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5화 (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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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경고

붉은빛이 감도는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태양을 향해 높이 치켜들어졌다. 얇은 와인 잔의 목을 잡은 노인의 손가락은 옅게 떨리며 금방이라도 잔을 손에서 놓칠 것만 같았다.

“오래 걸리겠지. 오래 걸릴 거야. 넓은 숲이니까. 일주일? 열흘?”

손의 떨림은 노인이어서,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회, 그 기회를 손에 넣기 위한 짧지만 긴 또 하나의 기다림을 간신히 참고 있는 늙은 왕의 몸부림이었다.

그는 타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잔에 든 와인을 들이켰다. 왕이 마시는 모습이라기엔 참으로 추레했지만, 주변에서 그를 속으로라도 욕 볼 사람은 없었다.

“정말이지 기다리기 힘들군.”

병사들이 숲으로 들어간 후부터 늙은 왕의 눈동자는 숲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 울창한 나무 너머로 병사들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세계수를 베어 가지고 오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갈증이 끓어올라 늙은 왕을 빈 잔을 들어올렸다. 옆에 있던 그의 신하가 빈 잔에 와인을 채워 넣었다. 신하의 뒤쪽으로 텅 빈 와인 병이 몇 개씩이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 안에 병사들은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변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왕은 숲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기적처럼 세계수를 오늘 가지고 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큭큭큭. 이 나이까지 이런 절호의 기회를 기다렸는데 그깟 일주일, 열흘이 무슨 대수라고 이리 마음을 조이느냐. 참으로 바보 같구나.”

기다림에 지친 늙은 왕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숲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풀리며 나무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땅이 울린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풀숲 너머로 병사들이 보인다. 하지만 늙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기다리다 지친 자신의 마음이 보여주는 환각과 환청이라 생각한 것이다.

“세계수를 발견하면 우선 복용부터 해야겠군. 늙으니 몸이 말이 아니야.”

환각과 환청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던 늙은 왕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무리 기다려도, 눈의 초점이 돌아왔어도 달려오는 병사들의 환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환각이 아니었단 말이냐?”

“저희 눈에도 보이옵니다. 전하.”

대신과 장군들이 늙은 왕의 다급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늙은 왕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천막을 나섰다.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이렇게나 빨리?

“이건 대체……!”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세계수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지진이 난 건물에서 도망치는 쥐 떼처럼 달리고 있었다.

“멈춰라! 멈추란 말이다! 무슨 일이냐!”

늙은 왕이 병사들을 멈춰 세우기 위해 앞으로 나가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눈에 서린 공포심은 왕의 존재를 잊게 만들었고, 한시라도 빨리 숲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늙은 왕을 지나쳐 들판으로 달려갔다.

“왕이시여!”

병사들의 몸에 치일 뻔한 늙은 왕을 한 장군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구해주었다. 늙은 왕은 눈만 껌뻑 뜬 채 달려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늙은 왕의 물음에 대답해 줄 병사는 없었다.

늙은 왕만 이 상황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왕을 지키기 위해 숲에 들어가지 않고 남아있던 기백의 병사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도망치는 병사들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도망갈 뿐이었다.

“설마 그 하이엘프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혼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정신을 차린 늙은 왕이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때, 숲에서 뛰쳐나오던 병사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마력이 내리쳤다.

“살려…….”

우는 표정으로 늙은 왕과 다른 병사들에게 손을 뻗던 한 병사를 시작으로, 달려오던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듯 바닥으로 흩어졌다.

늙은 왕도, 그를 지키는 병사들도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은 바닥에 흩어진, 인간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는 한때 병사였던 붉은 모래 알갱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왕이시여! 위험합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늙은 왕을 병사들이 뒤로 피신시켰다. 늙은 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뒤쪽으로 끌려갔다.

그때, 하늘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병사들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병사들은 누군가 땅을 딛는 소리에 고개를 내려 앞을 보았다.

“아직도 많이 있었네.”

처음 땅에 내려선 핀을 본 순간, 병사들은 그녀를 보고 용(龍)을 떠올렸다.

거대한 검은색 날개, 뱀과 같은 눈동자가 전설 속에 나오는 용과 흡사하다고 느낀 것이다.

“공격해라!”

핀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고, 방금 전까지 도망치던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것이 그녀라 판단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병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창을 뻗었다. 창날이 핀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가 창에 꿰뚫릴 것만 같았다.

“귀찮아.”

그녀가 손을 뻗어 창을 쳐냈다. 귀찮은 파리를 내쫓는 것 같은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창을 쥐고 있던 병사들은 그 충격에 손에서 창대를 놓치고 말았다.

“너희들도 죽이는 편이 효과가 좋겠지.”

