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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출정
엘퀴라즈 숲. 그 광활하고 넓은 숲의 입구에서 병사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영을 갖추고 그대로 진격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달랐다.
아니, 이것을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병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나서는 이유가 전쟁이 아니라 토벌이라는 거지.”
숲에 진입하기 전, 군대는 잠시 숲 어귀에서 진격을 멈추고 있었다.
저마다 아는 얼굴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병사들. 그 모습은 흡사 잠시 소풍을 나온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토벌이라니. 설마 마물들을 우리가? 에이. 말도 안 돼. 자네는 그 소문도 못 들어봤나?”
“정화됐다는 이야기야 벌써 들었지. 그래도 소문일 뿐이잖아.”
“내가 보기엔 그냥 소문이 아닌 것 같은데. 저 숲을 좀 보라고. 저기 어디에 그 끔찍한 마기가 있어 보이나.”
“원래 저랬어. 안으로 더 들어가면 우리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을걸?”
한 병사가 숲을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저 너머에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게 뭔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그는 동료들에게 자랑하듯이 떠벌렸다.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살아. 군인이 돼서 돈 받으면서 살아왔으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하는 거지 뭐.”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게. 숲은 안전하니까.”
“마법사님.”
이야기 중인 병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로브에 묻은 풀떼기를 탁탁 털며 나타는 마법사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마법사는 그들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병사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마법사라는 존재 때문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마법사가 그들을 말리며 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러지 말고 다들 앉게나. 적어도 오늘 우리들은 한 조가 되어 움직여야 하잖나.”
“아, 예. 그럼.”
일어나던 병사들이 마법사 주변으로 다시 모여 앉았다. 그들은 이번 출정에서 그 마법사와 한 조가 되어 움직이기로 결정된 병사들이었다.
“다들 궁금한 게 많으리라 생각하네만, 어떤 것부터 말해줘야 할지 결정을 못 하겠군.”
“수, 숲은 안전합니까?”
한 병사가 재빨리 물었다. 방금 전에 한 번 살지 두 번 사냐며 큰소리를 쳤던 병사였다. 그 목소리가 워낙 커 마법사도 오는 도중에 그 말을 들었기에, 그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마법사는 싱긋 웃었다.
“안전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진 않았지만 적어도 척후조와 함께 내가 가본 곳까지는 평범한 숲과 다름이 없었네.”
“하아.”
병사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큰소리치던 병사도 한숨을 내쉬었기에 다른 병사들이 희끗희끗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쓱한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마법사에게 질문했다.
“그럼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자네들 임무는 아주 간단하다네. 혹시 모를 위험에서 나를 지키는 일이지.”
“위험…….”
다시금 병사들이 몸을 굳히며 긴장했다. 엘퀴라즈 숲에서의 위험이라니. 그 말은 마물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의 긴장은 뒤이은 마법사의 말에 의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빤히 보이는군. 걱정하지 말게. 마물과 싸울 일은 없을 거야. 소문은 사실인 것 같으니.”
“숲이 정말로 정화됐단 말입니까?”
“그래. 혹시 모를 위험이라고 해봤자 야생동물들 정도겠지. 자네들, 야생동물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병사들은 저마다 화색이 감도는 얼굴로 당당하게 외쳤다. 그런 임무라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그런 임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뭐, 그것뿐만 있는 게 아니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마법사. 다시금 병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푸핫. 장난일세. 다른 임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그게 무엇입니까?”
“아주 좋은 임무지. 잘하면 한몫 단단히 챙겨서 갈 수 있을걸?”
“예?”
한 몫 단단히 챙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병사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감돌았다.
“이번에 숲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서지. 각 조의 조장인 마법사들이 전달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하고.”
뜸을 들이며 병사들의 표정을 즐기던 마법사는,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곤 임무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들, 엘퀴라즈 숲의 전설에 대해 알고 있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 전설 속에 나오는 세계수에 관련된 임무라네.”
“세계수 말입니까?”
병사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무엇인가.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나무이지만, 지금까지도 시장에서 가짜가 무더기로 팔리고 있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저 상품명에 ‘세계수’라는 이름만 붙어도 고급 물품으로 보이게 만드는, 신비로운 효과를 지닌 전설의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다네. 세계수. 이번에 숲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그거지. 숲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정화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세계수가 저 숲에!”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인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에 대한 애국심?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좋아서?
그런 이유로 군인이 된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다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니던가. 돈을 벌기 위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돈이라는 것에 얽매여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고리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일확천금의 보배. 그것이 바로 세계수가 아니던가.
