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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천 년 전
“이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제가 알고 있던 위그드라실 님이 아니셨군요.”
이제는 침착하게, 정상인으로 돌아온 아라디온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조곤조곤 말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닌데다 눈물 콧물로 얼굴을 범벅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꽤나 잘생긴 녀석이다.
“응. 난 어머니가 아니야. 그분의 아들이지.”
“하아…… 정말 꼭 닮으셨군요. 그게 달려있다는 것만 빼면 그분의 어렸을 적 모습이랑 정말 판박이십니다.”
“그게 달렸다고 꼭 언급을 해야 되니……? 그냥 성별이 다르다고 하면 되잖아.”
“아. 저도 모르게 그만. 너무 충격적이라서요.”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긴 했겠지. 설마 같은 남자끼리 내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건 아니겠지?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려줬으니까 자, 그럼 너에 대해서 들려줘.”
나는 이 녀석, 아라디온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이 있다.
생긴 건 반듯하니 잘생기긴 했는데, 하는 행동이 영 신뢰가 가질 않으니. 정말로 어머니의 하이엘프가 맞는 걸까?
기억 속에서 봤던 어머니의 하이엘프들은 하나같이 다들 진중하고 무게감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울리지가 않잖아.
“그럼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저는 과거 세계수셨던 위대하신 분의 첫 번째 수호자. 아라디온이라고 합니다.”
수호자라. 멋진 명칭이다. 역시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는구나.
“어머님을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한 점, 그리고 천 년이나 지나서야 이 숲에 뒤늦게 찾아온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전과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사뭇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천 년이나 대체 뭘 했던 거야?”
순간,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채 묻기도 전에, 아라디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천 년 전, 엘퀴라즈 숲. 고요하고 평화로운 햇살 아래, 나무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거대하고 경이로운 숲.
그 숲 한가운데, 산처럼 거대한 나무가 웅장하고 고고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듯이 자라 있었다.
“날씨가 참 좋네요.”
그 나무 아래, 한 아리따운 여인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미소 지은 듯한 그녀의 표정은 자 하늘 위의 태양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따스하고 밝은 빛을 머금고 있었고, 그 자태 또한 이 세상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하고 고고하고 진짜 최고로서, 세상 모든 절세미인들이 달려들어도 그녀 앞에선 순식간에 추녀가 되어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며 신을 원망…….
* * *
“자, 잠깐! 우리 어머니를 어디까지 치켜세우려는 거야! 듣는 내가 부끄럽잖아!”
“아니,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그분을 수식할 단어가 적어도 백 단어는 더 남았는데.”
“그 부분은 넘어가고, 다음으로 가자.”
* * *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아라디온?”
그런 아리따운 미녀가 앵두 같은 입술로, 청아한 목소리로 지저귀는 새처럼 말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환한 미소로 상대를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위그드라실 님 말씀이 맞습니다. 참으로 좋은 날씨로군요.”
훤칠한 키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이 비단을 연상시키는 엘프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떡 벌어진 어깨가 남자다움을 과시하였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그의 성격이 꼼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자면, 천하에 둘도 없는 석공이 직접 하루하루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 깎은 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눈, 코, 입 어느 부위도 천하절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 외모는 설사 남자라 할지라도 그를 본다면 한눈에 반할…….
* * *
“잠깐 멈춰. 어디서 약을 팔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자화자찬이 너무 심하잖아!”
“원래 남자는 자기 얼굴을 세 배 정도 고평가하지 않습니까. 저라고 뭐 다를 거 있나요.”
“크윽…… 이 부분도 그만 넘겨줘.”
“아직 묘사가 더 남았는데. 하는 수 없군요.”
* * *
“저 멀리 숲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들판이 있고, 산이 있고, 도시가 있지요. 인간들도 있을 것이고, 다른 종족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숲을 떠난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아는 세상은, 모두 당신께서 들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라디온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숲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위그드라실에게 늘 들으며 지내왔기에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로 바깥세상을 알 수 있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제가 볼 수 없는 저 너머의 세상이에요.”
“아…….”
잠깐의 탄식. 그리고 고민. 위그드라실이 비록 숲 밖의 세상을 볼 수 있다지만, 그것은 이 넓고 끝없는 세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가끔은 사람들이 부러워요.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가끔은, 세계수로 태어났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네요.”
“위그드라실 님.”
“아, 저도 모르게 그만. 꼭 만나고 싶은 분이 계셔서요. 죄송해요.”
아라디온은 태어나서, 그리고 그녀의 하이엘프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기뻐할 때면 자신도 기뻤기에,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슬펐기에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동안 그녀가 세상에 대해 들려줬던 것처럼,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 저 너머의 세상을 직접 겪어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 돌아와서 그녀에게 들려준다면, 분명 행복해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녀에게 직접, 지금껏 본 적 없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녀를 데리고 함께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고 듣는 것이 아닌, 직접 세상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녀는 세계수이다. 정령을 현신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체에서 먼 곳까지 이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로 방법이 없을까? 이 넓은 세상에, 그런 기적을 실현시켜 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라디온이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엘퀴라즈 숲과 위그드라실이 들려준 이야기들뿐.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그리고 반드시 그녀를 세상에 내보내 줄 무언가를 찾아오자.
