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1화 (8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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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자세히 눈동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갈색이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과거의 기억 속 아기의 눈동자도 갈색이었고, 금발에 갈색 눈동자라 두 색이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파란색으로 바뀌었어?』

근데 지금 드렌 왕자의 눈동자는 파란색이 되어 있었다. 핀처럼 진한 푸른 눈동자는 아니었지만,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색이었다.

아, 설마 갈라진 영혼의 틈새에 내 마력을 채워 넣은 영향인가? 이름만 안 지어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냥 치료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영혼에다가 마력을 집어넣어서 그런 건가.

『드렌 왕자?』

나는 왕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혹시나 내 마력에 영향을 받아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감이 없잖아 있다.

이 녀석. 강하니까 내 부하가 된다면 이래저래 쓸 만할지도 모르겠네. 광증(狂症)이야 영혼에 들러붙어 있던 마력도 떼어냈으니 나았을지도.

“……하하하하.”

아니네. 갑자기 웃고 있잖아. 아직도 미친놈이었어!

“으하하하!!!”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아주 배를 잡고 바닥에서 구르면서 폭소를 터트리고 있다.

아. 의료자격증도 없이 함부로 머리를 건드린 게 화근이었나. 아, 머리가 아니라 영혼이었지. 머리보다 영혼이 더 민감한 곳이라서 어디 잘못된 건가?

“으엑. 아빠. 쟤 이상해요.”

『핀. 저런 애들한텐 가까이 가면 안 돼.』

핀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하긴 나 같아도 길에서 이런 식으로 웃고 있는 나체의 남자를 보면 무서워서 도망가겠다.

근데 너, 저 녀석이 알몸으로 있는 건 딱히 상관 안 했으면서 저런 식으로 웃는 건 싫은 거냐.

“으하하하! 그래. 아아. 나란 녀석이란 참…….”

한참을 웃던 드렌 왕자가 웃음을 멈췄다. 아직 광소의 여파가 남아 미소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이 시름을 덜고 개운해졌다고 느꼈다.

“누구신지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체가 짐작은 가지만……. 언급되는 걸 싫어하실 것 같군요.”

드렌 왕자는 정신을 차렸음에도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누워 허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사인사를 날렸다. 어째 나한테 하는 말 같은데……. 아니겠지?

“여러분께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 미쳤다고 생각했던 드렌 왕자가 일어나서 멀쩡한 말투로 핀과 아이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니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다. 반면에 내가 제대로 치료했다는 뿌듯한 감정도 함께 든다.

“그럼 이만.”

인사만 하고 그냥 가는 거냐! 지금 장난해? 네 마음대로 들어올 때는 언제고, 들어와서 행패까지 부려놓고 나갈 때도 마음대로 나가겠다는 거야?

치료는 해줬지만 그건 아니지. 적어도 사과하는 태도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으면 모를까, 숲을 불태워 놓고선 ‘여러분께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한마디로 끝내려고?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아. 근데 ‘그럼 이만’은 좀 아니잖아. 쿨 하게 퇴장하는 연습이라도 하는 거냐. 그렇다면 실패야. 뭔가 빈정대는 것 같아서 짜증나거든?

“거기서. 너, 지금 어딜 도망가려는 거야?”

그렇지, 핀! 어서 막아. 사죄의 보상으로 저 녀석한테 이것저것 좀 알아내야겠어. 돈 같은 건 쓸모없으니까 정보라도 알아내는 게 최선이겠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핀과 아이들이 드렌 왕자 주위에 서서 그를 막았다. 아이들도 그의 어처구니없는 사과와 빠른 도주준비에 화가 났는지 상당히 심기 불편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나갈 때는 아니란다.”

핀이 드렌 왕자의 뒤로 재빨리 돌아가서 그의 팔을 붙잡고 꺾으려고 했지만, 핀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왕자의 팔을 잡기 전에 움직임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곰과 필로우 역시 무언가 행동을 보이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

방심했다. 녀석을 치료해 준답시고 마력의 흐름을 멈춰놓았던 힘을 풀어버렸어.

“역시 그냥 떠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겠군요. 그렇다면 그 분을 한 번 만나 뵙고 가는 것도 좋을지도.”

왕자가 향하는 시선. 그곳은 바로…….

“말을 걸지 않으시는 건 정체를 감추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자아가 아직 덜 여문 탓입니까?”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 녀석. 나의 존재를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녀석의 하늘색 눈동자가 빛을 머금으며 파랗게 빛났다. 설마 영혼에 주입한 내 마력 때문에?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는데.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 내 힘의 일부가 빠져나가 이름을 지어준 자에게 부여된다. 그것은 육체가 아니라, 더 깊숙한 무언가를 향하는 것 같다.

그 깊숙한 무언가란 바로 영혼이었나.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어도, 드렌 왕자의 영혼에 집어넣은 나의 마력 때문에 그가 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저쪽에 그분이 계시는 건가요?”

하지만 나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는지 드렌 왕자가 핀에게 물었다.

“글쎄. 무슨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핀. 거짓말을 할 거면 좀 더 표정관리를 하는 법을 연습하려무나. 시선 처리 좀 하고. 눈이 옆으로 돌아간 게 누가 봐도 거짓말이란 게 티가 나잖아!

“저쪽에 계신 게 확실하군요. 그냥 떠나는 게 불만이라면 인사라도 드리고 가겠습니다.”

드렌 왕자가 내 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 돼. 오지 마.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단 말이야. 그리고 방금 전까지 숲을 불태우겠다는 미친놈을 어떻게 믿어.

“동작 그만.”

