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07화 (10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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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루카스 왕국(1)

“위그드라실 님.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보인다.

사막에서 그토록 꿈꿔왔던, 신기루라도 보고 싶었던 나의 파라다이스이자 목적지가.

루카스 왕국이 저 멀리 성문을 빼꼼 내밀며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가 루카스 왕국…….”

감격이 북받쳐 오른다. 집 떠나서 고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사막에서 발을 데이고.

더위에 지쳐 죽음의 임사체험을 하고.

마지막엔 편히 갈 수 있었다는 충격에 쓰러지기까지.

“무슨 생각하십니까?”

“김광석 선생님이 생각난다…….”

김광석 선생님의 이등병의 편지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집 떠나면 개고생이지. 그래.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어.

루카스 왕국으로 입장하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중세시대의 고전적인 방법과 유사했다.

성에서 검문을 받고 수상한 자나 현상수배가 걸린 범죄자가 아니면 들여보내 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성 앞에 줄을 선 사람들 맨 뒤로 갔다.

대기열로 봐서는 롯데월드 무료 개방 때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뭐가 이렇게 빨리 줄어들어?”

줄은 거의 고속도로 하이패스 수준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속도라면 10분 이내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검문까지 하는데 오래 걸려야 하는 거 아니야?”

“요즘은 하도 평화로운 시대다 보니 딱히 그렇게 꼼꼼하게 검사하지 않더군요. 보통은 범죄자인지 아닌지 정도만 파악하고 들여보내는 추세입니다.”

“그렇군.”

금세 줄어든 줄 덕분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검문소 맨 앞까지 올 수 있었다.

“자, 다음 분.”

“네. 여기 이렇게 엘프 두 명과 아이 하나입니다.”

검문소의 병사가 우리들을 세심하게 살펴본다.

이종족이라서 설마 차별하는 건가? 조금 불안한 마음이 스믈스믈 기어 올라왔다.

“흐음…….”

뭐야.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왜 갑자기 고민하는 건데.

살짝 고개를 들었던 불안한 마음이 대놓고 활개 치며 나의 심장을 축구선수마냥 뛰게 만든다.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못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거기 아이는 누구 아이입니까? 두 분 다 엘프신데 아이는 인간이군요?”

“아하. 그게…….”

“설마…… 유괴?”

그게 문제였던 거군. 범죄자들을 거른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유괴범으로 몰린 듯하다.

핀과 아라디온 모두 완벽한 엘프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귀가 뾰족한 것도 아니고, 머리색도 두 사람과 다르게 은발이니 의심할 수밖에.

“그러니까 그게…….”

경비병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있다. 의심의 빛이 강해진다. 이대로라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 말은 즉,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다시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잖아!

“역시 유괴버…….”

“아빠. 우리 언제 들어가?”

“네? 어, 어어, 어.”

눈을 찡긋하며 아라디온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 제발 좀 알아들어라!

아쉽게도, 이 눈치 없는 하이엘프는 나의 신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때, 다행히도 구세주가 나타났다.

“응. 이제 곧 들어갈 거야. 아저씨가 잠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그래. 핀. 역시 내 딸이다.

여기서 쐬기를 박아야 한다. 부끄러움 따윈 개나 주라고 해! 나는 들어갈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들어갈 거라고!

“응. 알았어, 엄마.”

“아. 가족이 맞…… 는 건가요?”

“네. 제가 하프엘프라. 저희 아들이 인간 쪽을 많이 닮았죠?”

눈웃음치며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핀. 병사는 나와 핀을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이내 이해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눈이 파란색이네요. 엘프족은 다들 초록색인 걸로 아는데. 네. 알겠습니다. 통과!”

우리는 병사를 지나쳐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마터면 십 년 감수할 뻔했네.

“아라디온. 너무 눈치가 없잖아.”

“하하…… 설마 이런 방법을 쓰실 줄이야. 죄송합니다.”

