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9화 (8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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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연민 그리고 소문

『핀. 사람들을 위해 위령비라도 만들어줄까?』

핀을 달래준 다음 날, 나는 고민하던 이야기를 핀에게 꺼냈다.

“위령비요?”

『그래. 죽은 사람들을 달래주는 방법이야. 죽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거지.』

핀을 위로해 주었지만, 아직 핀의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나는 그것이 병사들을 학살했던 것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저번에 내게 이야기했을 때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말투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가 핀에게 큰 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 판단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왜?』

“제가…… 죽였잖아요.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핀이 만들어줘야지. 위령비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사과하는 거야. 아빠가 시켜서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뭐,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죽은 이들에게, 자신을 죽인 자가 위령비를 세운다면 오히려 농락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게 아니던가.

만약에 원혼들이 핀을 원망한다면, 네가 죽여 놓고선 무슨 소리냐고 핀에게 따진다면 내가 나서서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럼 너희들에게 우리가 죽어줬어야 했냐고.

그들은 병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늙은 왕의 명령에 따라 숲으로 들어왔고, 그 명령은 보나마나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었을 거다.

그대로 계속 숲으로 들어왔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핀과 아이들을 잡기 위해 불이라도 지르지 않았을까?

거기다 핀이 아무도 죽이지 않고 그들을 봐줬다면, 지금의 숲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집념이란 매우 끈질기다. 거기에 죽이지 않고 봐줬다 하더라도 분명 부상자들이 나타났을 것이고, 전에는 명령에 따라 숲에 들어왔다면 다음번엔 복수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숲을 침략했을 것이다.

사람이란 원한에 민감하니까.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라는 말도 있잖아.

……무협지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감되는 말이다.

“네! 그럼 한 번 만들어볼게요.”

핀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역시 핀은 밝은 편이 어울린다.

“위령비라. 소인도 좋다고 생각하오. 본디 사람이 죽어 원혼을 품으면 귀신이 되어 밤마다 못된 짓을 하기 마련이니 이번 기회에 그걸 막는 편이 좋겠소이다.”

흠. 귀신이라.

“곰. 곰곰.”

「귀신이라니. 그런 과학적이지 못한 존재를 꺼내지 마라.」

“귀신은 실제로 있소이다. 사람이 원혼을 강하게 품어 승천하지 못하고 남은, 말하자면 원념(怨念)이 바로 귀신이오.”

“곰. 곰. 곰.”

「풋. 무사라더니 귀신 따위를 믿다니. 귀신이 무서운가.」

“무, 무섭다니! 무사는 귀신 따위 겁내지 않소!”

“곰곰. 곰.”

「그럼 어서 귀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라. 그럼 믿어준다.」

귀신이라. 그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근데 말이야. 곰.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를 따지기엔, 그렇게 따지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과학적이지 못하지 않냐. 정체성을 부정하면 안 되지.

“하, 하지만 귀신은 진짜로 있단 말이오! 어젯밤에도 들었소. 아씨에게 죽은 원혼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필로우의 귀가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너, 의외로 귀신같은 거 무서워하는 구나. 어젯밤에 그런 소리는 못 들은 거 같은데. 애초에 병사들이 죽은 곳이랑 우리가 있는 곳은 엄청 멀리 떨어져 있잖아.

진짜로 귀신이 있다면 거리 따윈 상관없겠지만.

『자자. 싸움은 이제 그만. 우선 위령비를 세우기로 결정했으니까 세워보자고.』

핀을 따라 아이들이 병사들이 죽었던 곳으로 이동했다. 붉은 모래로 뒤덮인 대지를 밟자 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하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추측이 아니다. 핀에게서 속마음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똑같은 일을 벌일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핀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대신 내가 병사들을 해치울 것이다. 핀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내가 모든 것을 떠안을 것이다.

“자, 그럼 아빠. 위령비는 어떻게 세우나요?”

『크고 멋진 돌로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 내용을 쓰면 돼.』

“내용이요?”

『보통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쓰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 이름을 모르니 대신에 넋을 기리는 말을 써놔야겠지.』

문구는 뭐가 좋을까. 이건 내가 생각하기 보단 핀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사과하는 사람의 진심이 담긴 말을 써 넣어야 하니까.

“으음. 그럼 ‘억울하게 잠든 병사들의 넋을 기리며……’는 어떨까요?”

