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02화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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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흥미로운 이야기

아라디온이 온지 이틀이 지났다.

그의 하루는, 우리들과 살짝 동떨어져 있다.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난 뒤, 숲 경계까지 밖으로 나가 동료들을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현재 한 엘프 집단의 수장이라고 한다.

원래는 다른 엘프들과 함께 엘퀴라즈 숲을 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숲이 광룡에게 지배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흥분한 나머지 먼저 혼자서 달려왔다고 한다.

“소문을 들었더니 머리에 피가 쏠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요.”

뭐, 그의 촐랑거리는 성격상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혼자서 달려오다니. 이길 생각은 있었던 걸까?

“뭐, 하하…… 자신이 있으니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자신감인지,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냐는 내 질문에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던 아라디온은 지금도 숲 외곽으로 나가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이제 좀 살 만하군.”

이 시간이 내게 있어서 가장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평소의 생활패턴이란 게 있잖아? 내 생활패턴은 숲을 내려다보며 잔잔하게 멍 때리고 있거나, 아이들과 소소한 담소를 나누고, 밤에는 정령으로 변해 푹 자는 거라고.

근데 아라디온 녀석이 온 이후로, 그 생활패턴이 깨져 버렸다.

그 녀석,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말을 거는 게 무슨 큰 잘못이냐고?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뭐든지 정도라는 게 있지. 그 녀석은 정말…….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니 문제다.

“위그드라실 님! 다녀왔습니다.”

“어? 어…… 그, 그래. 왔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 녀석, 역시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자,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벼, 별로 궁금한 거 없는데?”

“그렇습니까…….”

항상 이런 식이다. 동료들을 기다리고 돌아오면 내게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달려와서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졸라(?)댄다.

들어주고는 싶은데,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야기는 대부분 뻔하다. 자기가 듣고 경험한 일들에 대한 것인데 아무런 사건도 없고, 그냥 자연을 구경한 이야기들뿐이다.

그날 본 햇빛이 정말 보석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그곳에 있던 나무는 지금 얼마나 자랐을까요?

거기에 있던 들꽃들, 참 아름다웠는데 말이죠.

엘프답게 자연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데, 솔직히 나는 자연에 그리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지 재미가 없다.

비록 나무이지만 말이지!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머니의 취향에 맞춰서 하는 거겠지.

어머니는 꽃이나 자연을 사랑하셨으니까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라디온…….”

“…….”

내가 아라디온의 이야기를 지루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은 안 하지만 버려진 강아지처럼 삐져서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거든. 불쌍해서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오늘이야말로 마음을 굳게 먹자. 한 번 이야기 시작하면 해질녘까지 들어야 하잖아.’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쭈그려 앉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라디온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또다시 시작될 그의 재미없는 자연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을 들을 각오의 한숨이었다.

“아라디온. 이야기해 줘. 나…… 나 심심해…….”

“넵! 지금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라디온 녀석은 참으로 감정 변화가 빠르다. 좋게 말하면 적응 능력이 뛰어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달 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오늘도 점심시간이 지나고 듣는 5교시 수업마냥 억지로 졸음을 참아야 하는 내 쪽이 더 문제지.

“으음. 위그드라실 님. 듣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으신가요?”

하지만 나의 안색을 살펴보던 아라디온이 웬일로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며 물었다.

오오. 아라디온. 너도 눈치라는 게 있었구나.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대자연의 멋진 광경보다 덜 지루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뭐 없을까.

생각하자. 으으.

그래. 그거면 조금은 덜 지루할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숲 주변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어?”

“엘퀴라즈 숲 주변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아무것도 모르니 조금 불안해서 말이야. 지난번에 비루스 왕국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몰랐거든.”

“그럼 엘퀴라즈 숲 주변국들에 대해 하나씩 알려드려야겠군요.”

자리에 정좌(正坐)로 앉은 뒤 아라디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서쪽에 있는 비루스 왕국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루스 왕국은 이종족들에게 악명이 자자했었죠.”

“악명?”

“예. 세상의 눈초리가 있으니 전면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은연중에 비루스 왕국은 이종족들을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택대출심사에서 깐깐하게 군다거나, 예금에서 이자율을 줄인다거나, 이종족에게만 물건이나 음식을 비싸게 판다거나…….”

“뭔가 굉장히 쪼잔한 차별이네.”

“뒤쪽으로 구린 소문들이 많이 있긴 한데,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에서의 차별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죠.”

하긴, 그 말이 맞다. 내가 있던 곳에서도 담배값을 올린다거나, 누진세로 차별 행위를 해서 이래저래 욕을 먹고 있었었지.

그 왕자 녀석도 그렇고, 왕이라는 녀석도 제정신은 아니던데. 역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니까.

“그것도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네요.”

“왜?”

“얼마 전에 비루스 왕성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서 국왕과 왕자가 실종되었거든요.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다들 그동안의 업보로 화마(火魔)에 휩싸여 재도 못 남겼다고 수군대고 있죠.”

“불이라.”

“뭔가 아시는 거라도?”

“아냐. 아무것도.”

아라디온에게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지 그는 드렌 왕자와 화재를 연관시키지 못했다.

일일이 설명해주기 복잡하니까, 나만 알고 있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라디온이 눈치채기 전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는 ‘아’라며 감탄사를 말하곤 비루스 왕국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했다.

“소문으로는 신의 벌이 내렸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었는지 신전에서 왕족 대신에 비루스 왕국을 여차저차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신전?”

이세계에도 신이 있었나. 종교라는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나의 귀를 활짝 열리게 했다.

