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90화 (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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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파란 하늘 아래에서

참으로 길고 바쁜 나날이었다. 모험가들이 숲에 찾아오고, 비루스 왕국의 드렌 왕자가 불을 지르고, 그 나라의 왕이 찾아와 핀이 물리치고, 죽은 자들을 위해 위령비까지 한숨도 쉬지 못하고 야생마처럼 달려온 느낌이랄까.

나무로 태어난 후로 이러한 일들을 겪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억 깊숙한 곳 주요 저장소에 단단히 틀어박혀 앞으로도 종종 떠오를 법한 사건들이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업무평가나 위에서 감사가 나온다고 일, 이 주 동안 죽어라고 야근하면서 영혼을 불태우는 생활을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 바쁜 생활을 계속 하다보면 삶이 피폐해진다. 인생의 활력소가 쭉 빠져나가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그래서 그런 한철의 바쁨이 지나가고 나면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왜 이 말을 하냐면…….

“아빠. 정말 저희끼리만 가도 돼요?”

『그래. 어차피 아빠는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는 걸. 아빠는 괜찮으니까 너희끼리 즐겨보렴. 이번이 처음이잖아.』

지난 번 위령비를 만들 때 우연히 만들어진 온천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 혼자서 외롭잖아요.”

『아빠는 인간이었을 때 몇 번 가봤는걸. 그러니까 아빠는 괜찮단다.』

온천.

따듯한 물이 지표면으로 솟아올라 고여 있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물웅덩이이자 피로를 푸는 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고의 자연 시설.

사우나와 더불어 이곳만큼 피로를 해소해 주는 곳은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응. 정말로 괜찮으니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깨끗이 씻고 와.』

“그럼 다녀올게요. 아빠. 몸조심하세요!”

『그래. 다녀와.』

“소인이라도 주공 곁에…….”

『아니야. 필로우도 다녀와. 나는 괜찮다니까.』

“으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소인도 아씨와 함께 다녀오겠소이다.”

조금은 나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다들 날 신경 써주니 가지 못한다 해도 마음은 행복하다.

“곰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가자. 주인님은 어차피 못 온다.」

곰 녀석…… 물론 내가 못 가는 건 맞는 말인데 꼭 그렇게 밉게 말해야겠냐. 아들놈은 키워봤자 속만 썩인다더니 그 말이 딱이다.

“고홈홈~♬”

「따뜻한 무울~♬」

『핀. 부탁이 있는데 저 녀석 최대한 아프게 좀 씻겨줘. 아주 털이 무색무취가 되도록 빡빡.』

“후훗. 아빠도 참. 알았어요.”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 숲으로 들어간다. 아쉬움이 남는지 자꾸만 핀이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늦췄다.

나는 정령으로 변해 핀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와.”

몇 번 더 뒤를 돌아보던 핀의 모습이 수풀에 가려져 사라졌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나무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내 몸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래간만에 나 혼자 남아 사색을 즐기는 시간이다. 가족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나 혼자만의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흐음. 그나저나……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줬던 무기가 나쁘게도 쓰일 수 있구나.”

비루스 국왕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생각하자 미치광이처럼 날뛰던 드렌 왕자가 떠올랐다.

태어나자마자 지팡이의 마법으로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왕자.

마법이 풀린 후 보였던 행동을 보면 비루스 국왕이 아니었다면 그 녀석도 꽤나 착한 녀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무서운 녀석이었지.”

나만 가능한 줄 알았던 주변 마력의 조종을 나보다 더 뛰어난 솜씨로 해결하던 녀석이었다.

만일 미친놈이 아니라 정상인이었다면 그날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역시 핀이 있었으니 우리가 이겼겠지?

아니지. 정상이었다면 우리랑 싸울 일도 없었을까.

“뭔가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네.”

전생의 나는 목표가 없었다. 가족을 사고로 잃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방 안에서 폐인처럼 지낼 뿐이었으니까.

그 당시 나의 하루는 하도 오래 잠을 자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기에, 다시 잠이 올 때까지 만화를 읽든 인터넷을 하든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는 것이 끝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딱히 큰 삶의 목표는 없었다.

그냥 핀과 곰, 필로우와 함께 숲에서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삶이 되어버렸고, 그 평범한 삶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을 작게 바랐을 뿐이다.

단조롭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삶. 그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거기에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흘러들어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상황이 마냥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핀이 벌인 일들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반복되던 삶이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럭비공처럼 통통 튀어간다는 것이 예측 불가능한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만 같다.

말하자면 모험심이 자극된다고 할까. 나무라 평생 모험 따윈 꿈도 못 꾸리라 생각했는데.

모험심이 자극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남겼던 무기들을 회수하는 일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용사들의 무기는 아직 존재하고 있었고, 벌써 두 개나 우연찮게 숲으로 굴러들어와 회수하였다.

“전부 회수하고 싶은데. 어머니의 유품인데, 어째 나쁜 일에 쓰일 것 같단 말이야.”