『괜찮기는 한데, ‘억울하게’말고 다른 표현은 없을까? 일단 먼저 쳐들어 온 건 그쪽이었으니까, 우리가 가해자고 저쪽이 피해자인 것 같잖아.』

“‘용감하게 싸우다 잠든 병사들의 넋을 기리며’는 어때요?”

용감이라. 내가 봤을 땐 용감하게 싸운 사람은 없던 것 같은데. 뭐 어때. 위령비잖아. 좋은 말을 써줘야지.

『괜찮네. 그럼 다음은 비석으로 쓸 돌을 찾아보자.』

“어떤 돌이 좋을까요?”

『글쎄. 색은 화려하기 보단 수수한 단색이 좋겠지. 크기는…… 크면 클수록 좋지 않을까? 내가 알기론 10m가 넘는 커다란 위령비도 많이 봤으니까.』

“클수록 좋은 거네요.”

『꼭 그런 건 아닌데, 크면 아무래도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잖아.』

“그럼 큰 게 좋겠어요. 헤헤.”

핀이 돌을 찾아 숲을 헤맸다. 숲에 바위는 많이 있었기에 금방 원하는 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랏차!”

기합소리와 함께 땅에 박혀 있던 바위를 들어올렸다.

바위는 흔들거렸지만 뽑혀 나오지 않았다. 핀의 힘으로도 뽑을 수 없는 돌이라고?

“세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요.”

『주변에 땅을 파서 뽑는 편이 좋겠는데.』

“네. 아빠.”

핀은 내 말을 듣고 바위 아래 쪽 땅에 주먹을 날렸다.

바위를 제외하고 바닥이 둥근 원형으로 움푹 파이며 모래처럼 부서졌다. 꼭 운석 구덩이 같이 돼 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겉으로 드러난 돌의 크기도 컸지만, 땅 아래 묻혀 보이지 않던 부분이 두 세배는 더 거대한 돌이었다.

이거, 거의 크기가 나랑 맞먹을 정도인데? 이미 바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구덩이까지 만들어지니 진짜로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보였다.

『그럼 돌을 좀 깎아주고, 글을 새기고…… 비석을 세워볼까.』

“네!”

핀이 가지고 있던 레이피어를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칼이 한 번 돌을 지나갈 때마다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다 자른 비석 위에 아까 말한 글을 새겼다. 그리고 땅을 파고, 비석을 거기에 묻으니 꽤나 그럴싸한 위령비가 만들어졌다.

“이제 기도하면 될까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서 잠시 그들에 대해 생각하면 돼. 보통 묵념이라고 하지.』

핀과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묵념에 들어갔다.

나도 그들을 기리며 잠시 그들이 했던 행동을 생각했다. 침략자 치고는 너무 쉽게 쓰러지고 죽었고, 악의라고 하기에는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기에 큰 분노는 일지 않았다.

그렇겠지? 흠. 설마 다 알고 들어왔던 걸까.

안 돼.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만든 지 10분 만에 위령비의 가치가 사라지면 안 되잖아.

『핀. 그건…….』

“그냥, 왠지 여기가 어울릴 것 같아서요.”

핀이 지팡이를 위령비 앞에 꽂았다.

늙은 왕에게서 빼앗았던 지팡이였다. 이미 어머니의 마력이 모두 흡수된 평범한 나무 지팡이가 위령비 앞에 파수꾼처럼 꽂혔다.

이번 지팡이에선 아무런 기억도 받지 못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오랫동안 한 사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어서 그런 것일까. 하여간 나는 아직도 내 힘에 대해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아이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이들을 보던 도중, 아까 핀이 바위를 파낸 곳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에 그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핀! 얘들아. 아까 바위를 팠던 곳으로 가봐!』

아이들이 도착한 그곳에선, 큰 물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핀이 바위를 파내고, 바위를 파내기 위해 만든 구덩이에 가득 찬 물은 뜨거운 수증기를 모락모락 피어냈다.

“와. 이게 뭐예요?”

『응? 아마 온천 같은데.』

핀이 뽑아낸 바위 아래에 온천수가 있었나 보다. 이거 예상 밖인데.

“물이 뜨거워요!”

“신기하구려. 따뜻한 물이라니. 지금까지 본 적이 없소이다.”

“곰…… 곰?”

