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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일기장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연구실을 옮겼다. 하루 종일 짐을 옮기느라 팔다리가 뻐근해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새로 연구실을 옮겼으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연구실을 옮긴 이유에 대해서 적어보자면, 더 이상 멍청이들이 나를 보며 조롱하는 것을 참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법이라는 심오한 학문에 대해서 눈곱만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마법들을 누가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미 누군가 만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뛰어난 마법사의 기준으로 삼다니. 대체 그렇게 해서 언제 나만의 마법을 만들고 언제 위대한 마법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을 비웃어선 안 된다. 능력이 없는 자들이므로, 그 방법만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더욱더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거겠지.
그들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온정과 용서를 베풀 정도로 나의 마음은 넓지 않다.
언젠간 나의 연구가 불가능한 꿈이라며 비웃은 멍청이들은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피곤하다. 오늘은 이만 줄이고 잠을 자야겠다. 숙면은 뇌를 활성화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 *
“흐음.”
늙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걷는 와중에도 그는 일기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한 장씩 곱씹어보듯이 일기장을 넘기는 그의 손은 남은 일기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 * *
꾸준히 일기를 적겠다고 선언하고 하루도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잠시나마 변명을 해보자면, 연구의 진척이 생겨서 일기를 쓸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변명을 해봐야 일기를 쓰겠다는 약속은 나라는 존재에게만 한정되는 규약이기에 딱히 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번 실험을 통해 물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른바 ‘전이’에 대한 실마리가 생겼다. 이것으로 나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멍청한 다른 마법사들은 전이와 순간이동에 대해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순간이동이란 평범하고 단조로운 마법 따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전이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다.
순간이동은 그저 존재를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그것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이란 이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좀 더 광의의 범위에서 보자면 순간이동이란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행할 수 있는 단순한 이동에 불과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만 한다면, 굳이 순간이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걷거나 마차를 타는 등의 이동수단을 이용하여 결과물을 달성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전이는 다르다. 적은 마력으로도, 다수의 대상에게 복수적용이 가능하다. 이것만 성공한다면 기존의 마법체계를…….
* * *
“내 선조지만 바보 같군.”
늙은 왕은 읽던 부분을 넘겨 버렸다. 선조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법의 장점을 주구장창 설명한 부분이기에 그 부분은 항상 지루했다.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느라 흥분했는지 글씨가 날아다니는데다가, 낡고 찢어지고 잉크가 번져 읽기도 힘들었다.
군데군데 해석이 가능한 부분을 짜맞춰보면, 결국 그의 선조는 전이마법이라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평범한 순간이동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지에 대해 열심히 설파하고 있었지만 왕이 보기엔 기존의 순간이동보다 마력의 소모가 적고 대량의 인원이 동시에 이동할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굳이 전이라는 마법이 없어도 시대가 지나면서 순간이동의 마법이 개량되며 현재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선조의 꿈이 실현되었어도 시원찮은 반응만 나왔을 것이다.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기던 왕은 어느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 그 부분은 그의 선조가 처음으로 다른 용사들을 만난 순간을 기록한 장이었다.
* * *
나는 지금 들판에 다른 동료들과 누워 일기장을 적고 있다.
완성된 마법을 세상에 발표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세상은 지금 종족들끼리 서로 싸우기보단 마왕이라는 하나의 적을 두고 뭉치고 있었다. 내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법에만 집중하는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딱히 밖으로 나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왕이라는 존재가 나의 흥미를 이끌었다.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이능(異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이 마법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능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나는 어느 한 무리의 파티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독특했다. 인간과 보기 힘들다는 드워프, 마족, 엘프, 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여섯 명이었다. 그중 몇 명은 나도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인들이었지만, 그 중심점이 되는 인물은 인간인데다가 심지어 성도 없는 평민이었다.
