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94화 (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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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시끄러운 침입자(2)

핀은 위그드라실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모두 추억이고 삶의 기쁨이었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을 꼼꼼히 떠올려 봤지만, 그 어디에도 이 눈앞의 침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아빠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름을 지어준 엘프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핀은 자신이 만났을 때의 위그드라실이 작고 연약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보다 이전이라고 한다면 훨씬 약했을 터인데, 과연 하이엘프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단 한 가지.

“거짓말. 아빠의 첫 번째 하이엘프는 나라고!”

“아니, 왜 자꾸 위그드라실 님을 아빠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분이 또 어디 있다고.”

“아빠가 예쁘고 여성스럽긴 하지만 엄연히 남자라고. 너야말로 아빠를 여자취급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위그드라실 님은 남자취급하지 말아주시죠!”

“이 바보 멍청이가!”

“누구보고 바보 멍청이라는 겁니까! 바보 멍청이 눈에는 바보 멍청이밖에 보이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이게!”

“말로 안 되니까 또 때리시게요? 때려봐. 때려봐요! 이 폭력녀 같으니라고.”

“다들 진정하고 싸움을 멈추시오! 말이 서로 맞지 않으니 확인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유치한 말싸움을 진행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필로우가 간신히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이미 흥분한 그들의 귀에는 필로우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당신 같은 제멋대로인 엘프와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하이엘프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나 하이엘프 맞거든?”

“당신한테서 확실히 그분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거리에서 느끼기엔, 물에 불순물을 탄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마디로 순수하지 않고 돌연변이 같다 이겁니다.”

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이자, 순수한 정체성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내가…… 돌연변이라고?”

“위그드라실 님의 마력 외에 다른 마력이 섞여 있으니, 돌연변이라는 말보단 혼혈이라는 편이 더 어울리겠군요.”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이 침입자는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핀에게 경로를 차단당하자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의문을 표했다.

“아니, 왜 자꾸 막는 겁니까. 일부러 동료들도 내버려 두고 힘들게 달려왔거늘. 방해하지 마십쇼.”

“잠깐만 기다려 줘. 아까 확실한 게 아니라고 했지?”

“멀리서 느낀 바로는 그렇지만, 만져보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마, 만진다니!”

필로우가 옆에서 끼어들자, 침입자의 이마가 아까보다 더욱 찌푸려졌다.

“무슨 상상하시는 겁니까. 그냥 손 정도만 만져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한 번만 내 마력을 다시 살펴봐 줘.”

“제가 뭣하러…….”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핀의 모습에 침입자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처음 만났지만 핀이 자존심이 강하고 무례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설마 이런 식으로 사과할 줄은 몰랐다.

“아까 일은 미안해.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끄응…….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적어도, 나한테는.”

침입자가 핀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진심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체 왜 이렇게 간절한 것일까. 침입자는 바쁜 와중이었지만 잠시 도와줘도 되겠다며 마음이 기울었다.

“그럼 손을 내밀어 주시죠.”

“고마워!”

“뭐, 별일이라고.”

가느다란 핀의 손목을 잡고, 침입자는 미리 어떻게 기운을 조사할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지금부터 제 마력을 당신에게 흘려 넣을 것입니다. 겉으로 느끼고 확인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할 수 있죠.”

“알았어.”

괜찮다는 듯이 걱정 없이 말하는 핀의 말투가 어딘지 거슬렸던 것일까. 침입자는 잠시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핀을 보며 물었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아무 걱정도 안 되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

“상대의 몸에 마력을 흘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거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안 그럴 거잖아.”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같은 하이엘프니까. 그리고…… 너랑 싸우긴 했지만, 나쁜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어째서, 라고 묻고 싶었지만 침입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맞기도, 티격태격하며 말싸움까지 벌였지만 친근한 느낌을 처음부터 받고 있었다.

과거, 위그드라실이 이름을 준 다른 하이엘프들 보다도 훨씬 더.

마치 가족과 같은…….

“그럼 잠시 실례.”

핀의 손목을 잡은 침입자가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혹시나 침입자가 돌변할까봐 곁에서 필로우가 지켜보고 있었다.

‘따뜻하네.’

처음 침입자의 마력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핀이 느낀 감정은 ‘따뜻하다’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느낌은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가시감이 들어서 그녀는 그것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아. 할머니의 마력.’

자신의 마력과 다른, 순수한 세계수의 마력에 대해 이제야 생각난 핀.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녀는 어째서 침입자가 자신에게 하이엘프가 아니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의 마력은 할아버지의 마력이 섞인 거였지.’

