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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엘프, 그 삶의 현장
나는 지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다. 이런 식으로 잠을 설친 건 나무가 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잠을 못 자서라기 보단 자꾸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 끝없이 밀려들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아. 하아. 위그드라실 님.”
『……저기 그렇게 신음하면서 바라보지 말아줄래?』
“아아. 위그드라실 님이 내게 말을 걸어주셨어!”
“위그드라실 님이 보고 계셔!”
바로 이 엘프 녀석들 때문에!
내가 무슨 임모탄 조냐. 여기가 무슨 방사능으로 오염된 아포칼립스 세계도 아니고. 광신도처럼 내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지 말란 말이야.
엘프 녀석들이 숲에 오고 난 이후로, 나는 연예인이 어떤 기분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엘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숲에 숨어서, 또는 노골적으로 내 주변을 맴돌며 내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때때로, 지금처럼 하악거리며 나를 보고 흥분하는 녀석들까지 나올 정도니, 이 자식들. 엘프가 아니라 이젠 스토커처럼 보인다.
또는 파파라치라고 해도 되겠군. 내 일상을 24시간 밀착 취재하고 있으니.
『제발 그만들 좀 해. 그리고…….』
겨우 이런 반응들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것은 아니다. 잘 때 날 훔쳐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나는 꿈나라에 있는 것을.
진정으로 날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런 광신도 적인 반응이 아니라…….
『올라가지 말랬지!』
“하, 한 번만 눕고 싶습니다!”
자꾸만 내 위로 기어 올라오는 게 문제다.
지금도 내가 다른 녀석들과 대화하는 틈을 타서 한 녀석이 내 가지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재빨리 쳐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내 몸을 허락(?)해 줄 뻔했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자꾸 내게 달라 붙는 이유는, 엘프의 습성과 관련이 있었다.
엘프들은 따로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집 대신에 마음에 드는 나무 위에 올라가, 그곳에서 나무늘보처럼 잠을 자는 것을 집으로 여겼다.
왜 집을 짓지 않냐는 나의 물음에, 레벤토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집을 지으려면 나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연, 아니 식물 광신도인 이 녀석들이 나무를 자를 리가 없으니 당연한 것을 괜히 물어본 꼴이 됐으니 입을 다 물 수밖에.
“그런데 너희들 옷은? 옷도 식물로 만들지 않나?”
“저희 옷은 전부 동물 가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니, 엘프들의 옷은 얇기는 했지만 천과는 그 감촉이 달랐다.
레벤토가 말하기를, 동물의 가죽을 벗긴 뒤, 마법으로 특수 처리를 해서 옷을 만든다고 하였다. 마법처리를 해서 여름에도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한다.
동물은 괜찮은 거냐. 너희들.
지독한 식물 애호가들이 아닐 수 없다.
동물 이야기를 하니 가장 지독한 것은 엘프들의 식사시간이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엘프들의 고정관념을 깬,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번, 핀이 나의 조언을 듣고 엘프들의 음식을 준비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위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내는 엘프, 절규하는 엘프, 이미 기절해 시체처럼 쓰러진 엘프…….
엘프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엘프가 자연을 사랑하고, 특히나 나무와 꽃들을 사랑한다고 흔히들 알고 있다. 그럼 당연히 채식을 안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동물애호가들이 육식을 금하듯이, 식물애호가인 엘프는 채식을 안 하는 것이다.
정정하자. 애호가가 아니라 광신도 수준이라 그런 것이다. 식물애호가들에 대한 편견을 심어줘선 안되지.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어느새 다가온 레벤토가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냈다. 붉은색의 육질이, 씹으면 참으로 쫄깃할 것 같은 육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아. 또 이 시간이다.
“위그드라실 님. 그럼 저희는 식사를 구하러 잠시 가보겠습니다.”
숨어 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곤, 내게 인사하고 숲으로 떠났다. 나는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끄윽.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은데…… 엘프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자꾸 보게 된다. 이것은 마치 공포영화가 무섭다면서 자꾸 보는 것과 같은 심리랄까.
그들의 식사는 매우 잔인하다. 우선 숲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할 동물을 물색하고, 표적을 찾으면 그 동물을 포획한다.
여기까지는 문제없다. 그냥 사냥에 불과하다. 하지만, 식사 준비에서부터 그 궤를 달리한다.
“잡았다.”
『신이시여.』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사슴 한 마리가 운 없게도 엘프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엘프들은 사슴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사슴의 눈을 천으로 가린 뒤, 엘프 한 명이 목을 붙잡고, 다른 엘프가 서슴없이 사슴의 목을 칼로 그었다.
『크윽.』
갈라진 목덜미의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땅바닥을 적셨다.
사슴은 몇 번 꿈틀거리며 몸을 경련했지만, 바닥을 적시는 피 웅덩이가 커질수록 점점 떨림이 사라져 이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그럼 이제 가죽을 벗겨볼까.”
가죽을 벗기고, 어떻게 사슴고기를 먹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그들은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무나 풀을 이용해 불을 지피지 않았고, 마법으로도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 고기를 어떻게 먹을까.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상상에 맡기겠다.
