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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온천은 역시 함께해야지
“그럼 다 같이 목욕이나 해볼까.”
온천에 들어가려면 우선 옷부터 벗어야지. 나는 옷 아랫자락을 잡고 그대로 끌어올려 옷을 벗으려고 했다.
“히익.”
“응?”
그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옷을 벗으려던 것을 멈추고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필로우.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외다.”
이상한 소리를 낸 주범은 바로 필로우. 필로우는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뭐, 살다보면 이상한 소리도 좀 낼 수 있지.
가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상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경우도 있잖아?
남들에게 들키면 창피해서 모른 척하는 게 대부분이지. 나도 모른 척해 주자.
“히악!”
“……필로우?”
다시 옷을 벗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들려오는 필로우의 기괴한 신음소리가 탈의하는 것을 방해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필로우는 모른 척하기 위해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딴청 피우는 티가 굉장히 많이 나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모, 목에 침이 걸려서 소인도 모르게 그만. 크흠.”
“정말이야?”
“소, 소인이 거짓말을 하겠소이까!”
다시 옷을 걷어 올렸다.
“히약!”
내렸다.
“크흠.”
다시 올렸다.
“흐익!”
다시 내렸다.
“……날이 참 맑구려.”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반응이 귀엽잖아.
아무래도 필로우는 내가 옷을 벗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듯하다. 왜 그럴까. 다 같은 남자끼리.
……잠깐. 설마 아니겠지?
“필로우.”
“무, 무슨 일이십니까. 주공?”
“너 성별이 어떻게 되니?”
“소, 소인에게 성별은 없소이다. 주공을 모시기로 결정한 순간, 소인은 이미 암컷이길 포기하였소!”
“암컷…….”
굉장히 위험한 단어가 태연자약하게 나온 것 같다.
그래. 암컷이지. 동물이니까. 필로우가 인간, 또는 핀처럼 인간처럼 생긴 종족이었다면 위험했을 발언이군.
“아니오! 소인은 그저 무사일 뿐이오!”
이거 참. 내 안의 유치함이 끓어오른다. 빤히 속이 보이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을 보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후후. 어디 좀 놀려볼까.
“흠.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꺄아아악!!!”
나는 필로우가 눈을 돌리기도 전에 옷을 훌러덩 벗어버렸다. 가히 짱구와 비견될 속도로 빠른 탈의여서 나 자신도 살짝 놀랐다.
아. 기분 좋다. 옷을 벗으니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이야. 이것이 바로 자유인가.
그래. 인간은 역시 갓 태어난 모습으로 있는 게 제일이지. 노출증 환자들이 이래서 생기는 건가!
“아빠. 뭐해요?”
“그냥 잠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어.”
감옥에서 막 탈출한 앤디 듀프레인처럼 나는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음. 좋다. 좋아.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며 간지럽히는 것이, 바람으로 몸을 씻는 기분이라서 더욱 좋다.
“어, 어서 오, 옷을 입으시지요! 주공!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뭐 어때. 목욕할 건데 옷을 벗는 게 당연하잖아.”
기다란 두 귀를 팔 대신 삼아 눈을 가리고 필로우가 말했다. 후후. 재미있다. 재미있어.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그런지 더 재미있다.
“주, 주공!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하였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지만 남녀가 함께 옷을 벗고 목욕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으음. 욕조는 하나고, 옷을 입고 목욕을 할 수는 없잖아.”
“목욕을 따로 하면 되지 않소이까!”
격렬한 반응이다. 이렇게까지 격렬할 줄이야.
핀이 이랬다면 어째 이해하겠는데 토끼인 필로우가 이러니 딱히 목욕을 따로 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
“곰! 곰!”
「시끄럽다! 목욕 빨리 하고 싶다!」
곰이 필로우의 귀를 잡더니 욕조로 던져버렸다.