「물인데…… 싫지 않다?」

아이들은 따뜻한 물이란 걸 처음 보는 것이기에 신기한 눈으로 온천을 보고, 손을 넣어 만져보고 있었다.

뜻밖에 온천이라.

나중에 다 함께 이곳에서 몸을 담그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꽤나 즐거운 일이다.

잠깐. 여기 너무 멀잖아? 나는 여기까지 못 오는데.

“앗. 잠깐. 뿌리지 마. 뜨겁잖아.”

“고오옴.”

「이 물은 좋은 물이다.」

“신기해서 몸이라도 담그고 싶구려. 상당히 기분 좋을 것 같소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즐거워한다면 그걸로 만족. 얘들아. 나는 두고 너희만이라도 즐기렴…….

쳇.

* * *

엘퀴라즈 숲에 들어간 비루스 왕국의 병사들이 전멸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전에 퍼진 숲이 정화되었다는 소문과,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의 증언으로 인해 스스로를 광룡(狂龍)이라 부르는 이상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소문도 함께 세상에 흘러갔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선 그 소문을 들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엘퀴라즈 숲은 대륙 중앙에서 떨어진 북부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 숲에 세계수가 있어서 들어갔다는 병사들의 증언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포에 미친 병사들의 착란이나 헛소문으로 취급되었다.

소문은 그렇게 한 철의 소나기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몇몇 인물들은 그 소문을 지나치지 않았다.

한 사람.

“크윽! 위그드라실 니이이이임!!!”

“장로님! 진정하세요!”

“하, 하지만 나의 위그드라실님께서 계시던 땅이……!!!”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장로님. 숲이 정화되었다고 하잖아요. 그곳으로 가서 사는 건 어때요? 그 광룡인지 뭔지도 가서 해치우는 겁니다.”

“위그드라실 니임…….”

“하아…….”

또 한 사람.

“광룡이라. 강할까?”

“족장님…….”

“싸우면 내가 이길까? 어때? 이길 것 같나?”

“족장님.”

“강하겠지? 과연 얼마나 강할까? 천 년 전에 나타나 난리를 피웠다던 그 광룡이랑 비슷할까?”

“족장님!”

“왜 그래.”

“……일하셔야죠. 가긴 어딜 갑니까.”

“잠깐 다녀오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아주 잠깐만. 한 달 안에 다녀올 수 있어.”

“일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일 년이 넘도록 오지 않으셨잖아요.”

“이번엔 진짜로…….”

“안 됩니다. 미리 일 년치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됩니다.”

“흐음. 일 년치 일이라…….”

“뜸 들이셔도 안 됩니다. 빨리 일하세요.”

“아니, 도전욕이 불타오르는걸. 과연 나는 앞으로 있을 일 년치 일을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까?”

“……하아.”

그리고 또 한 사람

“제길. 이번에도 실패였군. 그 놈이 먹으면 안 되는데. 또 투덜거리는 모습이 눈에 훤하군.”

“왜 그러십니까? 마제(魔帝)님?”

“비약에 성분이 부족했어. 마력이 어우러지지 못해. 아. 이럴 때 전설에 나오는 용의 뼈라도 있었더라면.”

“용의 뼈라…….”

“왜? 그건 못 구해. 용이라는 놈들은 천 년 전에 멸종했다고.”

“아뇨. 그냥…… 이번에 들은 소문이 있어서요.”

“무슨 소문? 빨리 말해.”

“엘퀴라즈 숲에 광룡이 나타났다던데요.”

이렇게 몇몇은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엘퀴라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혹시 엘퀴라즈 숲으로 가는 길 압니까? 비루슨지 뭔지 하는 왕국 근처라던데.”

“거기 북부 아니요? 여긴 서부인데…….”

“서, 서부!?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내가 다시는 그놈 말을 믿나봐라. 뭐? 길치 치료제? 전보다 더 심해졌잖아!!!”

“아빠. 저 사람 이상해.”

“가까이 가지 마라. 병 옮아.”

“내가 무슨 역병신이냐! 흠. 몸이 좀 더럽긴 하군. 하긴, 한 달이 넘게 숲을 헤맸으니…… 생각하니 또 열 받네. 다음에 만나면 진짜 그 영감탱이는 내 손에 죽었어.”

소문을 아직 듣지 못한 채, 어딘가 시골 마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 남자도.

“흠…….”

마지막으로…….

“봉인이 풀렸나.”

과거의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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