어깨에 올려진 손의 압력을 느끼고 드렌 왕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핀이 있었다.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라는 궁금증보다 핀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이 나의 시선을 이끈다. 아버지의 마력이 핀에게서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곰.”

「멈춰라.」

“움직이지 마시오.”

핀 말고도 곰과 필로우도 드렌 왕자를 경계하며 마력을 풀어내고 있었다. 곰처럼 흐느적거리는 마력이 왕자의 주변에서 그를 감시했고, 필로우의 마력은 끈처럼 풀어져 왕자의 몸을 묶고 있었다.

하지만 드렌 왕자는 주변에서 넘실대는 곰과 필로우의 마력은 신경 쓰이지 않는지 핀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구속에서?”

“고수에게 똑같은 방법을 여러 번 쓰다니. 그런 건 이제 통하지 않아.”

“그런가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드렌 왕자의 주변에 있던 마력들이 한순간 녹아내리듯이 사라져 버렸다. 곰과 필로우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녹아내린 마법이 한데 뭉치더니 핀의 몸을 강타했다.

너 착한 놈 된 거 아니었냐!

“뭐 했어?”

하지만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이 그의 마력은 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핀의 몸에 닿기도 전에, 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마력이 드렌 왕자가 조종하는 마력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저기, 처음 봤을 때부터 너한테서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내버려뒀었는데 말이야. 아마 그것도 네 머릿속에 있던 마력 때문이었겠지? 게다가 지금은 전보다 더 친근한 느낌이 들어. 꼭 뒤에 있는 다른 아이들처럼 말이야.”

“그거 다행이군요. 엘프와 친해지게 되다니.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너네, 대화는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어째 무섭다.

“근데 마음으론 친근한 기분이 든다고 해도, 머리로는 널 용서하거나 인정한 건 아니거든?”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쪽으론 못가. 내가 허락 안 해.”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드렌 왕자의 주변에서 마력이 요동쳤다. 핀도 그에 대응하여 아버지의 마력을 풀풀 풍겨댔다.

“힘으로 뚫고 가는 수밖에.”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두 사람의 마력이 공중에서 휘몰아치며 주변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미 싸움은 진행 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크윽. 굉장한 마력이외다!”

“곰!”

「버틸 수가 없다!」

마력이 휘몰아치는 불타버린 대지 위에서 피할 곳은 없었기에 곰과 필로우가 간신히 몸을 숙이며 날아가지 않게 땅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날려갈 것만 같았기에 나는 둘을 잡아 날아가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후우. 뭐, 정 그러시다면 포기하겠습니다. 반드시 만나야 할 이유도 없고, 만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은 당신에게 해도 될 것 같으니까요.”

“하고 싶은 말?”

“비루스 국왕을 조심하십시오. 이제야 그가 어떻게 절 감시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분명 숲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됐겠지요. 그는 분명 숲을 노리고 이곳으로 올 게 분명합니다.”

주변에서 몰아치던 마력이 잔잔해지며 드렌 왕자를 감쌌다. 드렌 왕자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뭐, 당신이 있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

“그럼 전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드렌 왕자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사내가 공중에 부유하고 있으니 뭔가 더 변태 같다.

“할 일이 없었어도 이 꼴로 돌아다닐 수는 없겠네요.”

환한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빛이 사라진 뒤, 그 자리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휑했다.

남은 것이라곤 조용히 고민하고 있는 핀과, 마력이 폭풍이 사라지고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있는 필로우와 곰뿐.

그리고 머리 한가운데 구멍이 난 듯이 동그랗게 불타버린 숲의 일부분뿐이었다.

『뭐야! 그 녀석!』

* * *

“큭큭큭……. 드디어 발견했다.”

어두운 실내에서 홀로 왕좌에 앉아 웃고 있는 늙은 왕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뛰고 있어서 왕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고통스러웠다. 당장에라도 숲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붙잡고 억누르려니 계속해서 터질 듯이 심장이 뛰었다.

“하이엘프…….”

늙은 왕은 책상 위에 놓인 수정 구슬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법과 함께 수정구슬은 두꺼운 금이 가 있었다. 갈라진 그 틈새의 예리한 단면이 그의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늙은 왕은 이런 자극조차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대로 처리하고 죽었으면 좋겠지만 놈에게 그것까지 바라는 건 무리겠지.”

드렌 왕자에게 걸었던 마법. 그 마법은 단순히 그의 심성을 뒤트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수정 구슬을 통해 늙은 왕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정 구슬로 본 엘퀴라즈 숲. 마기가 정화되어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던 그 숲.

늙은 왕에게 정화된 숲보다 더욱 관심이 쏠린 존재. 바로 푸른 눈의 엘프였다.

“하이엘프라. 그렇다면 세계수도 있을 것이다. 미숙하고 쓸모없는 어린 나무가 아니라 하이엘프를 만들어낼 정도로 완숙한 녀석이.”

심장을 부여잡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손끝에 걸리는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늙은 왕은 그곳에 감춰두었던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은 낡고 허름했다. 마법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바스러져 먼지가 되었을 만큼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나는 결코 당신처럼 되지 않을 겁니다.”

왕이 된 후로 몇 번이나 읽었을까. 오로지 왕이 된 자만이 읽을 수 있는 가문의 보물. 태초에 왕가를 세운 용사가 쓴 일기장.

늙은 왕은 처음 일기장을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선조의 모험담과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흥분감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용사의 일족이라는 자부심은 남아 있었지만, 용사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흥분감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초조함뿐. 늙은 왕은 오히려 용사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발버둥 쳤다.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펼쳐진 일기장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늙은 왕이 중얼거렸다.

“당신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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