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4화 (8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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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학살의 시작

『군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숲 어귀에서부터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검과 활, 창을 휴대하고 있어서 나는 그들이 군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벌써 올 줄이야.』

드렌 왕자가 떠난 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다.

그가 충고한 대로 언젠간 숲으로 비루스 왕국에서 보낸 사람들이 침입하리라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고작 이틀 사이에 비루스 왕국에서 군대를 보낼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결국 와버렸네요. 아빠.”

『……그러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세계수라는 특성조차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 없는 건가. 계속해서 흥분된 상태이다.

그런데 핀. 너는 아무런 위기감도 들지 않는 거니?

분명 핀도 내가 본 군인들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나에게 기대 함께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핀의 표정은 대군을 앞둔 모습이라곤 상상할 수 없던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빠.”

『왜 그러니?』

“예전에 약속, 기억나세요? 제가 싸워도 말리지 않겠다던…… 그 약속.”

『기억나지.』

기억이 난다. 그게 언제였더라. 어렴풋이 약속을 한 기억은 나지만 그 약속을 언제 했는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

『……핀. 괜찮니?』

핀이 내게 물었다. 핀의 목소리가 떨려서 마치 울먹거리는 것 같았다.

“아빠는 절 절대로 미워하지 않으시네요.”

숲을 향하고 있던 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무덤덤한 표정은 사라지고, 얼굴 위에 나타는 것은 슬픈 표정으로 애처롭게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군대가 다가온다는 위험은 사라지고, 대신 핀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해 버렸다.

『내가 널 미워할 리가 없잖니.』

“……이기적이잖아요. 제가 생각해도 가끔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가 있는걸요.”

『원래 네 나이 때는 다 그런걸. 이 아빠도 그랬고. 핀. 내가 너를 만난 게 일 년이 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 오히려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걸.』

“아빠를 괴롭힐 때도 있잖아요.”

『아빠랑 함께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그리고 그런다고 아빠가 다치거나 죽는 것도 아니고.』

“돈에 눈이 멀어서 제 마음대로 뛰쳐나갔었잖아요.”

『그거야 뭐, 할아버지의 마력 때문인 것 같던데. 네 잘못이 아니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돈을 밝히는 게 그리 큰 단점인 건 아니잖아. 누구든 취향이 있는 법이니까.

“……아빠한테 숨기고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고 해도요?”

『핀.』

나는 정령으로 변해 핀의 앞에 나섰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핀의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눈물이 반짝거렸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에, 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나의 손은 핀의 얼굴까지 닿지 않았지만, 몸을 숙여 핀이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울지 마. 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는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이대로 계속 있고 싶어요.”

작은 손으로 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핀의 몸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그 떨림을 멈춰주고 싶은 마음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쉽게도 나의 작은 몸으로는 그 떨림을 멈춰줄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핀의 온기를 느끼며 그 불안감을 덜어줄 수는 있었나 보다.

다시 손을 풀었을 때 핀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아빠.”

“핀.”

“하지만…….”

불안한 미소. 씁쓸한 미소. 핀이 머금은 미소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이번 일로 어쩌면 아빠에게 미움 받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이마에 닿는 잠깐의 부드러움. 그리고 따뜻한 온기. 그것이 무엇인지 채 알아채기도 전에 핀이 숲으로 뛰어갔다.

“핀!”

나는 나무로 돌아가 핀을 찾아 헤맸다. 내가 핀을 발견했을 땐 벌써 군인들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핀의 뒤로 필로우와 곰이 함께 뛰어가고 있었다. 핀이 고개를 돌리며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지 마. 이건 나 혼자서 해야 할 문제야.”

“곰, 곰!”

「우리도 주인님을, 숲을 지킬 의무가 있다!」

“아씨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일지도 모르오!”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리고 아빠를 지키겠다는 그 마음도.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나 혼자 상대해야 하는 거야.”

“곰. 곰.”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더더욱 함께해야 하지 않나.」

“아씨께서 뭔가를 꾸미고 계시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소만, 대체 뭘 꾸미고 계시는 것이오?”

“미안. 시간이 없어. 미리 이야기 해줄 걸 그랬네.”

한참을 달려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이들이 멈췄다. 핀과 다른 아이들이 마주보았다. 곰과 필로우가 핀에게 설명을 요구하듯이 빤히 바라봤지만, 핀은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아빠 곁에서, 혹시 모를 위협에서 아빠를 지켜줘. 부탁해.”

“……곰.”

「……정말 괜찮은가?」

“괜찮다마다. 진짜로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아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곰과 필로우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직 함께 싸우고 싶은 미련이 남는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필로우가 말했다.

“아씨를 믿소이다. 그렇기에, 아씨의 말을 따르겠소.”

“고마워. 필로우.”

마지막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핀은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 * *

나는 핀을 보았다.

