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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시끄러운 침입자(1)
“아빠.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필로우. 잘 부탁한다.”
“소인에게 맡겨주시오.”
핀과 필로우가 내게 인사하고 숲으로 사라졌다.
환하게 웃으며 마실 나가듯 숲으로 향하는 핀은 최근 일로 인해 마음 고생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럼 나도 단련이나 해볼까. 곰, 할 일 없으면 좀 도와줄래?”
“곰!”
「할 일 있다!」
“……뭔데.”
“곰.”
「명상.」
“……이라 말하고 결국엔 잔다는 거잖아. 시끄럽고 좀 도와줘.”
“고옴.”
「귀찮지만, 특별히 해준다.」
피가 끓는다. 이것이 아들놈이란 존재의 위력인가. 말 더럽게 안 들어먹는구나.
돌 대신에 네 녀석의 머리를 부수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그래도 해준다니 내가 참는다.
“자, 그럼 곰. 던져!”
“곰.”
곰이 던지는 바위들을 마력으로 공중에서 묶는 것이 내가 새롭게 시작한 수련법.
순간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생각해 낸 비책이다.
수련은 나름 성과가 있었다.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능숙해지고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드렌 왕자를 따라잡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친다.
응? 근데 핀이랑 필로우는 어디 갔냐고?
……목욕하러 갔다.
“휴우. 근데 얘들은 언제쯤 오려나.”
“곰. 곰.”
「여자들은 쓸데없이 오래 씻는다. 일몰쯤에 올지도 모른다.」
“곰. 넌 지구가 아니라 여기서 태어난 걸 천운으로 여기렴. 지구였으면…….”
나야 뭐 자주 씻을 일이 없으니 목욕을 하지 않지만, 곰은 지난번에 씻은 후로 딱히 목욕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모양이다.
본인이 말하길, 한 번 쓴 개그를 다시 쓰는 것은 개그맨의 수치라나 뭐라나.
이 자식. 진짜로 곰탕드립하려고 목욕한 거였냐…….
그런 이유도 있고, 목욕을 즐기는 듯한 핀과 필로우가 더 이상 욕조에서 씻지 않고 직접 온천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오는 길에 욕조에 물을 담아달라고 하기엔, 그다지 자주 씻지 않아도 되는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 내가 거부했다.
“근데 핀 녀석. 왜 갑자기 따로 씻으려고 하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욕조에 물을 받아와서 다 같이 씻자고 했어야 정상인데. 어째 처음에 같이 목욕한 이후로 계속 따로 씻고 있다.
흠. 설마…… 아니겠지?
“뭐, 그런 고로 남자들만 이렇게 따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지.”
“곰.”
「아까부터 혼자 뭐라고 하는 거냐.」
“그냥…… 심심해서 중얼거려 봤어.”
“곰.”
「수련은 이제 끝이냐.」
으음. 마음 같아선 이쯤하고 끝내고 싶지만, 나무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이거 큰일이다.
핀이 따로 목욕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엔 별말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내게 부탁을 해왔다. 그 부탁은 바로…….
“아빠. 제가 목욕 중일 때는 정령의 모습으로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나야 딱히 문제될 건 없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이거 백퍼센트 그때 내 꿈을 본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성에 눈을 뜬 아이처럼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거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목욕하자던 아이가 이제는 다 큰 어른처럼 따로 하겠다니!
크으윽. 밉다. 성에 눈 뜨게 만든 일등공신인 필로우와 곰이 밉다.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지 못한 내가 밉다. 그날 밤, 성욕도 없으면서 야한 꿈을 꾼 내가 밉다.
“크아악! 이건 분명히 봤다고!!!”
“고옴…….”
「갑자기 웬 난리 법석이냐.」
“시끄러워. 너희 때문에 내 인생에 흑역사가 생겨 버렸잖아.”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혀를 차던 곰이 뭔가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곰. 곰.”
「인생(人生)이 아니라 목생(木生)이다.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이거나 그거나. 으으. 잊고 싶다. 이 기억을 누가 잊게 만들어줘.
* * *
“응?”
“왜 그러시오. 아씨?”
“아니, 아빠가 괴로워하시는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알 수 있소이까?”
“헤헤. 딸이잖아.”
핀과 필로우가 온천에 몸을 담그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천은 쉴 새 없이 데워지며 김을 피워냈고, 물에 잠기지 않은 핀의 상반신은 김 덕분에 물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어도 몸을 적신 듯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오. 아씨께서도 이제 몸의 소중함을 깨달으신 모양이구려.”
“으응. 그냥…… 아직도 아빠랑 같이 하고는 싶은데…….”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상체까지 물속에 깊숙이 집어넣는 핀. 코 바로 아래까지 푹 몸을 담근 그녀의 얼굴은 열 때문에 빨간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아씨?”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필로우는 핀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과는 이렇게 남녀가 따로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하아. 뜨거워.”
“너무 열기를 오래 담고 있으면 몸에 무리가 가옵니다. 소인처럼 중간중간 나와서 쉬시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핀과 필로우가 온천에서 몸을 씻고 있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둘은 귀를 쫑긋 세우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필로우. 들었어?”
“소인도 들었소이다.”
보통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는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 먼 곳에서 전해져오는 소리의 진동을 잡아낸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아씨.”
