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03화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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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엘프들의 환영식

『루카스 왕국이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하는 데는 나무인 상태가 최고다.

어제 아라디온에게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가시지가 않는다. 아라디온은 루카스 왕국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이어갔지만, 내가 떠오르는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광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을 상금으로 준다고 하더군요.’

『하아. 아버지. 돌아가셨지만 그 흔적은 참…… 세상 곳곳에 남아계시군요.』

살아계셨다면 ‘위대하신 이 몸이니 당연할 수밖에. 으하하하!’ 하고 웃으셨으려나.

함께한 시간은 적고, 비록 그게 아버지와 싸운 것이 전부였지만 이상하게 아버지가 그립다. 기억을 물려받아서 그런 걸까. 아버지가 바뀌는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봤던 나로서는 오랫동안 함께해 온 가족처럼 느껴진다.

『아버지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라. 가지고는 싶지만, 괜찮을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무투대회에서 어떻게 이겨야 할까?’가 아니다. 이기는 거야 핀도 있고, 아라디온도 있으니 누워서 떡 먹기다.

문제는 과연 이 녀석들이 폭주해서 난동을 피우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의욕이 넘쳐흐르다 못해 곁에 있는 사람이 빠져 죽을 만큼 과잉 분비가 되니까 말이야. 혹시라도 상대방을 죽일까 봐 걱정이다.

『헉! 안 돼. 벌써부터 갈 생각이 허다하잖아!』

아라디온. 이 무서운 녀석. 은근슬쩍 이런 정보를 내게 흘리다니. 크윽…….

아냐. 책임 전가는 옳지 않아. 그 녀석은 광룡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잖아.

사실 말해주고는 싶었는데 어제 해맑게 웃으면서 광룡에 대해 말하던 녀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말해줄 수 없었다.

‘정말이지 광룡이라는 녀석,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그러고 보니 위그드라실 님의 아버지도 용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이라, 제가 아는 용들은 전부 지혜롭고 차분하던데. 어떠셨을지 상상이 되네요. 광룡만 제외하고 모든 용들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아라디온. 광룡이 우리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 좀 그만 욕해줄래?’라고 면전에서 어떻게 말해.

벌써 눈이 환상에 빠져 있는데 우리 아버지를 지적이고 멋진 존재라고 상상하고 있는데 어떻게 말하겠어.

골치 아픈 문제다.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위그드라실 님.”

숲 언저리에서 아라디온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라디온 외에 다른 엘프가 숲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라디온이 그토록 기다리던 엘프 동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동료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혼자지?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세계수님. 저는 레벤토라고 합니다.”

『아. 그래 안녕…… 하세요?』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감히 저 같은 일개 엘프가 어찌 세계수님께 존댓말을 듣겠습니까.”

『어, 그럼 안녕? 나는 위그드라실이야. 숲에 온 걸 환영해.』

자신을 레벤토라 소개한 엘프는, 역시 엘프답다고 할까. 훤칠하고 잘생긴 게 소설이나 만화 속에 나오는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라디온도 그렇고, 예전에 왔던 엘프도 그렇고 전부 잘 생겼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입만 열었다하면 외모랑 어울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조금 깼거든. 근데 레벤토는 말투도 정중하고, 행동도 정중해서 외모랑 아주 잘 어울린다.

그래. 이게 바로 진짜 엘프지.

흐뭇하다.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던 환상의 존재를 만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이제야 제대로 된 엘프를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아빠.”

『응? 핀?』

나와 함께 시야를 공유하던 핀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엘프분들은 무슨 음식을 먹나요?”

『글쎄. 내가 알기론 식물이나 과일을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온 엘프가 소설이나 만화 속 엘프와 비슷하니 아마 그렇지 않을까. 소설 속 엘프들을 보면 항상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기에, 스님처럼 고기는 일절 입에 대지 않고 과일이랑 풀만 먹던데.

“아하. 알았어요!”

신이 나서 숲으로 뛰어가는 핀을 보니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다. 손님들이 온다니까 음식이라도 대접해주려는 모양이다.

