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6화 (86/200)

=======================================

[86] 원래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1)

어제 숲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상극의 마지막을 나는 보지 못했다.

숲 밖으로 향하는 핀의 뒷모습, 아버지와 같은 날개를 가지고 날아간 그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와 별이 모습을 반짝였을 때, 핀이 숲으로 다시 돌아왔다.

핀은 원래 내가 알던 엘프의 모습이었다. 몸에 핏자국이 묻어 있어서 상처라도 났는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피였고 핀은 멀쩡했다.

“다녀왔습니다.”

멀쩡한 것은 몸뿐이었을까. 돌아온 핀의 인사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 쳐져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핀을 꼭 끌어안아 주었고, 핀은 나의 포옹을 받으며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나는 핀을 끌어안고 함께 잠이 들었다. 전과 다르게 핀이 나를 주무른다거나 꼬집는 일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마치 시체와 같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잠을 잤다. 다음 날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하는 그 순간까지 핀은 움직이지 않았다.

핀이 다시 일어났을 때,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어째선지 내 근처로 다가올 생각을 안 했다.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혼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의 모습 같았다.

난장판이라. 어제 핀이 병사들과 싸운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 역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흙은 적갈색으로 물들었다는 점뿐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어색하고 불안하다.

“핀. 뭐해?”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핀의 등 뒤로 몰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핀은 내가 말을 걸기 전까지 내게서 등을 돌리고 멍하니 숲만 바라보고 있었다.

핀의 어깨가 흠칫 떨리며 살짝 위로 솟았다. 내가 말을 걸 줄 몰랐던 것일까? 깜짝 놀란 것 같다.

평소라면 이렇게 말을 걸어줬을 때 좋아라 내게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은 영 아닌 듯싶다. 대답 한마디 없이 숲만 등대처럼 바라보고 있으니까.

“괜찮니?”

어깨를 건드려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잠깐 솟았던 어깨는 다시 기운 없이 축 쳐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핀의 옆자리에 앉아서 핀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다.

울창한 숲.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변하지 않는다. 변하기 하겠지만, 아주 천천히 느리게 변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매일 같이 보는 사물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알아채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핀은 달랐다. 내 옆에 항상 붙어 있었고, 항상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나무와 다르게 빠르게 자라나고 변화해 갔다.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소녀의 모습으로, 소녀에서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변한 건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내 말은 곧잘 믿어주던 어린 아이는 사라지고 반항적인 소녀가 되더니 이제는 살짝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본다면 조금은 그 성격이 밉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핀이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애벌레였던 시절부터 보아왔던 핀. 엘프가 되고나서도 그저 내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주던 핀에게서 나는 애벌레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내게 처음으로 핀이 반항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직 핀을 애벌레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족이라곤 하지만 진정한 가족이 아닌 애완동물이자 반려동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반항하는 핀이 좋았다. 핀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거나 반항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반려동물이 아닌 진심으로 내 딸처럼 느껴졌다. 인간이었을 적 내 여동생과 비슷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 녀석도 여간 천방지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금 버릇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버릇없음이 좋았던 것이다.

“처음 할아버지의 기억을 봤을 때부터 생각했었어요.”

핀이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핀의 말을 경청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빠를 돈으로, 물건으로 본다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평생 아빠랑 숲에서 계속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핀이 다시 말문을 이었다. 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빠가 정령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빠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달아 버렸어요. 아빠는 할머니처럼 처음부터 나무였던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었지.”

역시 핀은 다 알고 있었구나. 나의 기억과 생각을 알아챌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언젠간 숲 밖으로…… 어떤 방법을 써야할지 모르겠지만 나가고 싶어 하실 테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할머니처럼 엘프들을 불러 모아 함께 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죠. 아빠는 인간을 좋아하잖아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인간들이 숲에 오는 걸 반길지도 모르죠. 아빠는 전에 나무라고, 다른 종족들한테 아무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혼자 말씀하셨지만, 벨룸을 처음 봤을 때나 그가 죽었을 때 아빠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걸 느꼈는걸요.”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뜨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나와 다른 아이들과 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어요. 왜 아빠가 숲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지, 왜 인간들이 아빠에게 해코지를 하러 오는 것을 무서워해야 하는지 화가 났어요. 아빠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태어난 게 잘못이라면, 그건 태어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잘 못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빠가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으실까 제 나름대로 고민해 봤어요. 바보라서,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리 고민해도 평화로운 방법으론 답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제 힘으로 어떻게든 아빠를 평생 지켜주자고 결심하려 했어요.”

핀이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떠오른 게 할아버지였어요. 할아버지는 저보다 더 강했지만,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었잖아요.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왜 그럴까하고 생각해 봤어요. 그렇게 강한 분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었을까하고.”

