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8화 (88/200)

=======================================

[88] 또 하나의 이야기의 결말

“나라가 어찌 되려나.”

비루스 왕국의 병사들이 엘퀴라즈 숲에서 학살에 가까운 대패(大敗)를 당하고 왔다는 소문은 벌써 나라 곳곳에 퍼져 있었다.

병사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의 곡소리가 한동안 이웃집에서 들려오며 분위기가 흉흉한 현재, 한 여인이 집 앞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차라리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나라로 가버릴까…….”

혼자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바쁘고 힘들지만 그 이상으로 외로움과 함께하는 일이었기에 여인은 현재 가장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문을 생각하며 앞날을 걱정하였다.

평범한 가정집 부인과 다를 바 없는 여인.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귀가 보통보다 길고 눈에 싱그러운 새싹과 같은 녹색 빛이 감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그랬다가 이안이 못 돌아오기라도 하면 안 되지.”

그녀는 아버지가 인간이었던 하프엘프.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딸을 키우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자신의 딸을 기다리며 이곳에 살고 있었다.

비루스 왕국이 혼혈에게 그리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기엔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도, 또 그 위의 사람들도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떠날 만큼 모험심이 강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녀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바로 실종된 딸이 언젠간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비록 그 믿음은 서서히 옅어져 이제는 딸아이가 실종된 날을 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하아…….”

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젊은 아이들이 실종되는 주요 원인은 대부분 모험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모험심 강한 젊은이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험가가 되어 다른 도시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의 딸, 이안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핏줄에 흐르는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답게 모험심이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거기에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 열심히 키운 아이었기에 그녀도 딸을 소중히 여겼고 딸도 그녀를 소중히 여겼다.

여인은 딸이 사라졌던 그날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그날은 그녀가 딸에게 시장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날이었고 딸은 시장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 거니……. 이안.”

그런 소중한 딸이었기에 그녀는 오늘도 딸을 기다리며 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바람이 간절한 탓이었을까. 저 멀리 석양을 등지고 다가오는 인영(人影)의 모습이 그녀는 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크기에, 그녀는 딸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리 딸이랑 많이 닮았네.’

그녀는 펄럭거리는 하얀 천 너머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딸의 그림자와 겹쳐 보였다.

여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선은 다가오는 여인에게 못이 박힌 듯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서, 설마…….”

하얀 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의문의 여인. 갈색의 모포와 같은 몸에 맞지 않는 큰 옷을 걸치고 다가온 여인의 모습은, 빨래를 널던 여인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의 모습 그 자체였다.

환상일까. 환상이라도 상관없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딸을 껴안았다.

“이안!”

“어, 엄마…… 숨 막혀…….”

수년 동안이나 실종된 딸의 말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런 가벼움은 어머니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걱정과 고민이라는 짐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이안…… 몸은 괜찮니?”

“머리가 멍해…….”

졸린 듯이 감겨가는 눈이었지만 딸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참을 딸을 껴안고 울었다. 그녀의 딸은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잠시 뒤, 울음을 그친 어머니가 딸에게 물었다.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심부름 갔다가 오다가…… 그다음부터 기억이 안나요.”

“아아. 그래. 어찌됐건 무사히 돌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실종되었던 딸과의 만남을 신에게 기도하며 감사드리는 여인.

기적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이곳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 *

“사, 살아 있었나?”

“이래저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찾아뵙는 게 늦었습니다. 아버지.”

“오오!”

엘퀴라즈 숲의 원정에서 복귀한 후로, 처음으로 늙은 왕의 얼굴에 화색이 피었다.

많은 병사들을 잃었어도 드렌 왕자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드렌 왕자 한 명이 숲에서 잃었던 병사들만큼이나 강했으니까. 죽은 신하나 장군들은 다시 뽑으면 된다.

늙은 왕은 화색이 감돌던 표정을 감추고 다시 예전에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초라하고 피폐해진 몸이었지만 아직 왕으로서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돌아왔구나. 잡종.”

“할 일을 대부분 처리했지만 아직 남은 게 한 가지 있어서요.”

드렌 왕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늙은 왕이 입에 담은 잡종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걸렸다.

