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05화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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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집 밖으로 나가볼까

“흐음.”

세상엔 되돌릴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다.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흘러간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염없이 계속될 것 같은 젊음도, 늙은 뒤에 돌아가고 싶어 해도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 되돌릴 수 없는 것,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말할까…….”

바로 ‘말’이다.

말이란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많이 쓰면서도, 가장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말을 잘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도 세상을 뒤흔들 큰 사건으로 돌변하고, 말을 못하면 역사를 뒤바꿀 발견도 하찮은 쓰레기가 돼 버린다.

“으으.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나는 내가 최근에 고민한 일을,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내린 일을 아이들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분명 어떠한 식이라도 반응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좋은 반응일지, 아니면 숲을 떠들썩하게 만들 요란스러운 반응일지, 그것도 아니면 조용히 만류하는 부정적인 반응일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꼭 하고 싶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아라디온이 온 후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조금 더 고민해 보거나, 넌지시 말을 흘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불안하긴 하다. 과연 괜찮을 것인지 나도 확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도 직접 몸으로 겪어보고 싶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좋아! 결정했어.”

마음에 확답을 내린 순간, 나는 아이들과 아라디온, 그리고 레벤토를 불렀다.

다른 엘프들에게는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말했다. 엘프들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알아채곤 순순히 물러났다.

“아빠. 왜 그러세요?”

“곰?”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십니까? 주공?”

아이들이 주의 깊게 내 이야기를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양옆에 아라디온과 레벤토가 자리를 잡고 진중한 표정으로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한층 더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심지어 곰마저도 눈을 부릅뜨며 장난기와 게으름을 날려 보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어. 어쩌면 너희들이 싫어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는다.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냐 하면, 바로…….”

침을 삼키고, 괜스레 헛기침을 한다. 눈을 감고, 아이들을 보지 않고 나는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해버렸다.

“루카스 왕국에 가보고 싶어.”

크윽. 저질러 버렸다. 이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결국엔 말해 버렸다.

내게 있어서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은, 부끄럽게 느껴진다. 나무인 주제에 숲을 떠나서 어쩌겠다는 건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나 마찬가지잖아.

숲을 떠나고픈 생각은 없었다. 과거엔 불가능한 일이라서 그랬다면, 아라디온에게 정령석을 받은 지금은 밖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벌써 숲에 모험가와 병사들이 들어오기까지 했는데 밖에 나가는 건 섣부른 짓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돌린 것은, 아라디온이 해준 이야기로 핀이 세운 계략이 여기저기 퍼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였다.

그래도 아직 문제점은 많이 있다. 나는 약하다. 정령으로서의 나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니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곤 해도, 마력석이 두려움까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정령인 상태에서 크게 다치면 나무로 귀환한다는 것은 전에 겪어봐서 알지만, 숲 밖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거리가 머니까 그대로 승천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생명의 위협보다 낯선 세상이 무섭다.

지구를 예로 들자면, 해외여행을 간다고 해보자.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곳으로 여행계획을 잡는다.

전날 밤,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정보로 아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다르니까. 걱정이 마구마구 생겨난다.

혹시나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지? 여권이랑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길까지 잃어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쁜 외국인들에게 큰일을 당할지도 몰라.

동시에 인터넷으로만 듣던 도시괴담들도 생각난다.

택시기사가 납치라도 하는 거 아닐까? 음료수를 마셨다가 잠들었는데, 다음 날 배에 수술자국이 있다거나 하는 거 아니야?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구에선 해외에 나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더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고.

나가고는 싶다. 꼭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가슴이 흥분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며 그냥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아아.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까지 꺼냈는데, 밀려오는 건 후회뿐이로구나. 왜 말했을까.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지 무섭다. 나는 심사평을 기다리는 가수 지망생처럼 눈을 감고 긴장된 상태로 반응을 기다렸다.

“아빠.”

“으, 응?”

“언제 가실 건가요?”

그런데 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눈을 뜨고 아이들을 보았다. 핀은 보통 때의 표정 그대로였고, 곰은 다시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며, 필로우만이 걱정되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곰. 곰.”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난 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다들 놀라지 않는 거야? 반응이 왜 이래?

