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99화 (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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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할 수 있다고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짙은 잿빛을 띠고 있는 돌이 줄에 엮여 하나의 목걸이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돌에 푸른색의 염료로 그린 듯한 알 수 없는 문양이 마력을 은은하게 발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소하다. 그것이 아라디온이 천 년에 걸쳐 엘퀴라즈 숲으로 가지고 온 마력석을 본 나의 첫 감상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수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마력석입니다.”

“운명…… 까지는 아니고 그냥 생리적인 문제잖아.”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따라 물건은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죠.”

장사꾼이냐. 근데 확실히 매혹적인 소개다. 그냥 숲에서 벗어나서 활동할 수 있다는 말보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 더 끌리긴 한다.

아라디온이 내게 목걸이를 건넸다. 나는 목걸이를 받아 들고,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까지 아라디온에 품속에 있었던 물건이라 그런지 뜨끈뜨끈하다.

조금 불쾌한걸?

“그냥 착용하면 되는 거야?”

목걸이에서 그의 열기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전과 딱히 바뀐 점은 없는 것 같다.

“착용하신 뒤에 마력석에 마력을 불어넣으시면 됩니다.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라, 본인의 고유한 마력이요.”

바로 목걸이에 세계수 특유의 백색 마력을 흘려 넣었다. 진동기처럼 부르르 떨며 나의 마력을 흡수한 마력석은 내려갔던 온도가 다시 달아오르며 따뜻해졌다.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란색의 문양도 나의 마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이제 된 건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 몸에 변화는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보냈다. 다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켜보는 걸 보니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그럼 위그드라실 님. 한 번 실험해 보시겠습니까?”

또 그 표정이다. 매우 진지한, 신중하고 올곧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그 표정.

아라디온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경박하거나 방정맞은 성격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이 경호원처럼 양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열어주었다.

조금 걷자 금세 나의 정령체가 갈 수 있는 최대 사정거리까지 도달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걷는다면 밤새 야근을 뛰고 온 직장인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이다.

마력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자, 그럼 간다.”

마지막으로 아라디온과 얼굴을 마주쳤다.

아라디온. 그는 마력석을 구한 뒤에도 만일을 대비하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천 년이라는 시간을 더 외지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대책은 마력석 하나뿐.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는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만일 나였다면 차마 떨리는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결과를 보지 않기 위해 잠시 어딘가로 대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꿋꿋하게 서서 지켜보고 있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의 불안감처럼, 마력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한 걸음 내딛었다.

맨발의 살결 아래로 느껴지는 풀들의 감회가 새롭다.

두 걸음 내딛었다.

언제나 눈으로 지켜보던 장소가, 직접 방문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세 걸음 내딛었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그 나른함과 무기력함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

무언가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적당한 말이, 어울리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지난번에 옷을 벗었을 때 느낀 해방감. 그것보다 더 한 해방감이 나의 전신을 덮친다. 불가능한 꿈이라고만 여겼던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함께 밀려온다.

“위그드라실 님!”

그리고 기대를 만족시켜 주었다는 만족감도 들었다.

이것으로 아라디온의 천 년은 헛 된 것이 아니다. 혹시나, 만에 하나의 확률로 마력석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 아라디온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걱정했던 불안감도 사라졌다.

“주공. 축하드리옵니다.”

“아빠. 축하드려요.”

아이들이 나를 축하해 주었다. 곰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지 고개를 머쓱하게 돌리고 있었다.

뭐, 원래 남자애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

핀이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말은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참 뒤에야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축하해. 아라디온.”

침묵도 전염이 되는 걸까. 이번엔 아라디온이 말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침묵이 아니라는 것은, 아라디온의 눈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내가 아라디온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기분이 어떠할까.

사랑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으로 몸을 던졌다. 세상은 평화롭지 않았고, 혼란과 전쟁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맨다.

고생하여 간신히 찾아낸 물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찾던 물건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금만 더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고향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떠난다.

그렇게 수백 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신히 고향에 도착하니, 소중한 사람은 이미 죽고, 고향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기적처럼 소중한 사람의 후손을 만나, 소중한 사람 대신에 물건을 건네준다.

물건은 혹시나 했던 불안과 다르게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그는 마력석을 구하자마자 고향으로 달려왔었어야 했다며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후손인 나만이라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감격하고 있을까.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다.