“로만 제국 쪽에서 활발하게 성행하는 종교인데, 그냥 신전이라고만 불리고 있습니다. 신도들도 상당히 많고 여러모로 영향력도 큰 모양이더라고요.”

“흠. 신전이 영향력이 크다라. 그럼 교황 같은 것도 있어?”

“글쎄요. 그쪽으론 가본 적이 없어서 소문 정도밖에 모르겠네요.”

“로만 제국?”

“예. 대륙 중앙에 위치한 곳인데, 딱히 갈 일이 없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전 세계를 다 돌아다녀봤다며?”

“그거야 천 년 전에 그랬었죠. 천 년 전엔 로만 제국이란 곳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로만 제국이라는 곳이 새삼 대단하고 느꼈다. 천 년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나라가 제국이라는 강대국이 되다니. 왕이 능력 좀 있었나 보다.

“뭐, 제국이야기는 뒤로 제쳐두고 비루스 왕국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신전에서 왕국을 관리한 후로 오히려 평이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신전은 특히나 이종족 차별에 반대하는 자들이라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죠.”

“그렇구나.”

전화위복이라더니, 왕족이 사라지자 백성들의 삶이 더 좋아진 건가. 세상사 참 알 수가 없다.

“그럼 다른 쪽을 살펴보자면, 엘퀴라즈 숲의 동쪽에는 루카스 왕국이 있습니다. 여긴 반대편에 있는 비루스 왕국이랑 평이 정반대인 나라입니다. 이종족 차별이 로만제국만큼이나 없는 곳이죠.”

루카스 왕국이라. 동쪽이면 숲 오른쪽이로군. 비루스 왕국이랑 위치도 정반대인데 성향도 정반대인가.

“루카스 왕국은 천 년 전에도 있었으니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왕국이죠. 이 왕국이 대단한 점은, 천 년 전에도 그리 이종족에 대한 차별이 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전에 이야기했을 땐 차별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차별이 적었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곳에선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경우가 많았는데 루카스 왕국에서는 증오를 받았을지언정 공격은 안 받았거든요.”

“그래…….”

“아마 공공의 적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루카스 왕국이 바로 제가 마력석을 얻은 광룡의 미궁이 있던 나라였죠. 아마?”

그 말을 듣자 루카스 왕국이란 곳이 상당히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목에 걸린 마력석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그를 부추겼다.

“계속 이야기해 줘.”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광룡이 날뛰기 시작한 때가 때마침 대륙에 전쟁이 횡횡하던 때라서 시기가 절묘했죠. 루카스 왕국에선 내부에 적이 있으니 그걸 막느라 다른 종족들과 티격태격할 여유가 없었고, 다른 국가들에선 굳이 루카스 왕국을 쳐들어가서 악명 높은 광룡을 풀어주느니 그냥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거죠.”

“그…… 광룡이란 녀석이 그렇게 악명이 높았어?”

“제가 돌아다녔던 모든 나라에서 다 알고 있더라고요. 용들의 산맥에서 나온 후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루카스 왕국이었죠.”

아버지. 여러모로 민폐가 많으셨습니다.

왜 일은 아버지가 저질렀는데 아들인 내가 더 부끄러운 걸까.

“그리하여 광룡의 악행 덕분에 루카스 왕국에선 이종족들끼리의 증오가 타국보다는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지금에 와서는 이종족들이 로만제국보다 더욱 화목하게 지내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룡이 있다는 게 오히려 득이 됐군.”

“예. 나중에 듣기로는, 제가 루카스 왕국을 떠난 후에 광룡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땐 또 전쟁보다 마왕이라는 더 큰 세계의 적이 나타났을 때였죠.”

“흠. 그렇군…… 이 아니라 뭐? 광룡을 잡았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누구한테 잡히지 않고 어머니를 찾아 엘퀴라즈 숲으로 오셨는데?

“광룡의 악행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왕가와 귀족들이 모두 힘을 합쳐 쓰러트렸다고 들었습니다. 그 증거로 광룡의 검은 비늘을 국민들에게 보여줬고요.”

“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높으신 분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아버지가 떠난 후에 거짓말을 한 것인가.

비늘은…… 분명 처음 도시에 갔을 때 누군가에게 하나 선물해 줬던 것 같은데. 그거구나!

비밀은 모두 풀렸어!

“지금은 광룡이 살던 미궁도 시간을 들여 몬스터들도 모두 처치했고, 위험한 기관들도 해체하여 관광지처럼 변해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루카스 왕국이라. 거기는 한 번 가보고 싶네.”

기본적으로 숲 밖에 나갈 만큼 내가 의욕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살던 곳이잖아?

뭐랄까, 명절에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과 같은 시골집 냄새가 난다.

내가 여행을 떠날 기미를 보이자 아라디온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이 꽤 무섭다.

“지금 가신다면 제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아니, 어차피 가고 싶어도 네 동료들을 기다려야 한다며…….”

“그럼 동료들이 온 뒤에 바로 출발하죠!”

“끄응…….”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그래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다.

“후후…… 드디어…… 위그드라실 님과…… 위그드라실 님의 소중한 자는 모습을 외부인에게 보일 순 없으니 방을 잡아야겠지? 그럼 방은 나랑 같은 방으로…….”

취소. 이 자식. 위험하잖아!

그런데,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하자 아라디온이 급했는지 나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제가 최근에도 가봤는데 거기 굉장히 좋은 곳입니다. 물도 좋고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착하고, 볼 것도 많아요!”

“그래……?”

그리고 그중에, 내가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 이제 곧 무투대회도 개회한다던데, 상품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그 흉폭한 광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라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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