그는 중심점이 될 만큼 매력 있는 인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처음이다. 나의 연구결과에 대해 이렇게 흥미롭게 들어주는 인물은. 그는 경청이란 게 무엇인지 아는 인물이었다. 내 연구에 대해 글씨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들어주었다. 거기에 더해서 내게 질문까지 하는 그를 보며 나는 마치 제자라도 하나 키우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제자를 두는 건가.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그는 나의 마법 실력에 대해 상당히 감탄하였다. 비록 내가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지만 나의 실력은 자부하건데 인간들 중에선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들과 함께하며 나는 마왕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마음에 들었고, 마왕에도 흥미가 있으니 일석이조란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 * *
“국왕이시여.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 곧 나가도록 하지.”
검은색이 두드러진 군복을 입은 장군 한 명이 나타나 늙은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출병식이 준비됐음을 알렸다.
늙은 왕은 수정구슬 너머로 하이엘프의 존재를 보는 순간부터 바로 출병 준비를 시작하라고 일러두었다.
“하이엘프라…….”
그는 생각난 김에 일기장을 빠르게 넘겨 하이엘프에 관한 구절이 있는 곳을 읽기 시작했다.
* * *
놀랍다. 이 숲에 온 뒤로 나의 상식이 깨지고 있다. 세상이란 이리도 신기한 것들이 많았단 말인가.
산보다 두껍고 구름까지 닿을 만큼 거대한 나무가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것은 세계수라 불리는 나무였다.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세계수란 이명이 잘 어울릴 만큼 큰 나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크기만 한 나무였다면 경이로운 시선을 받았을지언정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이 마왕에 대해 들었을 때만큼 나의 흥미를 이끌었다.
이곳에 사는 엘프들은 세계수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엘프들이라 들었다. 그들은 보통의 엘프와 다르게 푸른 눈동자를 가진, 스스로를 하이엘프라 부르며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마력의 양은 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 우리를 보고 경계심을 가지며 마력을 뿜어댔다. 그때 느꼈던 마력이란, 마족이나 평범한 엘프를 아득히 넘어서는 양이어서 나는 그들이 진짜로 엘프인지 의구심을 느낄 정도였다.
세계수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런 존재들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이란 말인가?
그 의문은 내일 풀릴 것이다. 우리들 일곱이 인류를 대표해서 세계수를 만나기로 했다.
나무와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나를 흥분시키는 관심사 중 하나라서 잠이 오지 않는다.
* * *
“그래. 나도 흥분되는군.”
하이엘프가 있다면 세계수도 있다. 일기장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면 분명 엘퀴라즈 숲에 세계수가 있을 것이다.
늙은 왕은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가 알기론 천 년 전 엘퀴라즈 숲의 세계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자아를 가진 세계수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자아가 또렷하게 생성되어 엘프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하이엘프를 만든 세계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아를 가진 세계수를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최초가 아닌가. 모두가 자신을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수만 있다면 왕국은 더욱 더 거대해질 것이며 더욱 발전할 것이다.
그럼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겠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왕이 아니라, 비루스 왕국을 누구보다 강력한 강대국으로 만든 왕으로서. 국내에도, 국외에도.
나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역사서에 이름 한 줄 적히는 흔한 왕 따위는 될 생각이 없다.
그는 출병식에 앞서 마지막 장으로 일기장을 넘겼다. 세계수를 만나는 내용이나 다른 내용은 어차피 마왕과의 전쟁 준비로 바쁜 나머지 짤막하게만 적혀 있었기에 일기장을 조금 넘기자 거의 끝부분에 다다랐다.
* * *
세상이란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진실을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른다. 차라리 내가 벙어리였다면 마음이 훨씬 가벼웠을 텐데.
술이 없으면 이제 잠들 수 없다. 오로지 술만이 나의 친구다. 살아남은 다른 용사들을 만난 것이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세간에선 나에 대해 용사라 떠받들어주고 있다.
용사.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나의 노력이나 평가는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제일 뒤늦게 합류한 놈이니까. 용사들의 무용담을 적은 책에도 나에 대한 내용은 하찮을 정도로 적다. 막바지에 합류한 놈이지만 그래도 파티원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끼워주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심지어 길거리의 어린아이들도 용사 놀이를 할 때 나의 역할만큼은 피하거나, 아예 나란 존재를 빼고 한다. 정말 우연찮게 지나가다 그 모습을 목격 했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한 것을 후회했을 정도다.