물 위로 떨어지던 필로우. ‘풍덩’ 하고 빠지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필로우는 물수제비처럼 물을 박차고 통통 튕기더니 욕조 가장자리에 멋지게 착지했다.
“소인의 귀를 함부로 잡지…… 히익.”
필로우는 말을 하던 도중에 나를 보더니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그리곤 얼굴이 붉어지더니 다시 귀로 눈을 가렸다.
“주, 주공.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소인은 상관이 없사오만, 아씨를 생각하셔야지요. 가족이라고는 하나, 아씨도 이제 다 큰 성인이 아니오. 남자와 함께 목욕을 하는 것은 싫어하실지도 모르옵니다.”
“나는 상관없는데?”
“아, 아씨!”
필로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전생의 인간의 가치관 그대로였다면 절대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핀과 함께 목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잖아.
근데 별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의 정령체의 모습이 다섯 살 어린아이의 모습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다지 알몸을 보이고 본다는 것에 대해 감흥이 없다.
어쩌면 모두의 종족이 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나무고, 핀은…… 애벌레인지 엘프인지 모르겠고, 필로우는 토끼, 곰은 곰이지 않은가.
뭐, 그런 거 없이 가족끼리 다 커서도 함께 목욕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었지 아마. 인터넷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걸 보면 정상적인 도덕관념으로선 무리였지만.
“어, 어쨌든! 남녀가 유별난데 어찌 함께 목욕을 하려 하시옵니까!”
“필로우.”
나는 필로우가 말하는 사이 몰래 등 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눈을 가리고 열심히 말을 하고 있어서인지 필로우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뒤에서 말을 건네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주, 주공?”
“에잇!”
“하아악!”
나는 필로우를 그대로 내 품에 껴안아 버렸다. 뜨거운 단발마가 한순간 흘러나왔다가 턱하고 끊어졌다.
“곰 말대로 그냥 들어가자고.”
“하악…… 아, 아니 되오 주공…….”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좋다. 살이 익을 만큼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은 것이 온도가 딱 적당하군.
“필로우. 어때. 따뜻하고 기분 좋지?”
“주, 주공의 품이 따뜻하기는 하, 하오만!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아니 그쪽 말고.”
필로우 이 녀석. 너무 당황했는지 내 말은 듣지 않고 있다. 혼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 망상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다.
“무, 무사로서 모시는 이를 사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공이 무사를 사모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것은 금단이란 말이오! 게다가 주, 주공에겐 아씨가 있는데! 소인이 어찌 아씨를 제치고 주공과 거사를 치를 수 있겠소이까!”
“아니, 피, 필로우? 거사라니…… 대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간거야!”
망상이 어디까지 진행된 거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잖아!
나는 필로우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몸을 붙잡고 흔들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필로우의 몸통을 잡는 순간, 필로우는 더욱 격렬하게 몸을 바동거렸다.
“아, 아니 되오! 주공! 아니 되옵니다!”
“피, 필로우! 가만히 좀 있어! 이러다가 빠져!”
이젠 정신을 차리게 하기 보단 이러다가 욕조에 푹 빠질까 봐 걱정이 돼서 필로우를 꽉 붙들고 있다.
제정신이라면 수영이라도 하겠지만, 이 상태라면 아래로 가라 앉아 물을 먹을 것 같다.
“흐아앙! 주, 주공!”
“필로우!”
“더 이상은 안 됏!”
* * *
“곰. 곰.”
「하아. 시원하다.」
욕조에 푹 몸을 담그고 아저씨처럼 이야기하는 곰 옆에서 있자니, 물에 녀석의 털이 둥실둥실 떠다녀서 얼굴까지 담그기가 뭣하다.
“곰. 곰!”
「주인님. 이 물 버리면 안 된다!」
“식으면 버려야지. 고인 물은 썩는다고.”
“곰. 곰.”