원래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비루스 국왕이 저지른 꼴을 보아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지금이야 다른 무기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지만, 나쁜 쪽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간 결국 나쁜 쪽으로 쓰이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 전에 그냥 회수하는 편이 좋을 듯싶다.

“하아. 이럴 땐 나무로 태어난 게 정말 불편하네.”

뭐, 회수하고 싶어도 나무인 나로 써는 전부 불가능한 목표에 불과하지만.

계속 생각하려니 머리가 복잡하네. 조금 쉬어볼까.

“쉰다니! 안 돼!”

쉬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순간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누워서 낮잠을 잘 뻔했다.

“연습해야지. 언제까지 애들한테 다 떠맡길 셈이냐. 연습하자. 연습!”

나는 양반다리로 앉아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마력을 조종해 들어올렸다.

“흐압!”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고 돌멩이를 부순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힘을 주었다.

돌멩이가 부들거리며 진동하다가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부숴졌다.

“이 정도는 쉬운데. 큰 건 어렵단 말이지.”

이번엔 정령체인 나보다 큰 바위를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들어올렸다. 드는 것 까지는 쉬웠지만 아까처럼 힘을 주어도 바위는 부서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찾는 것은 지금의 나로선 불가능하니, 나는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바로 내가 가진 힘을 최대한 단련하는 것.

“계속하다 보면 이 힘도 늘어나려나.”

드렌 왕자와 싸운 이후로 나는 아이들에게 보호만 받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을 단련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알기론, 내 힘을 단련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시간과 마력으로 내 자신이 성장하는 것. 나무인 나의 키가 자라날수록 마력을 다루는 힘도 능숙해지고 강해지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진짜 더럽게 단단하네.”

근데 언제 자라난단 말인가. 시간을 들여서 그때 드렌왕자만큼 강해지려면 적어도 백 년은 걸릴 것 같다.

마력을 흡수하여 자라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버지가 전해준 마력이나 어머니의 유품에서 얻은 마력 정도의 농밀하고 많은 마력이 아니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전해줬던 마력도 결국 어머니의 마력이니, 결론은 어머니의 유품을 찾지 않으면 나는 강해질 수 없다는 뜻.

첫 번째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 방법으론 강해질 수 없으니 결국 남은 것은…….

“일단 계속 바위들을 들어볼까.”

웨이트 트레이닝뿐이다. 마력을 다루는 이 힘이 근섬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훈련이라곤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별수 없지 뭐.

본체인 나무 상태일 때보다 정령 상태일 때 마력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렵다.

조금만 집중을 늦추면 나무로 정신이 돌아가 버릴 것만 같다.

운동이란 역시 어렵게 해야 제 맛이지. 그래야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많이 들고.

“하아. 지친다.”

열 개가량 들어 올렸던 바위들을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은 뒤, 나는 내 본체에 기대어 쉬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진전은 딱히 없다.

원래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하루 이틀해서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온다면, 헬스장에 가서 할인혜택으로 세 달치 회원권을 끊고 일주일 나간 뒤에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도 없었겠지.

“흐음.”

헬스를 처음 하는 학생처럼 팔에 힘을 주고 근육이 생겼나 확인하듯이, 마력의 힘이 강해 졌나 확인하고 싶어서 이마에 힘을 팍 주어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연한 일이라 금세 이마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운동이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었지 아마. 조금 쉬어볼까.

……절대 힘들고 하기 싫어서 쉬는 게 아니야.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지.

전문가라고 해봤자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지식이지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니 세상만사 고민하던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저 드넓은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은, 아무런 걱정 없이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땅에 발을 딛고 살며 앞일을 미리 걱정하는 게 무의미하달까.

……이러다가 득도하겠네. 산속에 살고 있으니 신선이라도 되려나.

푸른 하늘을 계속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딘가 흐릿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둥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회색빛의 저것은 대체 무엇일까.

잠깐. 저거 UFO아니야? 이세계에도 미확인 비행물체가 있었어?

“아빠!”

“핀?”

숲에서 뛰어오는 핀과 아이들. 핀은 벌이라도 서는 아이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 두 손을 따라 고개를 올려보니 아까 내가 발견한 미확인 비행물체가 하늘 위에 떠있었다.

“같이해요!”

핀이 손을 내리자 미확인 비행물체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것의 정체는 뜨거운 온천수를 담은 내부가 울퉁불퉁한, 투박하게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욕조였던 것이다.

“설마 여태 안 들어가고 이걸 만든 거야?”

“아빠도 같이해야죠.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하하…….”

내가 웬만해선 눈물을 안 흘리는데,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네. 이렇게나 나를 생각해 주는 아이들이 있으니…….

“소인도…… 으음…… 동의하는 바이오. 주공도 함께 하는 편이 즐거울…… 거라 생각하오.”

필로우가 더듬거리며 내게 말했다. 응? 왜 이렇게 더듬거리지?

“곰…….”

「빨리 들어가고 싶다…….」

정말이지 딸이 최고다. 아들이란…….

그래. 오늘 하루는, 우선 목욕이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고민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다면, 현재를 즐겨야겠지.

“그래 다 같이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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