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96화 (9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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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증거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친근하게 인사해 온 적이 있는가.

그런 경우, 보통 외면하기보단 ‘혹시 전에 통성명까지 했었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건가?’라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마련이다. 상대방은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 못 하면 민망하잖아.

사족으로, 아는 사람인 줄 알고 큰 소리로 인사했는데 민망한 경우도 있고.

그래서 나는 혹시나, 진짜로 혹시나 지금 내 이름을 외치며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있는 이 괴상한 오드아이의 엘프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다.

“으헝헝. 위그드라실 님!”

『저기, 으음……. 네. 반가워요. 그런데 음…… 성함이…….』

“살아계셨군요. 으흑.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접니다! 아라디온!”

아. 머릿속에 백열전구가 켜지듯, 추측이긴 하지만 그의 정체가 무엇일지 반짝하고 떠올랐다.

울면서 외치는 이름, 위그드라실.

그리고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연신 외치는 그의 사과.

그래. 그렇군. 이제 알았어. 어머니의 하이엘프였던 것인가? 근데 다 죽지 않았었나?

『혹시 네가 말하는 위그드라실이…… 미안하지만 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 같은데.』

“위그드라실 님!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한 건, 이 세상에 유일한 단 한 사람, 위그드라실 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라고. 나야 어머니 따라서 세계수니까 가능한 거고.』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변한 엘프, 아라디온. 방금 전까지 울던 표정이 한순간에 경극처럼 휙하고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참 감정이 다채롭구나.

“하하…… 위그드라실 님, 농담도 참. 위그드라실 님이 아이가 있을 리 없잖아요. 결혼도 안 하셨는데.”

『……어머니 결혼하셨는데. 결혼하셨으니까 내가 있지.』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내 말 따윈 듣고 있지 않다. 저건 전형적인 현실회피자들이 짓는 표정이니까.

응? 어떻게 아냐고? 나도 한때 저랬으니까 알지.

“위그드라실 님이 결혼을 하실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무이신 데다가, 다른 세계수는 있지도 않은데.”

『……어머니 용이랑 결혼하셨어.』

“하하. 농담도…….”

『진짠데. 광룡이랑 결혼하셨어.』

갑자기 핀을 향해 고개를 돌린 녀석은, 사나운 표정으로 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노와 질투, 시기가 담긴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눈빛이라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녀석, 지구였으면 100% 연기자가 됐을 녀석이야. 어디 유명한 시상식에서 대상까지 받을.

“이제야 알겠군! 네 이놈! 위그드라실 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갑자기 나는 왜!”

억울하다는 듯이 핀이 소리쳤다.

“네놈이 광룡이지 않느냐! 오호라. 이제야 알겠군. 그래. 모든 것이 설명됐어.”

이번엔 탐정이냐. 흥미롭군. 이 녀석의 추리를 한 번 들어보자.

“내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위그드라실 님은 마왕과 공멸하였다고 들었지. 하지만 사실, 위그드라실 님께선 살아계셨던 거야. 살아서 지난 천 년 동안 이 숲의 마기를 정화하고 계셨던 거지.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마침내 정화가 끝났지만, 힘을 소진하고 지쳐있던 그분에게 네 녀석이 나타나 마법을 건 것이렷다!”

“마법은 무슨 마법!”

“크흑. 분명 이러쿵저러쿵하는 마법을 마구 걸어댔겠지. 위그드라실 님은 아름다우시니까. 사악한 광룡 주제에 그분에게 자신과 결혼했다는 거짓된 기억을 심다니.”

흠. 각본가 해도 되겠어.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군.

“위그드라실 님의 그 존귀한 옥체를 떡 주무르듯이 만지면서 사악한 웃음을 지었을 게 분명해. 크흐흐. 넌 나만의 것이다. 나만의 인형. 아무도 널 가져가게 두지 않겠어. 네. 광룡님. 저는 광룡님만의 것이에요. 그래. 말을 아주 잘 듣는군. 그럼 다음 대화는 침실에서 해볼까? 좋아요. 광룡님…… 크아아악! 네 이놈!”

흥분한 녀석이 날 뛰기 전에 핀이 뒤통수를 때리며 바닥에 눕혔다.

경쾌하게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라디온이 바닥에 자빠졌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기운이 없는지 그대로 훌쩍이며 흙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위그드라실 님…… 크흑…….”

“……야. 나 여자거든? 내가 할머니랑 어떻게 결혼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난 그런 짓 안 해!”

하지만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힌 아라디온에게 핀의 말은 먼 곳에서 외치는 공허한 소리일 뿐이었다.

아까부터 울면서 계속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니 보는 내가 더 딱하다.

“위그드라실 님이 인질로……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덤비면 분명 저 사악한 광룡이 필시 위그드라실 님으로 협박을…….”

『……야. 그쯤하자. 핀. 이 녀석 데리고 나한테 와줄래?』

“아빠. 괜찮겠어요?”

『응. 아까부터 이 녀석, 친근하게 느껴져서 전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친근하다라…… 그건 저도 동의하지만……”

핀이 ‘미친놈 같아서 불안한걸요.’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꼭 미쳤다고는 볼 수 없지. 사람은 원래 큰 충격을 받으면 이런 증상을 보일 때가 있으니까.

아니 잠깐, 그게 미친 거잖아.

아직까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녀석을 등에 업고 핀과 곰, 필로우가 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방금 전까지 핀과 싸웠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저항할 기력조차 없는지 아라디온은 얌전히 핀에게 업혔다.