“그래. 그걸 발견하는 게 이번 출정의 주요 임무라네.”
“하아.”
들뜬 병사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발견해봐야 저희 것도 아니고 높으신 분들 것 아닙니까. 우리한테 뭐 떨어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배만…….”
말을 하던 병사는 순간 못 할 말을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마법사. 모험가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그저 그런 마법사가 아니라 왕궁에서 일하는, 소위 그가 방금 말한 높으신 분이 아니던가.
“마, 마법사님 방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니라 그게…….”
“괜찮네. 다 이해하네. 그런 불합리한 점이 싫은 거겠지?”
“아, 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지만 뒤 이은 침묵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제일 먼저 세계수를 발견하는 조에게는 엄청난 양의 포상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정말이고말고. 거기다가 세계수를 발견한다면 이번 원정에 참가한 모두에게 포상금이 있을 걸세. 굳이 우리가 먼저 발견할 필요도 없지.”
“우왓!”
병사들의 화색이 몇 번이나 바뀌는 모습을 보며 마법사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는 이 정도 했으면 병사들의 사기진작이라는 상관으로서의 임무는 확실하게 수행했다고 느꼈다.
“자자. 그럼 쉬는 시간도 거의 끝난 것 같군. 숲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세나.”
“예!”
* * *
“장관이로군.”
군대의 가장 후미. 펼쳐진 천막 아래로 드리운 그늘에서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병사들을 바라보던 늙은 왕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웃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간사하고 비겁한 겁쟁이의 웃음 같았다. 만일 주변에 있는 장군과 신하들이 제정신이었다면 결코 선보이지 않았을 그런 웃음이었다.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전하.”
늙은 왕의 질문에 장군과 신하들이 대답했다. 어딘가 딱딱한 말투와 초점이 맞지 않은 눈동자가 그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금은 심심하군. 한 명 정도는 세뇌하지 말 걸 그랬어.”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어찌 이리도 간사하단 말인가.
늙은 왕은 조금이지만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제대로 맞받아 줄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인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자신이 왕자를 시켜 암살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꿈이 눈앞에 있어서 그런 건지 나도 참 감성적이 돼 버렸군. 그 녀석이 보고 싶다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드렌 왕자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세뇌마법을 걸었는데도 주변에 있는 녀석들처럼 단순한 꼭두각시도 아니요, 적절하게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왔었다.
“아쉽군. 아쉬워.”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늙은 왕은 조를 편성하여 숲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의 병사들을 보았다.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숲으로 들어가 세계수를 찾아올 것이다. 자신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된다.
“하이엘프여. 과연 어떻게 나올 텐가?”
늙은 왕은 수정구슬 너머에서 본 하이엘프를 떠올렸다. 드렌 왕자라는 위험한 인간이 숲에 침입했는데도 그를 막기 위해 나온 하이엘프는 단 한 명이었다. 자아는 있지만 아직 미숙한 세계수일까.
한 명의 하이엘프와, 그 엘프가 길들인 것으로 보이는 두 마리의 동물. 그것이 세계수를 지키는 얼마 안 되는 수호자라고 늙은 왕은 판단했다.
“지키는 것은, 싸우는 것보다 힘들진대. 큭큭.”
제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혼자라면 다수를 상대로 버거운 법. 거기에 지켜야 할 상대가 있다면 더더욱 집중도, 힘도 분산될 수밖에 없다.
늙은 왕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하이엘프나, 엘프가 기른 동물들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세계수니까.
수많은 병사들이 개미처럼 몰려가 세계수를 손에 넣으려 한다면 자연스럽게 하이엘프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할 것이고, 밀려드는 군대에 의해 결국엔 짓밟힐 것이다.
비록 수정구슬 너머에서 본 하이엘프가 드렌 왕자만큼이나 강했지만 늙은 왕이 보기엔 둘은 비등한 수준이었다.
드렌 왕자가 살아 있었다면 이 대군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지킬 것도 없는 드렌 왕자라 할지라도 이 많은 수의 마법사와 병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하물며 지켜야 할 것이 있는 하이엘프라면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자, 병사들이여. 어서 나를 위해 세계수를 가지고 오거라.”
설레는 마음을 품고서 늙은 왕이 장군들을 향해 눈짓했다. 장군들의 팔이 하늘로 뻗자, 북이 울리며 병사들에게 진격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개미처럼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늙은 왕의 속내도 모른 채, 그저 꼭두각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