빌어먹을. 내가 없었다면 마왕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 같아?
세계수에게 건네받은 무기는 가히 전설이라 부를 수 있는 무기였지만 그걸로 마왕을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아?
다 내가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전이마법을 만들지 않았다면 마왕을 세계수와 공멸시킬 수 없었다고.
나를 용사라 떠받들어 주면 뭐하는가. 뒤에선 용사 중에 제일 약하고 제일 비중이 없는 존재에 불과한데. 그저 이름 몇 줄 적힌 것이 전부인데.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차라리 마왕과 세계수를 공멸시키자는 제안을 내가 먼저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뿌듯해하며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 녀석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왔을까. 왜 내가 먼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아. 말하고 싶다.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싶다. 모두 내 덕분이라고. 내가 없었으면, 내 마법이 없었으면 마왕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다 내가 있었기에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인데. 그 엘프 녀석이 뭘 했는가? 활이나 몇 발 쏘다가 마왕에게 꼬치처럼 찔려 죽지 않았는가. 그 아인 녀석이 무엇을 했는가? 그저 용맹이라 부르는 만용을 가지고 마왕과 싸우다 죽지 않았는가. 그 마족이란 녀석은 또 어땠는가? 그렇게 과신하던 힘만 믿다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잖아.
다 내 덕분이라고. 억울하다. 왜 말을 하면 안 되는가.
그래. 이게 다 다른 종족 놈들 때문이다. 인간들이라면 대의를 위한 희생쯤이야 이해할 수 있다. 그 빌어먹을 엘프니 아인이니 마족이니 하는 놈들의 고지식한 생각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놈의 평화가 뭐라고. 내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데 세상이 평화로워서 무엇하겠는가.
내일, 사람들에게 말하자. 평화 따윈 이제 관심 없어.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마왕을 물리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내가 없었다면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었을 거라고.
* * *
늙은 왕은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선조의 최후가 어땠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그 사실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은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병사들을 보며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당신처럼 실패하지 않겠어.”
그동안 왕으로 재위한 다른 자들이 일기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선 늙은 왕은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시시한 생각들뿐이었겠지.
그는 일기장을 보고 이름이란 것의 중요성을 느꼈다.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면 무엇 하겠는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면 그 인생을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그래서 늙은 왕은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었다. 오래 살면서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역대 국왕들 중 누구도 세우지 못한 새로운 역사의 갈림길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잘해야 범재(凡才). 선조의 재능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아 마법에 재능이 약간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왕.
그래서 늙은 왕은 생각했다. 내가 뛰어날 수 없다면, 뛰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늙은 왕은 지팡이를 꾹 쥐었다.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세계수로 만들어진 지팡이. 마법이 뛰어나지 않은 그라 할지라도 천재인 자신의 아들을 세뇌하고 조종할 수 있게 해주었던 신물.
“이제 시작이군.”
뛰어난 자들을 모두 처리한다면 왕국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 꼭두각시로 만들면 될 뿐이었다. 이들이 세우는 모든 업적들은 자신의 공이 되어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나저나 아쉽군. 살아 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는 마법이 끊어져 행방을 알 수 없는 아들을 생각했다. 아쉽게도 정신력이 강한 자에겐 세뇌가 완전히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넌지시 조종하는 것은 가능했기에, 꽤나 쓸 만한 도구로 써먹었었다.
예를 들어, 위인이라 불리는, 뛰어난 재능과 세뇌조차 먹히지 않는 자들을 암살할 때…….
“뭐, 언젠간 처리할 녀석이었으니까. 잘됐군.”
늙은 왕이 병사들의 앞으로 발을 디뎠다. 가장 앞줄에 선 장군들이 그를 향해 경례했다. 이지가 사라져 텅 빈 눈동자를 가진 장군들. 자신의 손짓하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자결할 충실한 꼭두각시들.
왕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일말의 불안감과 함께 내쉬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사가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나의 위대한 업적의 첫 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