업혔다기보단, 짐짝처럼 들쳐 맸다는 표현이 어울리겠군.

“아빠. 근데 이 녀석, 자기가 최초의 하이엘프라고 하던데 역시 할머니의 하이엘프일까요?”

『그래? 흐음. 역시나…….』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분명 하이엘프들은 어머니를 지키다가 마왕과 어머니가 공멸하는 순간, 그 폭발과 함께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살아남은 하이엘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니 아직 한 명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처음으로 이름을 받은 엘프는 지금 이곳에 없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받은 엘프.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그는 분명 대륙 너머로 여행을 떠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륙 너머의 세계엔 무엇이 있었기에, 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걸까?

나는 그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도, 그리고 모험가나 비루스 왕국의 병사들이 입고 있던 옷과도 전혀 다른 행색의 옷차림이었다.

그저 옷의 모양새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문화가 전혀 다르면 옷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큰 차이가 있었다.

근데 이러한 옷차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흠. 중국 사극에서 봤던 것 같은데. 대륙 너머에 중국식의 동양 문화권이라도 있는 건가?

“이제 좀 그만 징징대고 정신 좀 차려.”

내가 있는 곳으로 도착하자, 핀이 아라디온을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녀석은, 내 모습, 세계수를 보자마자 눈물을 훔치며 엉겨 붙었다.

“오오! 역시 살아계셨어! 크흑, 위그드라실 님…….”

『징그러우니까 좀 떨어져 줄래……?』

세계수를 보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걸 보니 뭔가 감회가 색다르다.

세계수인 나를 보고 기뻐하지 않을 종족은 없다. 특히나 인간들이 매우 기뻐하겠지. 하지만 그건 아라디온의 기쁨과 다른, 탐욕으로 인한 기쁨인 것이다.

비루스 왕국의 국왕 역시 그래서 이 숲에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었고.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르다. 역시 하이엘프라서 그런 걸까. 핀이나 다른 아이들마냥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진다. 물욕(物慾) 따위가 아닌, 순수한 기쁨.

순수하게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이란, 지켜보는 이마저 기분이 좋아진다.

“으헝헝. 역시 저 광룡 녀석의 마법에 당하신 겁니까! 세뇌에다가, 힘까지 요상망측한 마법으로 이렇게 작아지시다니! 제,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드리겠습니다!”

……근데 좀 과하니까 그렇다?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울며불며 매달리는 게 당하는 입장에서 엄청 부담된단 말이지. 내가 새디스트도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선 쓰지 않으려고 했던 ‘힘’을 쓰는 수밖에……! 광룡을 해치우면 정상으로 돌아오실지도 몰라!”

일단 이놈을 좀 멈추자. 이러다가 큰일이라도 낼 것 같다.

나는 마력 조작 연습용으로 사용하던 큼지막한 돌덩이를 가져와서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트렸다.

“끄악!”

『이제 그만하고 정신 좀 차려!』

다칠 정도는 아니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딱 적당한 충격이었나 보다. 아라디온 녀석은 머리에 난 혹을 문지르며 나를 억울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 어째서!? 역시 세뇌…….”

『그만! 그만 말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이런 식의 망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선, 상대에게 말할 틈을 줘선 안 된다.

말할 틈을 주는 순간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견고히 구축하기 마련이거든.

나는 천천히, 그리고 빠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인간시절 이야기나 전생에 관한 것은 빼고, 세계수로 태어난 이후의 나의 이야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내가 이곳에서 자라나 아이들을 만나고 자라왔던 이야기들을.

물론 아라디온 녀석의 성향을 생각해보건대, 용사라거나 인간들의 군대가 왔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생략해 버렸다.

“그럼 정말로 제가 알고 있던…… 위그드라실 님이 아니라는 겁니까?”

『이름은 같지만, 나는 어머니가 아니야.』

“위그드라실 님이…… 마왕과 함께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었습니다. 혹시나 숲이 정화되었다 길래, 그분께서 특별한 힘으로 숲을 되돌리신 건 줄 알았는데…….”

『으음. 미안.』

“그럼 혹시,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그 모습을 꼭 뵙고 싶습니다.”

『정령체? 흠. 못 보여줄 것도 없지.』

정령의 모습으로 변해 아라디온의 앞에 나타나자, 녀석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눈에 희열을 담고 있었다.

“저, 정말로 제가 아는 위그드라실 님이 아니신 겁니까?”

“아니라니까.”

“그분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나도 닮으셨습니다. 목소리며, 얼굴이며…….”

“나는 남잔데…….”

하긴, 어렸을 땐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비슷비슷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게다가 가족이니까 훨씬 닮았을지도.

아빠의 유전자는 머리에 들어간 옅은 검은색뿐인가. 아버지…… 유전자가 약하시군요.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옷 좀 벗어주세요. 그분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 이 변태 녀석이!”

핀이 아라디온의 목을 팔로 조르며 뒤로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참으로 애절하다.

이런 경험. 처음이야. 나의 벗은 몸을 보고 싶다니.

……물론 그게 어머니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지만. 잠깐 자아도취를 해버렸군.

뭐,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들어주지.

“자, 잘 봐라!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고! 이게 바로 그 증거다!”

훌러덩 옷을 벗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녀석에게 당당하게 그 증거를 보여주었다.

“아, 아빠!”

핀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아라디온이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나의 ‘특정 부위’로 향했다.

“그, 그것은…….”

“내가 남자라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리고, 아라디온이 고개를 떨궜다.

“‘증거’……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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