「목욕물은 두세 번씩 쓰고 난 뒤에 버리는 편이 좋다.」
우리가 무슨 물 부족 국가에 사는 줄 아냐. 아니, 그보다 완전 아저씨 마인드잖아.
“하아. 뜨끈하구먼.”
곰을 아저씨 같다고 할 처지가 아니군. 나도 아저씨 같은 감상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욕조에 기대어 몸을 둥실둥실 띄운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마력으로 짠 커튼 뒤에서 필로우와 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로우. 이제 좀 괜찮아?”
“무, 무사는 언제든 최상의 몸 상태라 괜찮소이다.”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기댔다. 몸 전체가 떠오르며 귀로 물이 들어가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푸른색의 마력으로 짠 커튼.
그것은 필로우가 이상한 망상을 하다가 내 품을 빠져나간 뒤에 만들어 낸 작품이다.
폭주한 필로우는 재빠르게 마력으로 실을 뽑아내더니, 능숙한 솜씨로 한 장의 멋진 커튼을 만들어 욕조를 가로질러 그것을 설치했다.
푸른색의 커튼. 하늘과 같은 옅은 푸른색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실크처럼 얇고 부드러운 커튼은 건너편이 보일랑 말랑하면서도 실루엣만 비쳐 보일 뿐,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커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곰.
“……야. 너 뭐하냐.”
“곰.”
「훔쳐본다.」
진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너, 그거 곰 인형 아니냐? 안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들어있을 것 같은데.
“훔쳐볼게 뭐가 있다고 훔쳐봐.”
“곰. 곰.”
「주인님이 그러고도 남자냐. 여자가 목욕을 하면 훔쳐보는 게 남자의 도리 아닌가.」
그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라 변태의 도리겠지. 남자를 전부 변태로 만들지 말아줄래?
“곰. 곰!”
「보일 듯 말 듯하다. 눈에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보일 것 같다!」
그건 좀 무리지 않을까. 슈퍼맨처럼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커튼을 뚫고 건너편을 보는 건 무리일 텐데.
“고오옴!”
「보일 듯 말 듯하니까 애가 탄다!」
“저기 곰?”
가느다란 목소리가 커튼을 바람처럼 통과하여 이쪽으로 넘어왔다. 핀의 목소리였다.
“고, 곰?”
「대, 대장?」
“너 혹시 훔쳐보고 있었니?”
커튼 너머로 핀의 실루엣이 보였다. 곰 바로 앞에 서서 말을 걸고 있다.
“고, 곰! 곰!”
「아, 아니다! 내가 뭐 하러 훔쳐보겠냐!」
“흐응. 정말? 화 안 낼게. 어차피 다 같이 목욕하려고 했잖아.”
“곰?”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
“곰.”
「훔쳐보고 있었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팔랑거리더니 순식간에 곰이 욕조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 짧은 순간, 핀의 주먹이 커튼을 뚫고 곰의 명치를 직격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밖으로 날아가 바닥에 뒹구는 곰이 말했다.
“고, 곰……. 곰.”
「고, 곰이 목욕한 물은…… 곰탕.」
개그를 하는 걸 보니 멀쩡하군. 잠깐. 너 설마 자꾸 목욕하고 싶어 했던 게 그 개그를 하고 싶어서였던 건 아니겠지?
“아빠!”
뚫린 커튼의 구멍으로 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핀. 어차피 다 같이 목욕하려고 했었다며. 굳이 날릴 필요까지는…….”
“훔쳐보는 게 남자의 도리라잖아요. 훔쳐보는 변태를 날리는 것도 여자의 도리예요.”
“아, 아씨! 구멍을 내시면 어떻게 하오!”
“필로우. 너도 아빠한테 인사해 볼래?”
구멍 너머로 필로우가 보였다. 또 다시 장난기가 발동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필로우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필로우!”
“흐에에엑!”
필로우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내가 생각했던 목욕과는 조금 달랐지만, 상당히 즐거워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