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95화 (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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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시끄러운 침입자(3)

‘그자, 수상하오.’

한시라도 빨리 위그드라실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달리는 와중에도 필로우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자의 말, 의복. 전부 소인의 지식 속에 담겨있는 것들이었소.’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복장의 옷. 그리고 ‘사술’이라는 단어.

필로우도 예전에 곰에게 했던 적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그의 주공인 위그드라실에게서 받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 행위였다.

‘좀 더 빨리 가야겠소이다!’

* * *

‘빨라.’

그동안 핀이 겪은 싸움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전에 침입한 모험가들의 전투나, 비루스 왕국의 병사들을 상대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지금 상대하고 있는 침입자, 아라디온과 가장 비슷했던 전투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자는 모험가였던 엘리사였다.

도적이었던 그녀의 은밀한 발걸음이나 은신술처럼 아라디온 역시 종적을 찾기 힘든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쫓기 힘든 수준은 아니야.’

이리저리 모기처럼 종적을 감추며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아라디온의 신형을 포착한 핀이 그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대로 팔을 붙잡은 뒤, 뒤에서 끌어안아 제압할 생각이었다.

“잡았다!”

분명 잡았다고 생각했거늘 아라디온의 손목은 손아귀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핀은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돌며 손등으로 공격을 쳐냈다.

“반응은 좋군. 하지만 그뿐이야.”

예리한 단검이 진동하며 울음소리를 떨어댔다.

손에서 단검을 놓칠 법도 한데 아라디온은 별로 타격이 없는지 그대로 핀의 주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미안하지만, 다 보인다고.”

현란한 움직임 속에 잔상이 남는 굉장한 속도였지만 핀에게 그의 움직임은 모두 보이고 있어서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정면. 피하지 말고 그냥 조금 다치더라도, 공격하자.’

핀은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아라디온을 향해 다리를 뻗어 그대로 찍어 눌렀다.

물론 머리를 정통으로 찍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노린 공격이었다.

그녀의 힘을 생각하면 어디를 공격하건 보통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필로우가 경고한 대로 아라디온이 이 정도 공격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정도 공격에 죽으면 하이엘프라고도 할 수 없지. 할머니 곁에 있었더라도 지켜주지 못했을 거야.’

세차게 땅을 찍어 누르는 핀의 발 아래로 지면이 쩍하고 갈라졌다. 하지만 그 발바닥 아래에 깔려 있어야 할 아라디온의 신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말했잖아. 반응만 좋다고.”

“……?!”

갑작스레 옆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 섬광에 핀의 목덜미에 붉은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다.

날카로운 고통에 핀은 목을 부여잡으며 재빠르게 몸을 놀렸다.

“분명 정면으로 오고 있었는데…… 어떻게 한 거지?”

“적에게 그런 걸 말해줄 것 같냐.”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아라디온은 공격을 멈추고 입가를 씰룩이는 것이, 입이 근지러운 티가 만연했고 곧 입을 열어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뭐, 어차피 알려준다고 해도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니 알려 줘볼까. 그 편이 더 좋을 테고 말이야.”

빈정거리며 단검을 손에서 놀리던 아라디온은 갑작스럽게 핀에게 접근하며 오른쪽에서부터 사선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핀이 팔을 뻗어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분명 오른쪽에서 날아오던 공격은 사라지고, 반대로 왼쪽에서부터 사선으로 그어지는 공격에 어깻죽지를 베이고 말았다.

“윽…… 대체 무슨……?”

“허초(虛初)라는 거야. 공격하는 척 하면서 반대로 다른 쪽에서 공격한다고 할까? 거짓 공격 속에 진짜 공격을 섞어 넣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군. 방금 전처럼 말이지.”

다시 뒤로 물러난 핀. 목덜미와 어깨를 감쌌던 손에 옅은 피가 묻어 있었다.

‘강해. 상처를 입을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신체 내구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핀은 지난번에 모험가 대장과 싸운 이후로 처음으로 피를 흘려 당황하였다.

모험가 대장은 혼신의 힘을 다한 사력의 공격이었으므로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충분히 그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라디온은? 그저 평범한 공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걸까?

무기에 특별하게 강한 마력이 감도는 것도 아니다. 처음 공격을 받아쳤을 때 생긴 충격으로 검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특히나 너처럼 반응속도가 좋은 녀석일수록 더욱 효과적이지. 사람은 말이야,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있거든. 내가 가짜로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너의 몸은 그 공격을 막기 위해 행동할 거야. 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또다시 공격해오는 아라디온. 이번에는 속지 않으리라 다짐한 핀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막기보다 다른 측면에서 다가올 공격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너는 이미 내 말을 듣고 허초(虛初)에 속지 않으려고 할 테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공격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오던 공격이 그녀의 몸을 베었다.

다행히도 팔뚝을 스치는데 그쳤지만, 깊게 베인 것인지 붉은 피가 샘처럼 솟아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허초(虛初)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지.”

“과연, 무섭네.”

방금 전까지 상처가 생겼던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팔뚝의 상처가 핀이 마력을 끌어내자 순식간에 아물더니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볼 땐 네가 더 무섭군. 그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하다니…….”

“하이엘프라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게 당연할 리가 있나. 아물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 속도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용족인 네 녀석만 가능한 짓이로군. 괴물 같으니라고.”

