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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말하지 못한 비밀
평화로운 엘퀴라즈 숲.
그곳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보통의 나무들과 다르게 생각을 할 수 있는 나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그 나무는 다른 나무로는 대체할 수 없으며 이 세상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독보적인 희소성을 지닌 나무였다.
그 나무의 이름은 바로…….
「토마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아주 조금 동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에서 다른 나무들과 똑같이 생긴 판이한 나무 한 그루가 내레이션을 읊듯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나무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읊더니,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
「좋아. 도입부는 이 정도로 끝내고. 흠. 그럼 모험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그 특별한 나무, 토마스가 지금하고 있는 일은 바로 소설을 쓰는 것. 그는 지금까지 위그드라실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작가인 토마스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다면, 필시 이렇게 답하리라.
「원래 이야기의 긴장감과 흥미를 높이려면 실화라도 각색이 조금 필요한 법이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주인공을 자신으로 한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럼 뭐 어떠리. 어차피 그의 상상 속에서만 써지고 있는 소설인데.
「근데 이거, 이야기를 구성하기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이야기를 만드는 와중에 토마스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가 원하는 이야기는 매우 역동적이며 속도감 있고 등장인물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이야기였지만, 위그드라실이 겪은 이야기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백만 광년은 떨어진 매우 정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아. 왜 나는 나무로 태어난 것일까. 내가 인간이나 엘프였다면 소설을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다녔을 텐데.」
이야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화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라고 생각한 토마스는, 나무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구시렁거렸다.
「어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모험가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후우…….」
“제가 들려드릴까요?”
「으헉!」
토마스가 화들짝 놀라 나뭇가지를 떨었다. 나뭇잎 몇 개가 그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에서 떨어졌다.
“하하. 놀라게 했나요?”
「당신은……?」
토마스에게 말을 건 사람은 바로 최근에 숲에 들어온 엘프, 아라디온이였다.
토마스는 숲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만한 인물이 없다고 여겼기에 갑자기 물어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당신, 어떻게 나를 알아챈 거지?」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기에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또 주인님을 닮은 그 버릇이 나온 건가.」
“위그드라실 님도 혼잣말을 자주하시나요?”
「요즘엔 안 하시는데, 예전엔 자주 그러셨지…… 가 아니라, 이봐, 당신. 나의 존재에 대해선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예?”
토마스는 아라디온에게 자신의 존재가 왜 비밀인지, 자신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이미 들킨 이상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고, 또 그동안 혼자만 있으려니 심심했던 이유도 크게 작용했지만.
“하하. 위그드라실 님을 위해 소설을 쓰는 중이셨군요.”
「그런데 요즘 고민이야. 주인님이 주신 지식과 정보로는 완벽한 소설을 쓸 수가 없어. 하아.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여행하면 또 저라고 말할 수 있죠.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오…… 이봐. 엘프양반. 그럼 이야기 좀 해줘. 잘 써먹어 줄 테니까. 대신 소설 속 인물에 자네를 아주 멋지게 등장시켜 주지.」
“이왕이면 그…… 위그드라실 님이랑 이어지는 걸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응? 위그드라실 님은 등장 예정에 없었는데…… 뭐, 좋아.」
“후후. 거래 성립입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요. 제가 위그드라실 님, 그러니까 예전 세계수님을 위해 여행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아. 저번에 주인님께 이야기하던 부분은 나도 다 들었어. 귀가 좀 밝거든. 다른 이야기는 없어?」
“흠…….”
잠시 고민하는 아라디온은, 아직 위그드라실에게 이야기 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떠올리며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녀석이라면 이야기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위그드라실에게 말하기로 결심한 비밀이야기를.
“그럼, 제가 대륙 너머의 세계로 간 이야기를 해드려야겠군요.”
「오오! 그것 참 흥미로운데!」
“자, 그럼 시작합니다. 차근차근 이야기해 드리죠.”
* * *
“여기가 끝이군.”
미궁에서 마력석을 손에 넣은 아라디온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위그드라실을 위한 다른 물건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아쉽게도 마력석 외에 그녀를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적어도 후에 그의 주인을 모시고 세상을 여행할 때 앞장서서 나설 수 있는 경험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리하여 그는 여행을 마치고 고향인 엘퀴라즈 숲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이쪽으로 가야한다. 빨리,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선 이 길밖에 없어.”
아라디온이 있는 곳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마족들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숲은 대륙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륙 중앙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숲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일직선으로 대륙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하지만 인간들과 마족은 현재 전쟁 중이였고, 그 방법으로 가기 위해선 전쟁터를 지나가야만 했다.