할아버지를 생각해서였을까. 핀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한순간 감돌았다 사라졌다.

“제 나름대로 고민해 봤어요. 강한데 어째서 인간들은 할아버지한테 덤벼들었을까. 죽을 게 뻔한데, 왜 그랬던 걸까. 계속 고민해 봤는데, 제 생각엔 인간들은 할아버지가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어요. 할아버지는 강해요. 그리고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갑자기 가서 인간들은 할아버지가 무서웠을 거예요.”

“그런데?”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무섭지만, 숲에 사는 야생동물처럼 토벌해야 하는 대상 정도의 무서움뿐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야생동물 따위랑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지만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거예요. 그래서 무서워는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 거구요.”

그런가. 나는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간들은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계시던 미궁에 도전하고 있었다.

“숲이 정상이 됐으니 언젠간 인간들도 눈치를 채고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아무리 숨어도 언젠간 인간들은 아빠를 찾아낼 거구요. 나쁜 인간들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쳐도, 그 인간들을 제가 물리친다고 해도 계속해서 인간들은 찾아오겠죠. 숨던, 숨지 않던 결과는 똑같아요.”

“그래서 그런 방법을 쓴 거구나.”

“네. 맞아요. 처음엔 강한 인간을 노렸지만, 소문이란 건 뜬구름 같은 거라 확실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험가들한테 몰래 소문을 퍼뜨리게 만들었고, 예상대로 아빠를 노리는 인간들이 몰려왔어요. 설마 그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지만.”

나는 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떨리는 핀을 껴안아주었다. 핀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다시는 아빠를 넘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숲에 함부로 몰려오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죽인거구요. 한 나라의 왕까지 있었으니까 확실하게 세상에 소문이 퍼지겠죠. 두려워할 수도 있고, 반대로 몰려올 수도 있지만 또 온다면 이번에야말로…….”

“핀. 그만.”

어느새 핀은 울고 있었다. 몸을 맞대고 핀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계속해서 흘러나와 나는 핀의 얼굴을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핀의 생각이, 품고 있는 감정이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인간을 죽였다는 후회감과, 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내게 미움 받고 멸시 당할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 어렸던 시절, 인간을 죽이고자 했던 그 발언은 나름의 각오였던 걸까. 그 때 미리 알아챘더라면.

사람이란 겉만 보고 알 수 없는 법이라더니. 그 당당하고 거침없던 태도는, 아직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갑옷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원래 인간이었잖아요. 그리고 인간을 좋아하잖아요! 저는 인간들을 죽였어요. 나쁜 인간도 있었겠지만 저도 알아요. 그 사람들은 그저 국왕이라는 나쁜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였어요. 그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제 마음대로. 아무한테도 물어보지 않고. 아빠가 알면 말릴까봐 꽁꽁 숨겨두고!”

“괜찮아 핀. 아빠는 다 이해하니까 안 울어도 돼.”

“전 항상 제멋대로잖아요. 제 마음대로 생각해서 인간들을 죽였고, 아빠가 멀리 못 간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끌고 나오고, 제 마음대로…….”

“그래도 난 핀이 좋아.”

“제가 싫지 않아요? 지금은 싫어하지 않으시지만, 언젠간…….”

“그럴 일은 없어. 세상이 멸망하고 다시 시작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내가 다시 태어나고 새 삶을 시작한대도, 나는 핀, 너를 찾을 거야.”

“이기적이고 철없는 딸이라고 싫어하시지 않을 건가요?”

“이기적이고 철이 없다니. 누가 그래?”

“……제가요.”

“……크흠. 원래 자기 자신은 자기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아. 핀도 그래서 그런 거야. 나는 오히려 핀이 대견스러운걸. 원래 사람은 자기 결점은 모르고 남의 결점만 잘 발견하거든. 근데 핀은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잖아. 게다가.”

껴안고 있던 핀을 놔주었다. 핀은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손으로 남은 물기를 닦아주고 싶지만 그러면 쓰릴 것 같아서 옷소매로 콕콕 찍으며 물기를 닦아주었다.

“게다가 이기적이라니. 오히려 다 날 위해서 벌인 짓이잖아.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핀이 지금 몇 살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 살?”

“그래. 핀이랑 아빠가 만난 지 일 년도 안 됐잖아. 그런데 벌써 이렇게나 성장했는걸.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세상에. 어떤 아이가 일 년 만에 이런 생각을 하겠어.”

그래도 아직 핀의 표정은 기운이 없었다. 나는 핀 앞에 마주 앉았다.

“아빠 이야기 좀 들어볼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