핀이 다시 날개를 펼치려던 찰나, 그녀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위화감에 잠시 멈추고 자신의 손을 들었다. 방금 전, 병사의 창날을 튕겨낸 오른손에 옅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평범한 병사들은 아니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늙은 왕을 수호하는 왕의 직속병사들, 바로 기사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평범한 무기와 방어구가 아닌 마법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기사들이 무기를 꺼내 마력을 불어 넣자, 무기에서 화염과 얼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창을 놓친 기사들도 허리춤에 차고 있단 검을 빼어 들었다.

“그래. 그렇지. 너무 쉬우면 안 돼지.”

날개를 펼치려던 핀은 마음을 바꿨다. 그저 약해빠진 적이 아닌, 이런 자들일수록 더욱 큰 공포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목적이 완벽하게 달성될 수 있기에, 그녀는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양팔을 벌려 병사들을 맞이했다. 그것은 강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처럼도 보였고, 약자들을 농락하는 멸시처럼도 보였다.

“나는 광룡. 감히 나의 땅에 들어온 것을 목숨으로 되갚아라.”

“국왕님을 위해!”

그녀의 도발이 효과가 있었는지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핀의 입가에 핀 미소를 보지 못했다.

* * *

“말도 안 돼. 그 엘프……. 분명 그 엘프였어.”

기사들의 도움으로 천막 안으로 피신한 늙은 왕은, 천막으로 들어오기 직전 땅으로 내려선 핀의 모습이 망막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구슬 속의 모습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때 봤던 모습의 자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 변하긴 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는 것이다.

“왕이시여. 이곳에서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그를 도와준 기사들이 늙은 왕을 피신시키기 위해 천막의 뒷문을 열었다. 하지만 늙은 왕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안 돼. 조금만 더하면, 조금만 더 하면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데!”

구슬 너머에서 봤던 하이엘프의 힘을 얕본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는 강했고,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강자는 비루스 왕국에 없었다.

그러나 개인의 강함과 집단의 강함은 그 궤가 달랐다. 아무리 개인이 강하다 할지라도 단체로 움직이고 활동하는 군대는 이길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대량의 병사들을 동원한 수색작전을 펼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엘프 따위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아니, 대체 그 모습은 뭐란 말이야!”

늙은 왕이 예측하지 못한 것은, 핀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렌 왕자와 싸울 때 보여주었던 힘은…… 전력이 아니었단 말인가.

“왕…….”

늙은 왕을 부르던 기사가 말을 멈췄다. 갑작스레 불어온 폭풍에 천막을 고정하던 핀이 뽑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장군과 신하, 그리고 기사들을 숨겨주던 천막은 이제 없었다.

“도망치려고?”

천막이 사라지고 펼쳐진 광경은, 수많은 기사들이 장난감 인형처럼 널 부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으으…….”

늙은 왕과 그를 모시고 간 기사 두 명이 바깥의 상황을 보고 숨이 막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평온한 자들은 늙은 왕의 꼭두각시가 된 신하들과 장군들뿐이었다.

늙은 왕은 바깥에 펼쳐진 참상에 나오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숲에서 뛰쳐나온 병사들이 죽었을 땐, 그다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은 마치 마법과 같았다. 사람을 붉은색 모래알갱이로 바꾸는 마법.

하지만 지금 보이는 시체들은 달랐다. 목이 꺾이고, 팔이 뽑히고, 기이한 구조로 뒤틀려 죽은 기사들과 신체 일부가 사라진 기사들의 시신이 바닥에서 뒤엉켜 망가지고 버려진 인형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끅, 끄윽……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그나마 아직 살아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선 전의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늙은 왕이 지팡이를 쥐고 자신의 신하 한 명을 조종해 핀에게 말을 걸었다. 직접 그녀에게 먼저 나서기엔 그는 너무 겁이 많았고, 또 신중했다.

“꼭두각시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신하의 목을 날렸다. 그것이 그녀의 팔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필요 없어.”

“나, 나를 지켜라!”

신하의 목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늙은 왕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주변에 있던 그의 꼭두각시들은 모두 머리가 달아나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고, 유일하게 싸울 수 있었던 두 명의 기사들은 헐레벌떡 달아난 지 오래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모습은 좀 늙었지만, 비루스라는 나라의 왕이지? 기억 속에서 봤어.”

“그걸 알고서도 무엄하게 내 앞에서 살수를 쓰느냐!”

유일하게 이곳에 남은 자들 중 멀쩡한 자는 핀과 늙은 왕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핀이 마력의 실로 늙은 왕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크아악!!!”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게. 여기서 네가 죽으면 모두 꽝인걸.”

언제 이런 고통을 느껴봤을까. 늙은 왕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쳐본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에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지만, 고통에 의한 혼절을 다른 고통이 깨워주는 진기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제, 제발 그만. 워, 원하는 게 있느냐. 뭐든지 들어주겠다. 돈? 명예?”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아래에서 핀을 올려다보며 늙은 왕은 저승사자를 떠올렸다.

늙고 추레한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

“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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