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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원래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2)
“아빠가, 핀 네 나이 때 있었던 일이야.”
핀이 아직 한 살도 안 됐으니 신생아였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차피 그 시절은 기억도 안 나고. 시절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본능으로 살아가던 시기 아닌가.
나는 내 성격이 핀과 비슷했던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의 생각과 기억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묘해서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그때 아빠도 너랑 비슷했어. 아니다. 더 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시절의 내 이야기를 꺼냈다.
한창 학업에 시달리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알 수 없는 자만심과 이기심에 빠져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춘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할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유행이 되는 것만 같았고,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공부란 대체 왜 해야 하는가. 영어는 대체 왜 배워야 하지? 나는 외국에 갈 생각도 없는데. 국어만 잘하면 그만 아닌가. 수학은 대체 살면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 수학을 쓸 일이 뭐가 있다고. 계산은 계산기로 하면 그만 아닌가.
공부에 대한 반발심인지, 나의 심성이 비뚤어진 것인지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느껴졌고 신물이 날만큼 짜증났다.
그 탓인지 나는 집 안에서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 방에 어머니가 들어오는 것이 싫었다. 식사 중에 아버지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싫었다. 어차피 항상 하던 이야기들뿐이었다. 공부는 잘 하고 있냐. 필요한 건 있냐.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
그렇게 짜증이 쌓이고 쌓일 무렵, 집안에 일이 생겼다. 아버지가 실직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집이 몰락했다거나, 거리에 나앉는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보다 절약하는 것에 더 신경 쓰고 쓸데없는 곳으로 돈이 나가는 것에 예민해진 것이 전부였다.
변한 건 크게 없었지만 아버지가 실직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충격이었다. 원래 있던 짜증과 불만에 실직이라는 것이 불을 지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화가 터져버렸고 나는 뱉어선 안 될 말을 뱉어버렸다.
“나도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싶었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면, 소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금수저로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남들은 평생 일하고 저축해도 가질 수 없는 통장잔고가 부러웠다.
남들은 특별히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모두 갈 수밖에 없는 군대를 돈으로 면제 받는다는 그들이 부러웠다.
남들은 아득바득 살아가도 자기 집 하나 가질 수 없는데, 태어나자마자 자신만의 집을 가질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돈 걱정 없이 자기 취미를 살려 일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머리가 좋지 않아도 비싼 과외를 받으며 조금만 노력해도 똑똑해지는 그들이 부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세상살이에 대한 푸념이었지만 그 땐 그게 진실이자 진리였다.
내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고 생각하던 때.
그 말을 하고 난 후,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표정에서 좌절이나 낙담, 고통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표정이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두 분이 큰 충격에 빠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날 혼내지 않으셨다. 그 자리에 도저히 있을 수 없어서 내 방으로 들어갔으니 내가 도망쳤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부모님은 날 혼내지 않으셨다. 하지만 약간의 변화는 생겼다. 부모님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이 느껴졌다. 항상 마주치고 함께 하던 일상에서 그런 변화는 끊임없이 내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이후로 나도, 우리 집도 점점 변해갔다. 아버지는 다시 취직을 하셨고 집안은 다시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며 예전에 했던 말과 생각들이 얼마나 철없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사과하지는 못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직접 말하기가 힘들었다. 시간도 오래 흘러 굳이 그날의 일을 다시 꺼내기가 껄끄러웠다.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 좀 더 크고 나면 죄송하다고 해야지. 아니면 효도해서 그때의 일을 백배로 갚아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날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의 대학교 입학식 날…….
* * *
“아빠.”
“으앗! 핀!?”
이야기를 거의 끝마칠 무렵, 핀이 나를 갑작스레 껴안았다. 가슴팍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튼 핀. 네 나이 때는 다들 속을 썩이기 마련이야. 아빠도 지금 말한 것처럼 속을 썩였는걸. 핀, 너는 오히려 대견하다고 할 수 있어. 아빠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잖아. 그게 어딜 봐서 이기적인 거니? 네가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언젠간 고쳐지기 마련이야. 하지만 네 마음은 이기적이지 않았잖아. 아빠를 생각하고, 또 방식은 과격했었어도 결국 그걸 실행했잖아. 아빠랑 다르게 말이야.”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 나의 본체, 세계수를 눈에 담았다. 핀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본체는 처음 내 자신을 봤을 때보다 수십 배나 자라나 있었다. 아직 어머니만큼 불가사의할 정도로 자라나진 못했지만, 어린왕자라는 동화 속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만큼은 커진 것 같다.
“자. 핀.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니? 그때도 지금처럼 아빠가 컸었니?”
“아뇨. 그때는 제가 올라가기 쉬울 만큼 작았어요.”