그는 기회를 엿보았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지속되었고, 인간과 마족의 증오와 분노는 더욱 더 커지기만 하였다.
“결국…….”
전쟁은 서로간의 평화가 아닌, 공멸(共滅)로서 끝이 났다.
아라디온은 전쟁터를 가로지르며 죽은 시신들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엔 허무함과 공포, 분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째서 이토록 싸우는 것이지?”
모두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누구의 탓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게 누구인지 전부 까맣게 잊고 있으니까.
싸움이 마치 자신들의 운명인 것처럼,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어서 가자.”
시신을 넘고, 마법으로 깊게 패인 구덩이를 지나 그는 고향으로 향했다.
“저 사람들은?”
그런 바쁜 걸음을 하는 와중에, 그의 시선을 잡아 끈 인물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폐허의 한복판에서 한 남자와 어린 소녀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터를 둘러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인가.”
전쟁으로 인해 살 곳을 잃은 자들일까?
아라디온은 그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몇 번이고, 저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오히려 엘프인 자신이 다가가면 화를 내고, 원망하고, 분노하며 공격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인간과는 엮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
“엘프…….”
그 순간, 뒤에서 덮쳐오는 살기에 아라디온이 몸을 굴렸다. 하나의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그가 있던 자리를 베고 땅에 꽂혔다.
“엘프마저 이제 우리들의 땅에 침범하려 하는가!”
“저, 저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패잔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모두 분노에 찬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저, 저는 그냥 지나가던 엘프인데요.”
“거짓말…… 이런 전쟁터에 엘프가 있을 리가 없지. 첩자로군.”
“전쟁은 끝났습니다!”
“아니야. 아직이야. 우리는 지지 않았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과 싸워야 할까? 이들과 싸워도 다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그냥 도망치자.’
하지만 혹시나 싸우던 도중 마력석이 망가지거나 부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라디온은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 * *
「흠.」
“왜 그러시죠?”
「아니. 이야기가 좋긴 하네. 전쟁이란 주제를 가지고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겠고, 거기다가 전쟁으로 살 곳을 잃은 소녀와 아버지를 넣음으로서 좀 더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부각할 수도 있고.」
“그런가요.”
「근데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너무 철학적이란 말이지.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역동적이고, 살아 있고, 흥미를 끌만한 모험이야기였는데.」
“모험이야기입니다. 후후. 그것도 아주 처절한 생존 이야기라고 할까요?”
「오오. 싸움인가? 그건 좋은데.」
“싸움은 싸움이죠.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의 싸움.”
「자연?」
* * *
“죽어라!”
“히익!”
병사들이 휘두르는 검과 마법을 피해서 아라디온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강을 건너기만 하면 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쪽을 향해 달렸다.
딸칵.
“어?”
강에 거의 도착한 그 순간, 발밑에서 쇠가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닥에 순식간에 그려지는 하나의 마법진.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며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고, 아라디온이 그곳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폭발이 일어났다.
“안 돼!”
그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곧 차가운 물이 들이닥치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강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위, 위그드라실 님에게 가야 하는데…….’
폭발의 충격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해 진 그는 물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곧 손에서 힘이 빠지면 천천히 깊은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보이는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 * *
「끝이로군! 비극적인 삶이었다. 전쟁으로 미쳐 버린 인간들의 광기와, 오로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개조당해 버린 마법이라는 도구로 이기적인 인류의 자화상을 보여주는군.」
“……저기, 저 아직 살아 있거든요?”
「안 죽었어? 아…….」
“제가 죽기를 바라십니까?”
「거기서 죽었어야 비극을 더 강조할 수 있었는데. 희망을 품고 고향으로 상경하던 엘프, 전쟁의 희생자들에 의해 희생자가 되다. 어떤가?」
“역동적인 이야기가 쓰고 싶다면서요.”
「아차. 그랬지. 나도 모르게 그만.」
“계속 듣기나 하시죠.”
* * *
“으으…….”
싱그러운 햇살이 그의 눈을 간질였다.
아라디온은 몸을 꿈틀거리다 힘이 빠져 잠들려고 했지만, 위그드라실이 떠올라 눈을 번쩍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위그드라실 님!”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누워있던 모래사장과, 몇 그루의 이름 모를 나무들뿐이었다.
“여긴……?”
그는 곧 마지막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강에 빠지고, 몸이 무거워지더니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정신을 잃었던 순간을.
그리고 거센 물줄기에 휘말려 떠내려갔던 것을.
눈에 보이는 것은, 방금 봤던 모래사장과 나무들뿐이었다. 그 외엔 파랗게 끝이 보이지 않는,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뿐.
아라디온. 그는 무인도로 떠내려 온 것이다.
“대체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