핀이 온 힘을 다해 팔을 움직였다. 처음으로 늑대 귀 아인의 팔에 힘줄이 솟아났다.
그리고 늑대 귀 수인이 처음으로 웃었다.
“제법인걸.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남에게 이름을 물어볼 땐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당돌하기 까지. 그래. 그것도 규칙이지. 내 이름은 싱이라고 한다.”
“핀이에요.”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두 사람 모두 전신의 힘을 끌어올려 상대의 팔을 눕히기 위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무슨 힘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대등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적어도 핀이 만나고 기억하는 사람 중에는 없었다.
‘제법이군.’
그것은 늑대 귀 아인, 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힘은 그의 오랜 지기인 천검(天劍)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압력이었다.
둘의 팔씨름이 계속될수록 구경꾼은 늘어만 갔고, 구경꾼이 늘어나도록 그들의 팔은 처음 마주잡았던 그 순간과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빨리, 끝내야 해!’
핀이 재빨리 끝내기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싱 역시 그녀가 힘을 주는 것을 알고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으으! 빨리!’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팔보다, 그 팔을 받치고 있는 책상이 먼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지끈」
“아앗!”
“책상이!”
승부가 결판나기도 전에, 책상이 먼저 부서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