그것이 마법이라면 마법을 배울 것이다.
그것이 물건이라면 가져올 것이다.
그것이 형형할 수 없는 무언가라 할지라도.
반드시.
“나의 아름다운 주인이시여.”
“아라디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 아라디온이 반드시, 당신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줄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
위그드라실은 깜짝 놀라며 그를 만류하려 하였다.
세상 바깥은 마냥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었다. 그에게 들려줄 때는 단점들은 제외하고 아름답고 멋진 것들만 들려주었기에 아라디온은 세상의 추함과 악함을 알지 못했다.
그녀, 위그드라실은 바깥세상으로 나간 그가 상처를 입을까 두려웠다.
“아라디온, 잠시만…….”
그러나 그의 결심은 단호했고, 그녀는 그의 의지를 보았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 * *
“……저기 미안한데 말이야. 내가 오늘 본 너의 모습이랑 좀 심하게 다른 것 같거든?”
“원래 이야기란 10% 정도 각색이 필요한 법입니다.”
“흠. 실제론 어땠는지 내가 맞춰볼까? ‘위그드라실 니이이임!!! 슬퍼하지 마십쇼! 저 아라디온! 반드시 위그드라실 님을 위해 세상 모든 곳을 뒤지더라도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아아아!!!’”
“크윽…….”
“어머니는 분명 말리셨겠지. ‘아라디온. 저를 위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근데 너는 듣지도 않고 ‘남자가 결심을 했으면 바로 떠나야죠!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아아아!!!’라며 바로 떠났을 것 같은데.”
“지, 진실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말꼬리를 늘였다고 자꾸 ‘다아아아’입니까.”
“그냥 너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
“이야기나 계속하겠습니다.”
* * *
그렇게 처음으로 숲 바깥세계로 나오게 된 아라디온은, 그녀가 왜 만류하려 하였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었군요.”
위그드라실에게 듣던 대로 세상은 아름다웠다. 길가에 핀 들꽃이며, 숲에선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동물들과 사람들, 그리고 나무처럼 빽빽한 수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
하지만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세상에 나오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한 푼만 주세요.”
부모를 잃고, 거적때기 한 장에 몸을 맡긴 채 골목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 길가에 쓰러져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무관심한 군중들. 성 밖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전쟁의 비명 소리.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것은…….
“뭐야. 이 녀석, 엘프잖아?”
바로 종족 차별이었다.
“헤에. 이 엘프 좀 봐. 눈이 파란색이잖아.”
인간들은 다른 종족을 용납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악의를 가진 인간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고, 나는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과 부딪히기 일상이었다.
“그러게. 얼굴도 반반하니, 돈 좀 되겠는데?”
그중에서도 엘프는 인간들에게 돈이 되는 종족으로 치부되는 것 같았다.
그냥 전쟁으로 인한 원망(怨望)을 가진 사람은 조용히 피할 수 있었지만, 엘프를 돈으로 보는 인간들은 그 추악함만큼이나 끈질겨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 그만둬. 설마 저 엘프를 잡아다 팔 셈이냐? 하여간 인간들은 추하군. 그저 돈밖에 모르는 벌레 같은 놈들.”
그렇게 어느 도시에서도 인간들에게 노려지고 있던 찰나, 한 여인이 나를 도와주었다.
“너는 또 뭐야. 잠깐, 엘프잖아? 게다가 여자네? 와우. 오늘 횡재했는걸.”
“……더러워.”
나와 같은 긴 귀를 가진 여성 엘프. 나는 혹시나 그녀에게 해가 갈까봐 먼저 나서서 그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인간들은 분수를 모르는 자가 너무 많아.”
그녀는 장미처럼 아름다웠고, 그에 걸맞게 날카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별말씀을.”
그녀는 동족을 만나서인지, 아니면 내게 호감이 있던 것인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고, 우리는 함께 도시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셨습니까?”
“취미야. 내가 좀 별나서. 한곳에만 머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녀는 당차고 씩씩했으며, 그 성격에 걸맞는 취미로 여행을 즐겨한다고 했다. 그녀의 여행담을 들었을 때, 나는 세상이 그렇게 넓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혹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뭔데?”
함께 머무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내가 가진 고민을 털어놓았다. 세상을 여행한 그녀는 혹시나 내가 원하는 해답을 알지도 몰랐기에, 나는 초조해하며 그녀가 대답해 주길 기다렸다.
“흠…….”
“역시 방법은 없는 걸까요?”
“아,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세계수라는 존재는 참 독특하구나. 나중에 꼭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봐야겠어.”
“꼭 한 번 들려보시죠. 좋은 곳입니다.”
“한동안은 무리라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아 참, 방법이 없냐고 물었지?”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보자, 나는 희망이 샘솟음을 느꼈지만, 아쉽게도 그녀도 그 방법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혹시 그 녀석들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네.”
“그 녀석들이라뇨?”
하지만 그녀는 재빠르게 나에게 한 가닥 동아줄을 던져 주었다.
“용(龍). 용들이 사는 산맥에 간다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