핀은 순수한 세계수의 마력에 광룡의 마력이 더해진 것이 바로 아빠인 위그드라실의 마력임을 깨달았다.

거기에, 광룡에게 직접 마력을 건네받은 자신의 마력은 훨씬 더 세계수의 마력에서 멀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그럼 나는 하이엘프가 맞구나.’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하이엘프가 맞다는 사실에 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녀의 하이엘프에 대한 집착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에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되자 그녀는 마음을 누르고 있던 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그렇다면 이자는 아빠의 하이엘프가 아니라 혹시…….’

핀이 알고 있는 세계수는 단 두 그루뿐. 자신의 아빠인 위그드라실, 그리고 과거 용사들의 책략에 의해 이미 마왕과 함께 사라진 할머니인 또 한 그루의 세계수뿐.

‘할머니의 이름도 위그드라실이었잖아!’

그렇다면 이 침입자는 과거의 세계수인 할머니의 하이엘프였던 것일까? 그것도 최초의 하이엘프?

그러나 할아버지인 광룡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눈이 한쪽만 파란색이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그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자 핀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목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그를 보자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잠시 후, 침입자가 핀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감았던 눈을 열었다.

“…….”

“끝났어?”

“끝났지. 그렇군. 네가 바로…….”

갑자기 품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며 핀을 공격하는 침입자. 핀은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그의 검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갑자기 왜!”

“네가 바로 소문의 광룡이렷다!”

“뭐?”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마라!”

단검을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피가 얼굴에 쏠려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 있었고, 척 보기에도 매우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네 안에 깃든 그 마력, 과거 여행하면서 만났던 용들과 똑같은 마력이었어. 하이엘프가 용의 마력을 지닐 수 없으니, 그렇다면 네놈은 용이 변신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세계수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필시 사술이렷다!”

“아니! 오해야!”

“오해? 네 녀석이 소문의 광룡이 아니라는 것이냐?”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핀. 침입자의 말에 반박하려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소문의 광룡이 자신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꾸물거리지?”

“그게…… 헤헤. 생각해 보니 내가 소문의 그 광룡이였네.”

“이젠 농락까지!”

“으앗! 저기 오해라니까!”

핀의 주변을 뛰어다니며 허점을 찾아 공격하는 침입자.

침입자는 더 이상 말로 설득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잠시 숲을 떠난 동안 그분을 지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거늘, 숲이 정화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양손에 단검을 쥔 침입자가 핀의 후위를 점하며 재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핀의 반응속도로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른 공격이었고, 스치듯 지나간 검에 핀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휘날렸다.

“그런데 그 신성한 땅을 지배하려 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아씨!”

“난 괜찮아. 필로우. 내가 해결할게.”

필로우가 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조심하시오. 저자, 예사롭지가 않소이다. 소인의 덫까지 피해서 숲에 침입한 자요.”

지난번 비루스 왕국의 군대가 침략하고 난 이후로 필로우는 전보다 훨씬 꼼꼼하게 숲에 마력의 실을 설치해 두었었다.

그 실은 전보다 더욱 뛰어나고 강해져서, 일반 동물들은 지나갈 수 있지만 인간 정도 되는 종족이 지나가면 바로 필로우에게 느낌이 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입자가 들어왔는데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필로우는 잘 알고 있었기에 핀을 걱정하고 있었다.

“으응. 알았어.”

“거기에 저자, 소인과 비슷한 느낌이 드오. 중간 중간에 나온 단어며…….”

“필로우. 부탁이 있어. 지금 바로 뛰어가서 아빠한테 알려줘. 아마 모르고 계실거야.”

“알았소이다!”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필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재차 공격해 오는 침입자를 피해 핀이 몸을 움직였다.

침입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분노가 식지 않았고, 이제는 금방이라도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빠가 오시면…… 오해가 풀릴지도?’

위그드라실이라면, 비록 광룡의 마력이 섞였을지언정 침입자가 진정하고 오해가 풀릴 것이라 생각한 핀은 그때까지 침입자를 상대로 버티기로 결심했다.

그와는 딱히 싸우거나 상처 입힐 마음이 없으니 그의 공격을 피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나, 위그드라실 님의 첫 번째 하이엘프. 아라디온이 네 녀석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래도, 역시 오해가 있었다곤 해도 조금은 화가 나는 것은 상대가 연신 몰아붙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인물임은 알고 있지만 재차 위그드라실의 첫 번째 하이엘프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걸까.

그 꺼림칙함을 떨쳐내기 위해 핀이 침입자, 아라디온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빠의, 위그드라실의 첫 번째 하이엘프. 핀이 상대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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