이거 또 흐뭇해지는군. 다 컸어. 우리 딸. 손님 생각도 할 줄 알고.

다시 레벤토와 아라디온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였다.

『그런데 다른 엘프들은 어디 있어? 단체로 오는 게 아니었어?』

“다들 숲에 정신이 팔려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숲으로 시선을 돌려 엘프들을 찾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드문드문 점처럼 떨어진 많은 수의 엘프들을 찾을 수 있었다.

‘뭐하는 거지?’

말을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조용히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궁금했었다. 엘프란 어떤 존재인지가. 핀의 경우는 내 영향을 많이 받아서 엘프라기 보단 그냥 사람 같고, 아라디온은 온지 얼마 안 된데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외곽에서 동료들을 기다리는데 써서 관찰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꽃아, 꽃아. 네 이름은 뭐니?”

아름다운 여자 엘프 한 명이 다소곳이 앉아서 붉은 꽃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꽃에 꽂혀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아하. 그렇구나. 네 이름은 라벤더로구나.”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일까……. 왜 혼잣말을…….

“하하. 그래. 오늘부터 우리는 친구야. 내가 널 소중하게 돌봐줄게.”

……꽃을 정말 좋아하는 엘프인가보다. 이 녀석만 이런 걸까. 다른 쪽으로 넘어가 보자.

다른 곳에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 엘프를 관찰해 보았다. 그는 황홀한 눈빛으로 나무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냥 평범한 나무로밖에 안 보이는데 아름답다니. 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나무인 나도 모르겠다.

“네 매끄러운 곡선, 싱그러운 나뭇잎 하나하나가 눈이 부시구나. 엘퀴라즈 숲의 나무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나 네가 제일 아름다워.”

애인과 사랑을 속삭이듯, 나무에 생긴 옹이구멍에 대고 속삭이는 남자엘프.

그거 귓구멍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배꼽에 가깝지 않을까. 아니지. 배꼽은 탯줄이 있는 자리니까…… 후천적으로 생긴 저 구멍은 위궤양에 더 가깝겠군.

위궤양이 심해져서 구멍이 난 걸 뭐라고 하더라? 천공? 그거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엘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프가…… 까르륵하고 웃었다. 으. 내 눈. 왜 이렇게 소녀 감성으로 웃는 거냐. 너!

“후후. 간지러워. 너도 내가 좋구나?”

“너의 그 열매. 정말 아름답구나. 너를 닮아서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나겠지? 그래. 내가 너의 대부가 되어 줄게. 항상 네 곁에서 너를 지켜줄게. 그리고 네 아이들도 함께. 네 아이들이 자라나서 새로운 나무가 되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새로 자라날 나무의 모습을 기대하지 말고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달란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엘프의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지고 있잖아.

“아…… 따뜻해…….”

이야기 나누던 나무를 끌어안는 남자 엘프. 굉장히 행복해 보인다.

그래. 조금 이상하면 어때. 본인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다른 엘프들도 살펴봤지만 다들 비슷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엘프들은 자연을 사랑한다더니 진짜 정말로 과하게 사랑하는구나.

거의 이상성욕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너희들 그래서야 서로 결혼이나 할 수 있겠어? 나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 피우는 거 아니냐?

“위그드라실 님. 그럼 동료들을 부르겠습니다.”

『응? 아. 그래.』

레벤토가 피리를 꺼내 불자, 길고 높은 휘파람 같은 음색이 바람을 타고 퍼졌다.

각자 떨어져서 자연을 사랑(?)해주고 있던 엘프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움직이더니, 곧 레벤토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 다들 인사드리게나. 보이진 않지만 세계수이신 위그드라실 님께서 계신다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엘프들. 내가 먼저 나서서 인사를 해야겠다.

『다들 안녕? 나는 위그드라실이라고 해. 부족하지만 세계수고, 앞으로 잘 부탁해.』

“오오…… 이것이 세계수님의 음성…….”

응? 이 녀석들 왜 이래?

“나무가 말하면 이토록 감미로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나…….”