겨우 들어오긴 했지만 덕분에 얼굴이 뜨거워서 죽을 것 같다. 으으. 엄마 아빠라니. 괜찮아. 덕분에 이렇게 들어왔잖아?

“후후. 아빠. 좋았어요.”

“그래. 이제 다시는 안 할 거야.”

핀이 나를 잡더니 품안으로 안아 버렸다.

핀의 힘을 이길 수 없는 나는, 저항도 못한 채 그냥 아기처럼 안길 수밖에 없었다.

“핀?”

“헤헤. 발 다칠지도 몰라요. 여기선 제가 안아드릴게요.”

방금 전까지 아이 역할을 해서 그런지, 자꾸 의식하게 된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서 핀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차라리 이편이 얼굴도 안 보이고 낫지.

“끄윽…… 주공. 숨 막히오.”

“아, 미안.”

핀에게 안겨 있던 필로우가 샌드위치처럼 사이에 끼어버렸다. 나는 필로우를 따로 빼서 내 품에 안았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핀이 나를 안고 나는 필로우를 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함께 루카스 왕국을 눈에 담았다.

깨끗하고 잘 포장된 거리가 첫눈에 매력적인 도시임을 보여주었다. 길거리엔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고, 집도 거리도 멋지고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중세시대라기보단, 좀 더 발전한 시대. 바로크 풍의 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하나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예술품으로 보였다.

아직 남아 있는 정돈된 형식의 고딕풍이 함께 섞여 있어서 오히려 그것이 훨씬 멋지게 보였다.

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 엘퀴라즈 숲의 나무들만큼이나 사람들이 빼곡하게 많이 있었다. 번화가를 연상시키는, 그리고 축제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현대의 지구만큼 자유로운 복장은 아니었지만, 어디 멋진 무도회를 가는 사람들처럼 정복 위주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중간 중간 섞인, 모험가로 보이는 인물들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거나 했지만, 그것조차 야성적으로 보였기에 잘 어울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다.

“저거 고양이 귀지?”

사람들 사이에 섞인 이종족들이었다.

인간의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사이사이에 빵에 박힌 건포도처럼 이종족들이 눈에 띄었다.

엘프도 간간히 보였고, 머리에 엘프처럼 긴 귀를 가졌지만 이마에 뿔이 난 자도 있었다.

그리고 코스프레용 머리띠를 한 것처럼 머리에 동물귀가 뾰족 솟은 자들도 있었다.

“아인(牙人)들이군요.”

“아인?”

“동물과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죠. 동물의 특성을 지닌 종족이랄까요. 보시다시피 동물의 귀와 뾰족한 송곳니가 두드러진 종족입니다. 특성에 따라서 꼬리가 달린 자들도 있다더군요.”

송곳니라. 방금 찾은 고양이 귀의 아인의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뾰족한 송곳니가 엿보였다.

그녀는 모험가를 하고 있는지 등에 큰 도끼를 메고 철판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꼬리는 안쪽에 감춰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구나. 저런 종족도 있다니.

“저쪽에 있는 검은 머리에 뿔이 달린 자들은 마족(魔族)입니다.”

마족이라. 그들 역시 멀리서 몰래 관찰해 보았다.

아라디온이 옆에서 곁들이길, 마족들은 모두 검은 머리에 뿔이 달려있다고 알려주었다. 덕분에 마족들을 찾는 것은 쉬웠다.

마족은 엘프들보다 훨씬 수가 적었다. 하지만 아인이나 엘프보다 훨씬 격식 있어 보이는 옷들을 입고 있었고, 걸음걸이에서부터 드라마 속에 나오는 상류층 인사들처럼 바르고 멋진 기품이 느껴졌다.

궁금한 게 있으면 역시 물어보는 게 최고지. 도와줘! 아라디온!

“마족들은 다들 높은 사람처럼 보이네.”