“저기, 나 있지. 밖에 나가도 괜찮은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아빠! 안 돼요! 그러다가 누구한테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숲 밖은 위험하다구요!’라고 할 줄 알았지.”

“에이. 제가 지켜드릴 건데요 뭐.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 나 혼자 나갈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걱정은 좀 할 줄 알았는데. 확실하게 지켜줄 확신이 있다는 자신감인가.

유일하게, 예상했던 대로 나의 외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핀이 아니라 필로우였다.

“주, 주공! 세상은 위험하오! 소인은 반대이올시다!”

“필로우. 괜찮아. 아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

“아, 아씨가 있다고 해도 언제나 위험은 존재하오! 예를 들어, 주공을 암살하려는 암살자가 화장실이나 욕실에 숨어 있을 수도 있지 않소이까!”

암살자라니. 내가 무슨 폭군이나 성자 같은 유명인도 아니고. 암살자가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럼…… 부끄럽긴 하지만 내가 같이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그, 그래도 아니되오. 세상은 위험하단 말이외다. 언제 사악한 놈들이 주공을 납치할지 모르외다!”

“납치?”

“그렇소! 주공은 순진하셔서 모르는 사람이 사탕 사준다고 하면 바로 따라갈 것이외다!”

마음이 쓰리다. 필로우. 나에 대한 평가가 바닥을 기다 못해 아래로 뚫고 들어가 있구나.

그것보다 내가 무슨 어린애냐!

“필로우. 걱정하지 마. 아빠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니까. 그리고 필로우, 너도 있으니까 훨씬 더 걱정은 없지 않겠어?”

아직 여행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안했는데 다들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나있다. 물론 처음부터 함께 갈 생각이었으니 딱히 문제는 없다.

“끄응. 그래도 소인은 걱정되오만. 인간들이 주공을 노린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숲에서는 그래도 안전하지만, 세상은 적진이나 마찬가지오. 무엇보다도, 소인은 갑자기 주공이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궁금하오.”

필로우가 특유의 남자다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본다. 합당한 이유가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안 그래도 암살자의 눈빛인데 이렇게 노려보니까 조금 무섭다.

“그게…… 후우. 지금부터 알려줄게.”

내가 밖에, 루카스 왕국에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즐겁게 놀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유품이 루카스 왕국에 있어. 그것도 무투대회라는 곳에 상품으로 걸려 있대.”

“주공의 아버님의 유품…….”

“그걸 들었더니,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할 수 있으면 이곳으로 가져오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하려고 트집을 잡으려는 필로우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귀를 축 늘어뜨렸다.

“하아. 알겠소이다. 대신, 위험한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주시오.”

“당연하지. 절대로 안 할거야.”

뭔가 부모님께 허락받은 느낌이라 성취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꼭 소인이나 아씨 곁에 붙어 다니시고, 모르는 사람이 부르면 따라가면 아니되오.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항상 경계하고 또…….”

필로우. 외견은 이래도 나는 여덟 살짜리 꼬마애가 아니란다.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어.

그래도 보호받는 느낌이라 기분은 좋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나이를 떠나서 항상 기분 좋은 일이지.

“곰. 곰.”

「귀찮게스리.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곰 녀석.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

“곰, 곰.”

「귀찮긴 하지만, 주인님이 가고 싶다니 따라가 주겠다.」

츤데레냐 너.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다. 세세한 여행 계획은 짜두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어, 저기 곰?”

“곰?”

「왜 그러냐?」

“미안한데 너는 못 가.”

“고, 곰!?”

「뭐, 뭣?」

“지금부터 도시에 갈 건데, 네가 가면 큰 혼란이 있을 것 같아서. 핀은 엘프라서 상관없을 테고, 필로우는 뿔만 잘 가려서 우리가 안으면 되는데…… 너는 어딜 보나 야생동물이잖아. 그것도 육식동물의 맹수. 게다가 숲에서 다 떠나면 좀 그러니까 남아서 나를, 내 본체를 지켜주면 안될까?”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곰이 비틀거리더니, 곧 현실을 인정하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나갔다.