“하이엘프라니까…… 됐어. 이제 더는 설득 안 해.”

힘껏 끌어올린 마력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핀. 용의 모습까지는 변하지 않았지만, 석류처럼 붉게 물든 눈동자와 뱀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아라디온을 노려보았다.

“나도 이제 화났거든?”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들고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을 고쳐 쥔 아라디온이, 자세를 잡고 핀에게 외쳤다.

“그럼 나도 본격적으로 가지.”

* * *

“곰.”

“곰.”

「왜 그러냐.」

풀밭에 누워 하늘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곰. 그들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려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았다.

“저기 저 구름 보여?”

“곰.”

「똥같이 생겼다.」

“그지? 나만 그렇게 보인 거 아니지?”

“곰. 곰.”

「내 눈에도 똥처럼 보인다. 장이 건강한 사람만 쌀 수 있는 바나나 똥.」

“거기까지는 생각 안했는데. 너 정말 더럽구나.”

“곰!”

「주인님이 먼저 말 꺼내놓고!」

……참으로 할 짓 없는 두 남자의 한심한 대화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주공! 주공!”

그런 느긋한 공기를 뚫고 숲에서 등장한 필로우의 다급한 외침에 곰과 위그드라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목욕을 하러 갔거늘, 어째서 이런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것일까.

그 괴리감에 두 남자는 긴장하며 필로우가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왜 그래. 필로우. 핀은 어디가고?”

“주공! 침입자가 나타났소이다!”

“뭐!?”

* * *

“으으.”

“뭔가 보여줄 듯하더니 아무것도 없었나?”

“시끄러워. 쫑알거리지 마.”

“힘으로 안 되니 입으로 이기려하는군. 왜? 입으로 싸우시게? 싸워봐. 쳐봐. 자. 빨리.”

핀과 아라디온.

두 엘프 모두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로를 경계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핀이 입고 있던 옷이 여기저기 잘려 있어서 둘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냥 확 두들겨 패버려?’

확실히 본신의 힘을 다 끌어낸다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허초니 뭐니 해도 결국 힘으로 짓누르면 끝나는 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힘을 다 끌어냈을 때 실수로라도 죽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죽이기엔 상대의 신분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왜? 입으로도 날 못 이길 것 같나? 에고. 이거 아까워서 어쩌나. 하이엘프? 풋. 네가 하이엘프면 나는 엘프들의 신이다.”

‘으으. 할머니. 정말 저런 놈이 할머니의 첫 번째 하이엘프인 건가요.’

촐랑거리며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말투. 그리고 말하면서 입을 비쭉 내밀며 상체까지 함께 내밀어주는 행동.

저런 촐싹거리는 녀석이 최초의 하이엘프라는 사실이 핀은 믿기지 않았다.

‘혹시 가짜 아니야? 눈도 한쪽만 파란색이고.’

그러나 가짜 취급하기엔, 아까 몸속으로 흘려보내 준 마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냐. 내 특별히 대답해 주지.”

주먹을 불끈 쥐는 핀. 손등에 난 실핏줄이 그녀가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대신 말해주었다.

“아까 전에 내 마력을 정밀하게 봐준다고 했을 때, 그때 해칠 수도 있었는데 왜 해치우지 않은 거야?”

“…….”

아라디온은 방금 전까지 촐싹거리던 입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래. 내가 왜 안 그랬지? 그렇게 했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아도 쉽게 결판을 낼 수 있었는데.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싸움을 멈추고 골몰했고, 곧 해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다.

왜 그럴까. 소중한 분의 숲을 더럽힌 녀석 일진데, 밉지 않다.

오히려 친근한 감정이 자꾸만 샘솟아 공격에 망설임이 생겨 급소를 베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그곳에서 배운 힘들을 사용한다면…….

‘사술이다! ……이런. 나도 그곳에 너무 물들었나 보군.’

말도 안 되는 감정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핀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한 그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을 내겠다며 단검을 휘둘렀다.

‘허초라고 생각하고 피하지 않는 거냐.’

핀은 다가오는 단검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허초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아라디온의 몫. 이번 공격은 허초가 아니었고 그의 단검이 핀의 몸을 베었다.

“잡았다.”

“……!”

하지만 검이 채 그녀의 살을 베고 빠져나오기 전에, 그녀가 먼저 단검과 함께 그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말한 대로, 내가 좀 빨라.”

“큭!”

“자, 이제 각오해야겠지?”

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아라디온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올라가는 핀의 주먹을 보며, 그녀의 발차기가 만든 땅의 균열을 봤을 때 맞으면 한 방에 끝난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쩔 수 없군. 쓰는 수밖에.’

『핀! 괜찮아!?』

하지만 그 때, 필로우에게 막 연락받은 위그드라실이 핀에게 말을 걸었다.

승부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핀을 걱정하여 말을 건 것이었지만, 아라디온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순간 환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빠. 이제 다 끝냈어요.”

『응. 다 끝난 것 같아 보이네. 근데 설마 때리려고?』

“이 녀석. 생각보다 강하…… 다고 해야 하나. 이상한 녀석이라 마무리를 지어야겠어요.”

『으음. 굳이 안 때려도 될 것 같은데. 울고 있잖아.』

“네?”

핀에게 팔을 붙잡힌 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라디온. 그의 입에서 기쁨, 그리고 슬픔이 함께 묻어나온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위그드라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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