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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천 년 전(2)
아라디온은 그 길로 용들이 살고 있다는 산맥으로 향했다.
용들이 살고 있는 산맥. 대륙에 전쟁이 발발하고, 서로가 모두에게 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유일하게 전쟁이 미치지 않는 그곳.
“후우. 용이라…….”
그는 용들이 사는 산맥으로 향하는 여행에서 용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들을 만날 정도로 아라디온은 무모한 남자가 아니었다.
“용이라. 현명한 녀석들이지. 하지만 난폭해. 절대로 만나주지 않을 걸?”
“용? 그런 난폭한 녀석들을 왜 만나려는 거야.”
“그들이 사는 땅에는 허락 없이 들어가면 안 돼. 용에게 초대를 받은 자만 발을 디딜 수 있다고.”
“탐욕스러운 녀석들이지. 오죽하면 금맥이 있는 산맥에 둥지를 틀고 저들끼리 독차지하겠어.”
아라디온은 용을 만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용들이 사는 산맥으로 떠나자. 그들에게 사정을 잘 말해보면 혹시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그는 필시 진심을 다해 부탁한다면 알아주리라 믿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대륙 가장 외곽에 위치한 용들의 산맥.
봉우리에 쌓인 만년설이 하얗게 빛나는 이곳은, 아직 접근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 오지의 세계였다.
산을 올라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지성이 없는 몬스터들이 걸음을 내딛는 족족 나타나 산을 올라가는 것을 방해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빠르게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디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야 말로 유일하게 그녀의 족쇄를 해방시켜 줄 단서가 있는 곳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싸움은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
그녀를, 위그드라실을 지키기 위한 힘이었고, 그녀를 위한 힘이기에 그는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방해하는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며 산맥에 입장한 그는 마침내 용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참으로 놀랍구나. 숲의 주민이여.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는 드물거늘.』
“용이여. 부디 저의 말을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용(龍)은 거대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형형색색의 보석과도 같은 비늘이 빛났고, 그들의 눈은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마비될 정도로 공포심을 일으켰으며,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무섭지 않느냐?』
“전혀……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아라디온에게 그들은 전혀 무서운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크기도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에 비한다면 작은 동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 그리고 위협적인 눈빛도…….
‘사물의 본질이란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눈은 모든 걸 말해주거든요.’
상대를 볼 때 항상 눈동자에 담긴 마음을 보라며 말해준 위그드라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그에겐, 용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지혜와 지성에 의해 이지적이고 부드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숲의 주민들 중에도 꽤나 드문 아이로구나. 그 아이가 세상에 나간 이후로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드물거늘. 무엇이 궁금하여 우리를 찾아왔는가?』
아라디온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가만히 바닥에 누워 아라디온의 말을 경청하였다.
마침내 아라디온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바는 오랜 삶을 살아온 용들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답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나.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네.』
아라디온은 용들의 답변을 기다리며 그들의 거주지에서 한동안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현명했다. 세상에 퍼진 소문과 다르게 지혜롭고, 온순했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아라디온은 궁금했다. 어째서 세상이 알고 있는 용들의 소문이 그렇게 퍼진 것인지.
용들 중에 한 마리가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표정은 잘 알 수 없지만 씁쓸하게 웃는 것 같았다.
『우리 일족 중에 특이한 녀석이 태어났지. 그 녀석이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 행패를 부린 덕분에 용들이 난폭하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더군.』
* * *
“잠깐…… 설마…….”
“왜 그러시죠?”
“아,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
* * *
아라디온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용들은 그가 원하던 바람을 이루어 줄 해답을 마침내 알아내었다.
『한때, 우리는 정령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지. 정령이란 마력으로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체. 자네가 말한 그자가 본체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은, 마력의 수급이 없으면 정령의 형상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하네. 본체의 마력을 저장하여 정령체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해 줄 수 있는 물건을 휴대하면 될 걸세.』
아라디온은 기뻐했지만, 어떻게 그 물건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도 그에겐 현명한 용들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 물건은 어디서 찾아야 하죠?”
『원래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지만…… 전에 말했던 특이한 동족이 연구 자료들과 물건들을 모두 가지고 인간세상으로 나가버려서 이젠 이곳에 없네.』
“정말 특이한 자로군요…….”
『특이하지. 태어나자마자 다른 동족들에게 시비를 걸던 녀석이었으니…….』
* * *
“하아…… 설마 진짜로 아버지인 건 아니겠지…….”
“자꾸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한탄이야…….”
* * *
용들에게 그 물건이 있는 장소를 알아 낸 아라디온은 쉬지 않고 바로 여행을 떠났다.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물건, 용들이 ‘마력석’이라 부른 물건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들은 인간계로 내려간 자신들의 동족이 루카스 왕국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곳까지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쟁은 전보다 더 심해졌고, 종족간의 갈등 역시 전쟁과 함께 광기에 치닫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엘프인 그에게 시비를 거는 종족들이 있었으며, 같은 엘프들은 자신들에게 힘을 보태달라며 그에게 전쟁을 권유했다.