그리고 핀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병사들과 마주치지 않고 홀로 가만히 서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핀은, 마력만 본다면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이제는 어머니의 마력을 듬뿍 받아 변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핀의 또 다른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검지만 마치 아버지의 비늘처럼 윤기 있게 반짝거렸다.

머리색을 따라 피부도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완전히 검은 색은 아닌, 갈색의 피부. 마치 이국의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그리고 점점 길어져가는 송곳니.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길어진 송곳니가 살짝 벌어진 입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까지는 예전과 같았다. 하지만, 전에는 없던 변화가 생겨나며, 나는 핀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등 뒤로 솟아나는 두 쌍의 날개. 정령체인 나를 보이지 않게 감쌀 만큼 거대한 검은색의 날개가 솟아났다.

그리고 한 때, 나와 핀을 위협하던 아버지의 꼬리가 핀의 척추 끝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봐도, 이제 핀은 엘프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용과 엘프의 혼혈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누구냐!”

조금씩 숲으로 진격하던 병사들이 핀을 발견했다. 핀의 기이한 모습에 병사들이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검과 창을 내밀었다. 뒤에서 몇 몇 병사들은 활을 당기고 있었고,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지팡이를 세웠다.

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핀의 눈동자는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도마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핀의 눈을 보며 위협을 느꼈는지 병사들이 뒤로 흠칫 물러나며 소리쳤다.

“저, 정체를 밝혀라! 밝히지 않는다면…….”

“광룡(狂龍).”

“뭐라고?”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며 병사들에게 그늘이 드리웠다. 그 어둠 속에서 피처럼 붉은 핀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감히 나의 영역에 들어온 것을 목숨으로 되갚아라.”

* * *

시산혈해(屍山血海)라는 단어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무협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골 단어였으니까.

그 땐 그저 그랬다.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인지, 작가의 필력이 부족한 것인지 소설 속 텍스트로 읽는 겁난이나 무차별 살상은 딱히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산혈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바닥에 널린 시체들의 산. 이것을 시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잘게 찢겨진 고깃덩어리라고 해야 할까.

날개를 펼친 핀에게서 쏘아진 가느다란 마력의 실이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거기에 닿은 병사들의 몸은, 마치 녹아내리듯이 산산이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 죽어!”

모래처럼 흘러내린 동료들의 잔해 위에 엎어진 한 병사가, 다가오는 핀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대는 핀에게 부딪힌 순간 수수깡처럼 부러졌고, 남아 있는 창대를 보며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핀을 올려다보던 병사의 머리 위로 핀의 마력이 화살처럼 꽂혔다.

“발사! 저 괴물을 죽여!”

소란이 나자 다른 곳에 있던 병사들도 핀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숲에서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화살을 쏘았다. 핀의 머리위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화살들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그대로 분해되며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억!”

영화와 다르게 짧고 묵직한 비명소리가 뚝뚝 끊어지며 들렸다.

그 짧은 신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활을 쏘던 궁수들이 모래처럼 흩어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만일 이게 영화였다면 죽어가는 와중에 동료들에게 유언이라도 남겼겠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히에엑! 주, 죽기 싫어!”

아직 남아 있는 병사들이 숲 밖으로 줄행랑쳤다. 핀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라 숲을 내려다봤다. 고고한 한 마리의 용처럼, 숲으로 들어오고 있는 다른 병사들을 찾아내 그곳으로 내려앉았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새롭게 내려앉은 그 자리에서 똑같은 참상이 벌어졌다. 인간들의 비명소리, 온전한 모습도 남기지 못한 채 바닥으로 흩어지는 시신들.

“도, 도망쳐! 전원 도망치라고 전해!”

처음 핀을 마주했을 때, 간신히 무기를 부여잡고나마 자신의 사명을 다해 공격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진지 오래였고, 이제는 핀을 만나기도 전에 어떻게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숲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많던 병사들 중에 핀이 처음 나타난 지점 이상으로 들어온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숲에 들어왔던 병사들 중 반 이상이 핀에게 죽어 땅으로 흩어졌고, 나머지들은 숲 밖으로 전력을 다해 도망친 뒤였다.

이제는 병사들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핀은 멈추지 않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을 따라 숲 밖으로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적이라고 하지만, 참혹한 살상에 나는 더 이상 핀이 그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려고 했다.

“아뇨. 아직 더 필요해요. 저들 뒤에 있는, 진짜를 만날 필요가 있어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병사들이란…… 그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거.”

『하지만!』

순간, 핀의 얼굴에서 아까 전 그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게 무언가 전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숲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아.』

나는 숲 밖까지 시야가 닿지 않았기에,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밖으로 날아가는 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핀이 노리던 것이었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저 생판 모르는 인간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도 있지만, 나의 마음 속 작은 공간을 차지할 뿐, 진정으로 내가 걱정되는 것은…….

내가 나무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이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감옥에 갇혀 움직일 수 없는, 죄수가 된 심정으로 나는 핀이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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