“왜?”
“어째, 다가오는 소리가…… 주공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사오만…….”
핀보다 조금 더 청력이 좋은 필로우가 의문을 표했다.
핀도 곧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 내용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 니이이임!!!”
“어? 진짜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소리가, 수풀을 헤치는 부스럭 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의 정체가 핀과 필로우가 있는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엘프!?”
나무 위를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며 재빠르게 이동하던 소리의 근원이자, 숲에 침입한 침입자의 정체는 바로 하이엘프였던 것이다.
침입자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내리쬐는 태양빛처럼 밝은 금발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긴 귀는 침입자가 엘프라고 증명해주고 있었고, 체격이 크지 않았지만 몸에 딱 맞는 의복 아래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이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순간, 하이엘프라고 알 수 있었던 침입자의 푸른 눈동자를 본 핀은 양쪽 눈이 모두 파란색이 아님을 뒤늦게 알아챘다.
정확히는 오른쪽 눈만 파란색이었고, 왼쪽 눈은 평범한 엘프처럼 녹색이었던 것이다.
“어!?”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던 침입자 엘프. 그러나 자신을 경계하던 핀과 필로우를 발견하고 이내 흙먼지를 풍기며 바닥에 급제동을 걸며 멈추었다.
“어…….”
멍하니 침입자가 우두커니 서서 둘을 마주보았다. 핀을 보고, 필로우를 내려다보는 것을 반복하던 침입자는 곧 무언가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훔쳐봐서 죄송합니다.”
“……?”
핀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초. 그리고 3초 뒤…….
“꺄아아악!!! 이 변태!!!”
“저, 저기! 진짜로 실수였는데에에에!!!”
숲을 뒤흔드는 비명소리와 함께, 핀의 주먹에 의해 침입자가 왔던 길로 다시 날아가 버렸다./음, 뭔가 등장이 정석적이지 않나 싶습니다만……. 가끔은 고전적인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 * *
“저기, 소저, 가 아니라 아가씨. 미안하다니까요.”
“으으. 고개 돌려!”
“넵.”
오른쪽 눈처럼 파랗게 멍든 눈을 손으로 주무르며, 침입자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옷을 다 차려입은 핀은 침입자를 분노와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빠한테도 부끄러워서 못 보여주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한테 보여 버렸어…….”
“아씨. 저놈을 묻어버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필로우. 거기까지는 좀…….”
“저런 변태들은 땅에 묻어 양분이 되게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되오만.”
필로우의 말을 들으며 핀은 무릎을 꿇은 침입자를 지켜봤다.
침입자는 주먹에 맞은 눈두덩이 많이 아픈지 살짝 훌쩍거리며 그곳을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침입자를 보며 핀이 떠올린 생각은, 혹시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퍼지게 만든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숲 밖으로 나가보질 못했으니 소문이 어떻게 됐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고, 만약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짓이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뛰어넘는 더 중요한 것. 침입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핀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쪽 눈만이 파란색인 오드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가 진짜로 하이엘프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침입자에게선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던 것이다.
“저기, 근데 너는 누구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오히려 핀에게 정체를 되묻는 침입자. 핀은 자신의 정체를 광룡으로 소개할지, 아니면 하이엘프로 소개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상대의 정체를 알기 위해선 후자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난 보다시피 하이엘프야. 이 숲에서, 세계수를 지키고 있지.”
“세, 세계수! 그렇다면 역시!”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다가온 침입자. 그는 아래에서 핀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역시! 위그드라실 님께서 살아계신단 말입니까!”
“어…… 응. 그런데 어떻게 아빠를?”
“오오! 위그드라실 님!!!”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침입자의 아래로 떨어진 눈물이 고여서 웅덩이가 될 지경이었다. 핀은 침입자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미친놈에게서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공포였다.
“너, 아빠를 알고 있어?”
공포심을 잠시 억누르고 핀이 침입자에게 물었다.
마구 흘려대던 눈물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지만, 눈가가 붉고 팅팅 분데다 아까 맞아서 부어오른 눈은 거의 사과정도 되는 크기로 부어있었다.
“아빠라니. 위그드라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위그드라실 님이 왜 아빱니까. 아니, 그것보다 하이엘프들을 많이 봤었지만 당신은 처음 보는데 설마 제가 숲에 없는 동안 새로 들어온 엘프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빠한테 하이엘프는 나밖에 없어!”
“아니, 그거야말로 무슨 소립니까. 위그드라실 님한테 하이엘프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자아도취도 그 정도면 병입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아빠의 처음이자 유일한 하이엘프인데!”
“유일? 유일 좋아하시네! 누가 그럽니까!”
말싸움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슬슬 전투로 진입하려는 분위기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필로우가 둘 사이를 중재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진정하시구려. 싸우지 말고 차근차근 대화로 푸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씨, 변태양반, 둘 다 진정하시오.”
“후우. 그래. 네 말이 맞아 필로우.”
“누가 변태양반이라는 겁니까?”
잠시 호흡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힌 두 사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침입자였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당신이 최초의 하이엘프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게 왜 말이 안 되는데?”
“왜긴요. 위그드라실 님 최초의 하이엘프는 바로…….”
그리고 곧바로 나온 침입자의 발언은 핀도, 필로우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바로 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