“세, 세계수님!!! 사랑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단시간 내로 사랑고백을 받아보긴 처음이다. 우리 만난 지 10초도 안 됐거든? 거기다 목소리만 들려줬을 뿐인데.

『다들 진정해.』

“너, 너무 감미로워. 이래서 인간들이 신을 믿는 거로구나!”

『아, 아니. 저기 난 신이 아니라 나무인데.』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음을 흘리던 엘프들이 천천히,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다들 하나같이 달아오른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거 참. 광신도들을 다스리는 사이비 교주가 된 느낌이다. 손짓 하나로 신도들이 감격에 차서 쓰러지는 그런 사이비교.

조금 재미있지만, 그래도 무섭다.

“다들 정신차리게나! 세계수님 앞에서 무슨 추태인가!”

고마워. 레벤토. 너밖에 없다. 너만이 유일하게 내가 상상하던 진짜 엘프야.

“죄송합니다! 세계수님!”

쓰러졌던 엘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일어났다. 그들의 표정은 아직도 환희의 물결이 가시지 않아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이 녀석들. 무섭다. 목소리만으로도 이런데 내 본체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위그드라실 님. 저희가 위그드라실 님을 찾아뵈어도 괜찮으신지요?”

『그래. 괜찮아. 길은 아라디온이 안내해 줄 거야.』

“감사합니다.”

아라디온을 따라 레벤토와 엘프들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마치 무협지에서 나오는 경공이라도 쓰는 것처럼, 뛴다기보단 거의 반쯤 날아오는 수준이다. 엘프들은 정말 날렵하구나.

화기애애한 엘프 대군들이 조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세계수님은 얼마나 멋진 나무일까?”

“아. 빨리 보고 싶다.”

“세계수님의 가지 위에서 잠을 잘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

저기 나는 침대가 아니거든?

그나저나 엘프들은 나무 위에서 잠을 자나 보다. 다들 자고 싶은 나무를 찜해두었다고 하하호호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중요한 일은 아닌가 보다.

엘프들이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벌써 몇몇 엘프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굉장히 부담된다. 아이돌 사생팬 마냥 픽픽 쓰러지는 게 무섭잖아!

“과연…… 세계수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믿었던 레벤토마저도 환희에 찬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는 인정. 우는 모습도 멋지군. 말하는 것도 촐랑거리지 않고.

“후후. 어떻습니까. 이분이 바로 저의 위그드라실 님입니다!”

‘저의’는 뭐냐. 내가 네 소유물이냐. 애도 아니고!

반쯤 쓰러진 엘프대군. 그때, 숲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핀과 아이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여러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을 차려봤습니다. 입맛에 맞으실는지 모르겠네요.”

어느새 돌을 깎아 만든 수 많은 접시와 탁자까지 만들어서 음식을 담아 들고 오는 핀.

엘프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작은 양이었지만, 나는 그 마음이 갸륵해서 보기 좋았다.

잠깐, 음식?

“으아아아아!!! 라벤더어어어!!!”

접시 위에 담긴, 붉은색의 장식꽃을 보며 소리 지르는 여자엘프.

“아아아아……! 대, 대부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잘 썰어진 과일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눈물 흘리는 남자 엘프.

“아, 안 돼!”

“우웩!”

그리고 절규하고, 못 볼 걸 봤다며 속을 게워내는 엘프들.

『저기, 아라디온.』

“예. 위그드라실 님.”

『엘프들은…… 과일이나 풀을 먹는 게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얼마나 식물을 사랑하는데요.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뭘 먹는데? 너처럼 이슬만 먹고 살아? 핀처럼 마력이 담긴 내 잎사귀를 먹지는 않을 거 아니야.』

“보통은 고기를 먹고 살죠. 동물들의 고기요.”

『엘프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식물을 사랑하는 거지 동물은 그닥…….”

『그럼 지금 핀이 차린 음식들은…….』

“매우, 매우 끔찍하게 보일 겁니다. 소중한 가족의 사지를 분해해서 음식으로 차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죠.”

고정관념이 이렇게나 무섭다.

“우웨에엑!”

레벤토.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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