“죄송합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아라디온은 루카스 왕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수소문한 끝에 용이 살고 있다는 미궁으로 향했다.
“이곳이 광룡(狂龍)이 살고 있다는 미궁인가.”
* * *
“진짜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더니…….”
“위그드라실 님? 아, 광룡이라는 호칭 때문에 그런 겁니까? 여러분도 광룡의 전설적인 악행을 들어서 겁을 주려고 그렇게 지은 게 아니었습니까?”
이 녀석에겐 아버지의 이름이랑 용이라는 사실만 알려주었기에, 광룡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광룡이 바로 우리 할…….”
“아아! 맞아. 맞으니까 이야기 계속해.”
* * *
아라디온에게 미궁의 위치를 알려준 많은 이들은 그를 걱정하거나 비웃었다. 어떤 이들은 엘프인 그를 증오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궁에 가라며 등을 떠밀 정도였다.
‘심각하군.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 전보다 더 심해졌어.’
하루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 줄은 전에는 몰랐다.
아라디온이 미궁에 도착했다. 거대한 입구는 고풍스러운 장식물들로 조각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몰랐다면 멋진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장소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미궁. 지금까지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서 나온 자가 없다는 죽음의 장소. 아라디온은 위그드라실을 생각하며 굳은 마음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미궁은 온갖 함정들과 몬스터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이들의 시체와, 이름 모를 자들의 백골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라디온은 그곳을 들어가…….
* * *
“그 부분은 넘겨도 될 것 같은데.”
“여기가 흥미진진한데요. 미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었냐면…….”
“괜찮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네?”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봤거든.’
“그래서? 미궁에서 원하던 물건은 찾았어?”
“아. 그러니까…….”
* * *
“후우. 다행이군. 그 광룡이라는 녀석은 없었구나.”
처음 들어갔던, 고풍스러운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던 입구로 다시 기어 나온 아라디온은, 지치고 피곤했지만 행여나 잃어버릴까 품을 손으로 꼭 감싸며 걸어 나왔다.
“정말 끔찍했어.”
평생 겪을 죽음의 위기를 이곳에서 다 겪은 것 같았다. 만일 하이엘프가 아니었다면 벌써 저 안에서 다른 백골들의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하는 것은 손에 넣었다.”
그는 벌써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얼마나 원했던가. 그분 곁에서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삶의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 밖으로 따로 떨어져 나와 보니 전보다 더 생생하게 그 기쁨을 알 수 있었다.
“이거면…… 되겠지?”
그러나 가슴 안에 피어난 작은 의심의 싹. 정말로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
용들은 세계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 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것을 알 정도로 전지(全知)한 것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좀 더 세계를 둘러보자.”
* * *
“그리하여 저는 세계를 둘러보고, 대륙 너머의 먼 곳까지 다녀온 뒤에야 간신히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여행한 나머지 이곳에 도착했을 땐, 벌써 900년이 흐른 뒤였더군요.”
“…….”
뭔가 의심스럽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입이 근질거렸다는 듯이, 전문 이야기꾼처럼 말하는 것을 즐기던 그가 왜 갑자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일까?
“뭐 숨기고 있어?”
“아, 아뇨. 아무것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다. 입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반쯤 돌린 것이, 이것은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렷다.
“흠. 뭐, 알았어.”
그렇다고 캐낼 생각까지는 없다. 숨기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의 하이엘프였으니 일단은 믿고 언젠간 말해주기를 기다리자.
그래도 아직 궁금한 게 조금 있는데.
“그 옷도 대륙 너머에서 구한거야?”
“예. 그곳에서 구했다고 할 수 있겠죠?”
애매한 대답이군. 흠. 대륙 너머라. 지구에서 중국과 같은 동양 문화를 가진 대륙이 있는 건가?
그럼 마지막으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자.
“근데 눈은 왜 그래? 왜 한쪽만 파란색이야?”
핀도, 기억 속의 어머니의 하이엘프들도 양쪽 눈 모두 파란색인데 이 녀석은 오른쪽 눈만 파란색이고 왼쪽은 녹색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걸까? 아니면 뭔가 일이 있던 걸까?
“아, 이건…….”
나는 순간 내가 잘못된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디온이 나의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화제를 돌리자. 뭔가 슬픈 기억을 건드린 것 같으니.
“아, 그 마력석이란 거, 구했다고 했지?”
“예.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라디온이 목을 만지며 걸려있던 줄을 끌어당겼다. 옷 속에 감춰져, 줄에 묶여있던 작은 돌멩이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게 바로 마력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