“그래. 근데 지금은 어떠니? 올려다보다가 목이 아플 만큼 커졌지?”
“네.”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가 자라났듯이 사람도 똑같아. 사람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지. 물론 모두가 자라나는 건 아니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라나지 못하고 어리고 철없는 사람도 물론 있어. 사람이 자라나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잘 모르겠어요.”
“바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야. 나무가 물과 햇빛을 받고 자라듯이, 사람도 자라나려면 양분이 필요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깨닫고 그걸 고치려고 마음먹은 사람만이 비로소 자라날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앉아있는 핀과 서 있는 내 키는 똑같아서 정면으로 핀을 볼 수 있었다.
“핀. 핀은 벌써 자기를 돌아봤잖아.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야. 더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마음먹고 계속 나아가면 돼. 바로 바꿀 필요는 없어. 지금까지 해온 것을 한 번에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저 마음에 새겨두고, 계속 떠올리면서 조금씩 바꾸면 되는 거야. 나무가 한 번에 자라지 않듯이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성장하는 거니까.”
“……고마워요. 아빠.”
나를 보며 웃는 핀. 아직 눈가가 붉지만 그래도 웃으니 보기가 좋다.
“아빠!”
환하게 웃으며 핀이 내게 달려든다.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이 전개라면, 핀이 나를 껴안고 뒤로 쓰러지겠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은데.
“흐윽……?”
숨을 멈추고 충격에 대비했지만, 후방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딱딱한 땅이 아니라 핀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헤헤. 아빠, 몸이 딱딱해요.”
“으응……. 힘을 좀 주고 있었더니…….”
“왜요?”
“아니야. 아무것도.”
벌써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건가. 나 같은 것보다 핀이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건 핀이 내 딸이라 자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런 걸까.
아니야. 내 딸이 아니더라도 이런 아이가 또 어디 있겠어. 객관적으로 봐도 참하고 좋은 딸이잖아.
“사랑해요. 아빠.”
“크흠.”
……인정. 나 팔불출인가 보다.
* * *
“다 내꺼야……. 난 안 죽어……. 죽어도 다 내가 가지고 갈 거야…….”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늙은 왕이 금화들을 껴안고 바동거리고 있었다. 금화를 끌어안으려는 그의 왼쪽 팔은 늙은 고목나무처럼 굳었는지 움직임이 딱딱했다.
“나는…… 위대한 국왕이 되겠어……. 그러면 더 많은 보물을 내게 바치겠지. 이히히히. 세상에서 제일 유명해지겠어. 나보다 유명한 자는 아무도 없어!”
실성한 듯이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늙은 노인은 그나마 약간이라도 가지고 있던 국왕으로서의 위엄은 완전히 사라져 미친 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안전해. 아무도 못 들어와. 아무도…… 그 하이엘프 년도 못 들어와…… 여기는 안전해……. 하이엘프…… 하이엘프……!”
하이엘프라는 말을 꺼내자 늙은 왕은 바닥을 기어 등을 벽에 기댄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흐리멍텅한 그의 눈동자가 떨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여긴 없어. 여긴 없다고!”
발을 질질 끌며 더욱 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등 뒤에는 벽이 있었고 늙은 그의 몸으로 밀어봤자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늙은 왕을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그날 숲에서 있었던, 핀을 만났던 그 시간에 멈춰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해본 죽을지도 모른다는 고통. 계속해서 찌르고 비트는 붉은 눈의 엘프. 차라리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늙은 왕이 그토록 바라던 세계수의 마력이 계속해서 그를 치료해 주었다.
“으으……. 어깨가…….”
지금은 처음 찔렸던 어깨를 제외하면 아픈 곳은 없었다. 그날을 잊고 싶었지만 어깨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계속해서 핀의 얼굴이 떠올라 늙은 왕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빼앗길 수 없어……. 절대로 안 빼앗겨……!”
과거 용사였던 선조가 쓰던 지팡이. 왕가의 보물로 내려오던 그 지팡이는 그때 핀에게 회수당한지 오래였다. 지고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제 남은 것은 보물창고에 있는 왕가의 마지막 재산뿐.
“이, 이 망할 선조 놈!”
벽을 더듬으며 일어선 늙은 왕이 품에 넣고 있던 일기장을 꺼내 바닥에 팽개쳤다.
일기장을 자근자근 밟았지만 늙은 그의 육체는 일기장에 걸린 마법조차 이기지 못했다.
“그 따위 지팡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물건을 남겼어야지!”
전형적인 패자의 책임회피를 시도하는 늙은 왕.
끼이이익.
그러나 그는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보물의 산 뒤로 몸을 숨겼다.
보물 창고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부터 환한 빛이 어두컴컴했던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화의 산이, 황금으로 만든 나무처럼 반짝거렸다.
“역시 여기 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