* * *

석양이 지는 순간까지 아라디온은 따로 떨어져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들은 몰래 배려해 주었다.

“석양이 예쁘네요.”

“그러게.”

우리들도 그의 뒤에서 함께 석양을 바라보았다.

주황빛과 붉은빛이 한데 뒤섞이고, 하늘 위로 연보랏빛의 어둠이 천천히 스며드는 모습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곰.”

「석양이…… 진다.」

“그래. 석양이 진…….”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이런 순간에도 네 녀석의 개그 욕심은 멈출 수 없는 거냐.

자꾸 받아주니까 시도 때도 없이 개그를 하는 것 같다.

“위그드라실 님.”

“응.”

“언제 출발할까요?”

어디를 출발한다는 걸까.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뭐가?”

“이제 숲 밖으로 나가실 수 있게 되셨으니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런 거였나.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어머니처럼 나도 밖에 나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데.”

“역시 위그드라실 님. 상냥하시군요…….”

“엥?”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라디온 녀석, 뭔가 표정이 어린아이가 선물을 준비한 것처럼 히쭉히쭉 웃음을 참고 있다.

“제게 모든 것을 위임하신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세상을 떠돌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보통 여성분들은 뭔가 선택지가 여러 개 생겼을 때 남성이 리드해 주길 바라더군요.”

“난 남잔데.”

“성격은 여성스러우시지 않습니까.”

“다시 보여줄까?”

“뭐, 어쨌든 위그드라실 님께서 제게 여행 계획을 전면 맡기신 것 같아서요.”

이쯤 되면 꿈보다 해몽이다. 물론 내게 숲 밖의 세상을 모르는 건 맞지만, 여성스럽다느니 내가 리드를 바란다느니 하는 건 하나도 맞지 않잖아.

“진짜로 나가고 싶지 않다니까?”

계속해서 내가 거절하자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아라디온이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방정맞은 목소리와 행동을 하며 내게 물었다.

“아, 아니!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별로. 그냥 숲에 있어도 충분한데. 딱히 나가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진 없어.”

“왜, 왜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 아니라 그냥.”

제길.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자꾸 곰을 닮아가는 것 같아서 무서운데.

잠깐, 아이들의 지식은 내가 건네줬으니까 곰이 날 닮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이제 밖으로 나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가지 않으시겠다니요.”

“꼭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

“할 수 있다고 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서 나가야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숲에서 지내는 게 더 좋은 걸. 바깥세상도 좋긴 하겠지. 근데 아직은 아니야. 별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아, 아니 어째서…….”

“무엇보다, 나는 인도어파라고.”

“인도어파가 무엇입니까?”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명이 부족했나 보다. 이해를 못하고 있다. 좀 더 부가설명을 덧붙여야겠다.

“사람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하나는 인도어파고, 다른 하나는 아웃도어파지. 인도어파의 경우는 집에서 있는 걸 좋아해.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고 일이지. 체력이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거기다가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일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 결국 인도어파는 휴식을 위해서라면 혼자서 느긋하게 있는 쪽을 선호하지.”

“그럼 아웃도어파는 어떻습니까?”

“아웃도어파는 밖에서 오히려 체력이 회복되는 반대야. 집에서 있으면 심심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지.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진정한 휴식이라고 생각해.”

이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라디온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그, 그래서 위그드라실님은…….”

“그래. 난 인도어파다! 숲 밖으로 나가는 건 내게 있어서 일이라고! 여행도 좋지! 좋지만 한 번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귀찮아! 전부 일이야! 피곤하다고!”

인터넷 이모티콘 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좌절하는 아라디온. 이거,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아라디온 이 녀석,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주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라디온.”

“예.”

“지금 우리가 다 함께 여행을 떠나면…… 내 본체는 어떻게 할 건데.”

“네?”

“나무 말이야. 세계수. 나의 본체.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잖아.”

이것으로 설득이 끝났겠지.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다르게, 아라디온은 훨씬 더 이상한 놈이였다.

“저랑 위그드라실 님 단둘이서만 갈 생각이었는데요?”

“응?”

“네?”

“아, 안 돼! 둘만 보낼 수 없어! 난 이 여행 반대야!”

핀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삼자대면하는 여자 친구인 양 끼어들어 말렸다.

아라디온을 노려보는 눈빛에 남자친구를 빼앗길 수 없다는 여자의 한이 담겨 있었다.

하아. 하이엘프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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