잡종. 그것이 이제는 무슨 의미인지 드렌 왕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건 마법을 자극하는 열쇠가 되는 단어.

잡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음에도 늙은 왕의 명령에 꼬박꼬박 따랐던 지난 과거가 되살아났다.

“뭘 그리 멀뚱히 보고 있느냐! 어서 다시 숲으로 가서 내 지팡이를…… 아니지. 네 녀석도 이미 그 년한테 패배했었지. 되었다. 우선은 물러가거라. 내 필요하면 부를 테니.”

“확실히 그분은 강하셨죠. 아버지 따위가 이길 상대는 아니죠.”

“따위?”

다 죽어가는 시체처럼 핏기 없던 늙은 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감히 꼭두각시 주제에 자신을 능욕하는 드렌 왕자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네. 따위. 아버지는 왕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너무 욕심이 지나치시죠.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일이라고 잘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잡종 주제에 나를 능욕하는 것이냐!”

그러나 늙은 왕은 발밑에서 사슬로 자신의 분노를 누군가 끌고 간 것처럼 순식간에 화가 누그러졌다. 그것이 시작된 것은 아주 작은 의심에서부터였다.

원래부터 드렌 왕자가 내 말에 반항할 수가 있었던가?

반항을 하긴 했었지만 작은 투정 정도였을 뿐,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는데.

드렌 왕자가 살아 있다면, 어째서 수정 구슬이 박살나고 그의 시야를 공유할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드렌 왕자의 시야를 공유하던 구슬이 박살 났다는 것은…….

마법이 깨졌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 없으시네요. 이제 깨달으셨나 보군요. 너무 늦으셨지만.”

드렌 왕자가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불쾌한 웃음은 비웃음과 씁쓸한 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한 걸음씩 늙은 왕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늙은 왕도 뒤로 물러났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막다른 벽에 막혀 버렸다.

“자, 잠깐.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요. 당신이 사라져야 이 나라가 조금이나마 정상으로 되돌아올 테니.”

“안 돼. 네, 네가 뭘 안다고!”

“그게 싫으시다면, 속죄로 하죠. 당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속죄.”

드렌 왕자의 손아귀에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며 피어났다. 전보다 더 푸르고 생기 넘치는 불꽃이었다.

“내가 죽였다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다 네놈이……!”

푸른 불꽃으로 감싸인 손이 늙은 왕의 이마를 잡았다. 늙은 왕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보물창고를 가득 채웠다.

잠시 후, 비명이 사라지고 창고 안에 남은 것은 주인 잃은 보물들과, 한때는 왕이었던 자가 남긴 재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왕성에서 피어난 푸른 불꽃에 큰 소란이 일었다. 그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지만, 무리한 출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비루스 왕국의 늙은 왕이 실종되었다.

아쉽게도 그의 실종을 슬퍼하는 자는 없었고, 찾으려는 자도 없었다.

* * *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가면을 쓰고 멀리서 화재가 일어난 왕성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말했다.

그는 이전에 만나서 이야기 나눴던 늙은 왕을 떠올리며, 그가 저 불꽃에 의해 정화되었음을 깨달았다.

마법이나 초능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분이 그것을 바라고 있었으니, 저 불꽃은 그분의 뜻이 만들어 낸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당연히 늙은 왕이 저지른 원죄와 욕망으로 더럽혀진 육신과 혼도 저곳에서 불타 정화되고 있으리라.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오로지 믿음뿐이었지만, 그의 마음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형제자매들을 이곳으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의 질문은 허공을 떠돌다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가면을 쓴 남자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믿음에,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을 갖고자 하는 일종의 기도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눈을 뜬 그는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와 이마를 건드리며 성호를 그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당신의 뜻대로.”

만일 그분께서 허하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몸은 성치 않았으리라.

자신의 몸을 걸었음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두려움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모든 것을 내다보시는 그분의 혜안과 신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감사였다.

“비루스 왕국이여. 기뻐하거라.”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지는 그가 불타는 왕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푸른 불꽃은 밤하늘의 어둠을 몰아내는 용맹한 사자처럼 긴 갈기를 펼쳤다.

“신의 자비가 그대들에게 뻗치니.”

불꽃을 바라보던 그가 골목길로 완전히 사라졌다.

“인류는 평화로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