『으아. 끔찍해…….』
“괜찮으십니까?”
『아. 레벤토.』
옆에서 식사를 끝낸 레벤토가 내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마 그는 육포를 먹어서 그런지 정상 엘프로 보였기에, 마음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엘프들은 원래…… 다들 생식(生食)을 해?』
“아뇨. 저희들만 그렇습니다. 다른 엘프들은 보통 마법으로 고기를 익혀먹거나, 과일을 먹지요.”
『엥? 다들 이런 게 아니었어?』
레벤토가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꼭 아직 순수한 어린아이를 보는 선생님의 모습 같아서 살짝 부끄러웠다.
“엘프라고 모두 같은 문화를 가진 건 아닙니다. 살아온 숲이 다르니 문화도 다른 법이죠.”
『엘프는 숲마다 문화가 달라?』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다르죠. 저희 같은 경우는, 한때 어린 세계수님을 모셨던 적이 있습니다. 저희가 부족한 나머지, 인간들의 침입을 허락했고, 그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 다문 레벤토는, 나를 의식하고는 금새 얼굴을 펴고 사과했다.
“이런,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감정을 주체할 수 없군요.”
『아냐. 괜찮아. 다 이해해.』
“한 번 세계수님을 잃고 난 이후로, 저를 포함해서 다들 전보다 더욱 식물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게 오랫동안 반복되다 보니, 지금처럼 조금 과한 형태의 문화가 자리잡아 버렸죠.”
『……과하다는 건 알고 있구나.』
“하하.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다만, 말릴 수 없어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의 표정이,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고, 하이엘프인 아라디온과 함께 숲을 정화할 방법을 찾고 있던 것일까.
『그래도 레벤토, 너는 다른 엘프들이랑 다르네.』
“무엇이 말입니까?”
『여기 온 이후로 육포만 먹고 있잖아.』
“저야 아라디온 님과 함께 다른 종족이나 피치 못하게 인간들을 만나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처럼 식사를 하면 꽤나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기에 육포로 식사를 대신하다보니,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종족과 인간들…… 인간들은 피치 못하게 라는 말을 덧붙인 걸 보니 사이가 안 좋나 보네.』
“그럴 수밖에요. 남아 있던 어린 세계수님들을 모두 베어버린 게 인간들이니까요.”
악다문 턱의 힘줄 사이로 그의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이렇게 되니, 엘프들의 식습관에 대해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어린 세계수들을 지켜주다가 그들을 잃은 상실감이 만든 이들의 문화가 아닌가.
“다녀왔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그래. 어머니는 잘 뵙고 왔어?”
“예.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뭘.“
어머니의 무덤에 다녀온 아라디온이 도착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하얀 백합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그곳에 두고 왔을 것이다.
나는 정령으로 변하여 그를 맞이해주었다. 아라디온이 이 모습을 좋아하니까, 오늘만큼은 특별히 그를 위해 행동하고 싶다.
“설마 그분을 위해 무덤을 만들어 두셨을 줄이야.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합니다.”
“더 일찍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라디온을 만나고, 나 혼자 이런 저런 고민에 빠지는 바람에 그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마기가 정화되기 이전에 어머니가 있던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짙은 마기와 마왕과 공멸하여 뿌리 채 사라진 어머니의 자취를 보고 절망하며 숲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다.
왜 진작 말해주지 못했을까. 어머니를 그토록 좋아하는 녀석인데.
뒤늦게나마 아다리온에게 어머니의 무덤을 알려주자, 그는 어머니를 닮은 하얀 백합을 한 송이 구해 그곳으로 향했다.
분명 그가 전해준 백합도,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함께 자라날 것이다.
잠시 후, 다른 엘프들이 이곳에 도착했다.
마법으로 핏기를 싹 씻어낸 녀석들의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나는 이 녀석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생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이젠 엘프라면 치가 떨린다.
아, 핀이랑 아라디온이랑 레벤토는 제외.
“위그드라실 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만?”
“미안한데 가까이 오지 말아줄래…….”
“아뇨! 위그드라실 님!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병은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제 때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나요!”
“제가 돌봐드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끄윽. 소란스럽다. 너희들 때문에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잖아!
“다녀왔습니다. 아빠.”
잠시 온천에 다녀온 핀이 도착하자, 엘프들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레벤토와 아라디온을 제외하곤 전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녀석들, 저번에 있었던 음식 사건 이후로 핀을 두려워한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이야기로는 살식자(殺植者)라나 뭐라나.
엘프들 입장에선 거의 호러무비 이상의 충격이었겠지. 내가 이해해 준다.
“고마워 핀.”
“네?”
“아니야. 아무것도. 오늘 하루는 내 곁에서 꼭 붙어 있어줄래?”
“헤헤. 저야 항상 아빠 곁에 있는 걸요.”
“좀 더 꼭 달라붙어 있어줘. 아주 꼭. 거의 붙어 있듯이.”
“아빠가 원하신다면, 저야 언제나 환영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