“마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향인 로메니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온 마족들은 다들 그들의 세계에서 귀족 신분에 해당하는 자들이라더군요.”

“귀족이라. 그래서 그렇구나.”

“참으로 특이한 자들이죠. 세상이 변하고 하나로 섞이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들만의 영토를 견고히 다지고 있으니까요.”

“내가 알기론 마족들도 한데 섞여서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글쎄요. 위그드라실 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땐 지금처럼 따로 살고 있었습니다만.”

흠. 벨룸의 기억은 천 년 전이고, 아라디온은 백 년 전에 돌아왔으니 그 9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굳이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지구에서도 민족의 고유한 속성을 유지하는 민족주의 국가가 있었듯이, 이곳에서도 종족의 순수함을 보존하려는 거려나.

“위그드라실 님.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나 여기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모르거든…….”

“후후. 그러실 줄 알고 미리 다 준비해 왔습죠.”

장사꾼이냐. ‘왔습죠’가 뭐야.

“그럼 지금부터…….”

“아. 잠깐.”

때마침 가고 싶은 곳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들에게, 나와 핀, 필로우가 꼭 들려야만 할 곳이 있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여기까지 오면서, 사막에서부터 생각해 두었던 그 물건.

“신발 가게 먼저 가자.”

“예?”

나는 핀과 나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핀도, 나도 옷은 입었지만 신발은 신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옷만 주고 신발은 안 줬었거든!

“그리고 가능하면 필로우의 뿔도 좀 가릴 수 있게 장식품을 파는 곳도 부탁해.”

* * *

“여기입니다.”

아라디온을 따라 이동한 곳은, 밝은 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쓰인 간판이 걸린 가게였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가게 이름이 무슨 광고 같은데.”

“글쎄요, 저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지구출생과 본토 출생의 센스가 갈리는 것인가. 아니면 이 가게 주인이 나처럼 지구 출신의 환생자인 것일까.

진짜로 환생자라면 명치 한 대 세게 쳐주고 싶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광고 표절이잖아.

아라디온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하지만 핀이 들어오지 않고 거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핀?”

핀이 향한 곳을 봤더니, 그곳엔 한 아인족이 의자에 앉아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 이 몸을 이길 자가 누구냐!”

그는 어디 원시시대에서 온 듯한 복장이었다. 석기시대 원시인처럼 동물의 가죽을 옷처럼 걸쳤는데 대각선으로 한데 묶은 모양이라 상반신의 절반을 노출하고 있었다.

귀는 강아지 귀처럼 생겼지만, 저것이 강아지 귀인지 늑대 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꼬리도 살짝 뒤로 엿보였는데 그것 역시 개처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족장님. 그만하시죠.”

“응? 왜. 이제부터 시작인데. 달아올랐다고.”

“아뇨. 큰소리로 추하게 웃는 걸 그만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옆에서 핀잔하는 아인족 소녀가 있었다.

뭉툭한 귀는 곰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냘프고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외모였기에, 곰처럼 강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옆에 앉은 개과(?) 동물 아인족과 다르게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녀가 입을 법한 원피스였다. 곰이라서 그런 걸까. 꼬리가 짧아서 보이지 않았다.

“자! 내게 더 도전할 사람 없나!”

그들은 책상 하나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두고 노점을 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만든 간판엔 「팔씨름 시합. 참가비 10실버. 이기면 10배」라고 적혀 있었다.

아까보다 아인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늑대 귀 아인이 우리 쪽을 보더니 씨익 웃고 있었기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괜스레 핀에게 말을 걸었다.

“핀. 도전하고 싶어?”

“네?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 쳐다봤어요.”

하긴, 신기한 모습이긴 하다.

“그럼 들어가요. 아빠.”

“그래.”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힐끗힐끗 그 쪽을 바라보는 걸보니, 꽤나 하고 싶은 모양이다.

신발이랑 필로우의 물건을 사준 다음에 한 번 들리자고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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