“고오오옴!”

「드디어 내 개그를 세상에 알릴 기회였는데에에에!」

여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개그를 들려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냐. 네가 다가가면 웃는 게 아니라 공포로 비명을 지를 텐데?

그전에 어차피 네 말 아무도 못 알아듣거든?

“레벤토. 미안한데 숲을 떠나 있는 동안 여기를 부탁해도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그드라실 님. 저희가 숲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뭐든 말씀하시지요.”

“저 녀석들에게서 내 몸을 지켜줘.”

언제부턴가 다시 근처로 스믈스믈 기어와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는 엘프들을 가리키며 나는 레벤토에게 부탁했다.

사실 진정한 적은 인간이 아니라 저 녀석들이 아닐까? 생명이 아니라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노리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잖아.

“위그드라실 님. 그럼 출발은!?”

나에게 가장 세상을 보여주고픈 아라디온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쁨에 차 있었다.

출발 일자는 방금 정해두었다.

시간을 끌면 고민만 많아지고, 언제 마음을 돌릴지 모른다.

그러므로 출발 일자는…….

“내일 바로.”

* * *

“휴. 드디어 말하셨네.”

위그드라실의 선언이 끝나고 그가 잠시 여행에 대해 아라디온과 논의하는 사이, 핀과 필로우, 곰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주공께서 진짜로 말씀하실 줄이야. 소인은 깜짝 놀랐소이다.”

“아빠가 정말 가고 싶으신가 봐.”

이게 어찌된 일일까. 아이들은 이미 위그드라실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을 많이 하시더니.”

핀은 그동안 위그드라실이 고민하던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마다 그 생각이 그녀에게 전부 흘러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래도 소인은 주공께서 상심하셨을까봐 크게 걱정했소. 그간에 하신 행동들만 생각하면…….”

위그드라실의 그간의 행적들이 무엇이기에 필로우가 이렇게 걱정했던 것일까.

“으음. 맞아. 나도 좀 걱정되긴 했어. 뜬금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묘소를 정리한다거나…….”

“그냥 정리만 했으면 걱정은 안했소. ‘이제 더는 정리 못 할지도 모르잖아? 사람 일이란 건 모르니까.’라고 중얼거리시지 않았소이까.”

“그래. 그랬지. 게다가 우리들을 불러다가 그냥 보기만 하시면서 울먹거리신 적도 있고.”

“그때가 가장 무서웠소이다. ‘너희 얼굴을 조금이나마 담아두고 싶어서’라니.”

“나는 그것보다 낮잠도 안주무시고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실 때가 제일 무서웠는데. 꼭 금방이라도 사라지실 것만 같았거든.”

여행에 대해 고민하던 위그드라실의 모습을 떠올리는 핀과 필로우.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동안 보인 위그드라실의 태도는…….

“꼭 우울증에 걸리신 것만 같았소이다.”

“여행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신변정리를 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내가 아빠생각을 잘 못 읽은 줄 알았어.”

방구석 폐인이었던 위그드라실이 여행을 결심하는 데까지 걸린 마음의 고민이 너무 심각했던 나머지,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핀과 필로우였다.

“이제 더 이상 몰래 지켜보지 않아도 괜찮겠네.”

“그러게 말이외다. 여행을 떠나시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소.”

이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는 핀과 필로우. 같이 있던 곰이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곰.”

「나만 빼고 재미있게들 놀다 오시지.」

“우리 놀러가는 거 아니거든. 옆에서 아빠를 지키러 가는 거야.”

“곰.”

「그거나 저거나.」

“너는 여기서 아빠를 지켜야지. 우리 모두 아빠를 지키는 거야. 아빠의 본체든, 정령체든.”

“곰!”

「흥!」

단단히 토라진 곰은 제쳐두고, 핀은 위그드라실의 여행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를 한동안 우울증에 걸린 사람마냥 고민하게 만든 원흉이자, 세상에 나갈 결심을 하게 만든 물건.

그리고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무투대회라…….”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내가 나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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