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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화염(3)
검은 태양이 대지에 떨어졌다.
삭막한 대지 위에 남아 있던 몇 그루의 나무들이 닿지도 않았는데 위에서부터 증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려둔 그림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대지에 검은 태양이 부딪혔다. 검은 태양이 계란처럼 부서졌다. 안에 담긴 내용물이 흘러나와 대지를 적셨다. 화염으로 뒤덮여 검게 물든 대지가, 부글부글 끓으며 신음소리를 애처롭게 흘렸다.
“흐아아아. 죽을 뻔했다.”
“저런 무시무시한 공격……. 처음 봤소이다. 아씨나 무뢰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소.”
“고, 곰! 곰.”
「마, 막을 수 있었다! 아쉽다. 나의 힘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는데.」
“그대가 제일 먼저 도망치지 않았소?”
다행이다. 아이들은 검은 태양을 보고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는지, 재빨리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나는 따로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검은 태양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계획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구출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을 믿고 계속 ‘그것’에 대해 힘을 쓸 것인가.
검은 태양을 보는 순간 나는 계획을 포기하려 하였다. 왕자를 쓰러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게 있어서 아이들은 삶 그 자체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내 도움 없이도 검은 태양에서 도망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고 난 계획을 계속 유지했다.
아이들을 좀 더 믿어야겠다. 굳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똑똑한 아이들이니까.
“땅이 흐물흐물해.”
갓 구운 카스텔라처럼 땅이 물렁물렁해져 버렸다. 검게 그을렸으니 실패한 카스텔라인가.
『됐다. 이제 싸워도 돼. 계획 성공이다.』
“아빠. 말이 잘 안 들려요.”
『이제 싸워도 돼! 핀!』
나는 계획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핀이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기에 더더욱.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핀이 물을 뿌리자 땅이 ‘치익’ 소리를 내며 굳었다. 그 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으며 아이들이 드렌 왕자에게 접근했다.
“숲이…… 불타다니…… 아아…….”
저기요. 이거 다 댁이 한 일이거든요? 미쳐도 이 정도 미치니까 미친놈이 아니라 뭔가 대단한 녀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크으으윽……. 이 가짜 엘프. 네 녀석 짓이냐!”
드렌 왕자가 다가오는 핀을 보며 외쳤다. 아니 그러니까 댁이 했다니까요.
나는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꼈다. 아이들도, 드렌 왕자도 눈에 초점이 풀린 듯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물속에서 물 밖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리고 있었다.
“숲을 태운 죗값을 치러라!”
왕자가 손을 뻗었다. 검은 불꽃이 그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
중간에 구멍 난 호스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드렌 왕자의 불꽃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일렁거리다가 꺼졌다.
“이익! 왜 마법이!”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려 했지만, 녀석의 불꽃은 이젠 땅으로 떨어지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가스가 떨어진 라이터처럼 잠시 동안 공중에 머물며 그 얼굴을 비추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길 수차례.
“어째서…… 마법이 발현되지 않지?”
이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다가오는 것들을 마력으로 억눌러 멈추게 하는 힘. 멀리 있는 적을 불태우는 검은 불꽃.
게임으로 따지자면 혼자 탱커도 하고 딜러도 하고 원거리 공격수도 하는 것이 아닌가. 왕자는 진짜로 게임 캐릭터로 나온다면 밸런스 붕괴로 유저들에게 욕을 먹을 캐릭터였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나는 드렌 왕자를 관찰하며 몇 가지 약점을 찾아냈다.
첫 번째. 드렌 왕자가 마법을 쓰는 방식이다.
드렌 왕자의 마력은 별 볼 일 없다. 처음 숲에 들어왔을 때, 나는 평범한 마력만 가지고 있는 왕자가 강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숲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동물들조차 드렌 왕자와 비슷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더 할 말이 필요할까.
하지만 왕자는 평범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위력의 마법들을 사용했다. 나는 그 원리가 나와 같이 공기 중에 흩어져 있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한마디로 자기 물건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드렌 왕자는 나의 존재를 아직 모르고 있다.
자신처럼 주인 없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저격수처럼 몰래 정체를 숨기고 여러 가지 변수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래서 준비했다. 녀석을 잡을 함정을. 밸런스를 붕괴시키는 캐릭터를 너프시킬 절호의 덫을.
세 번째. 드렌 왕자의 힘이 미치는 범위.
드렌 왕자는 그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 이상 다가왔을 때만 아이들을 마력으로 구속하고 있었다. 멀리 있어도 구속할 수 있다면 쉽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마력을 조종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네 번째. 가장 중요한 약점. 이것이 없었다면 다른 약점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나오라고! 나는……. 나는 엘프인데 왜! 엘프는 마력의 친구잖아!”
……보다시피 드렌 왕자가 미친놈이라는 것이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겠는가. 소프트웨어가 바이러스에 걸려서 맛이 가버렸는데. 아무리 오버 밸런스급의 캐릭터라고 할지라도, 다루는 자가 미숙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다.
만일 드렌 왕자가 멀쩡했다면 내가 만든 함정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존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이제 마법은 못 쓰는 거야?”
핀이 드렌 왕자에게 물었다. 드렌 왕자는 재차 마법을 써봤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자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아무래도 검을 찾는 모양인데 너 지금 알몸이거든?
……그나저나 핀은 저 녀석의 알몸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군. 이 상황에서 “꺄아~”라거나 “벼, 변태!”라고 말하는 반응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나.
“아빠. 어떻게 하신 거예요?”
『후후. 이 아빠의 멋진 계획을 알고 싶니?』
“으음……. 아까보다 더 안 들려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세요.”
크윽. 설명하기를 기대하고 있었거늘. 이 멋진 계획에 이름까지 붙여놨단 말이야.
나의 계획은 이러하다.
우선 왕자와 아이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을 만든다. 아이들이 왕자에게서 도망치거나, 왕자가 움직여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 만큼 적당히 큰 가상의 원을 그려둔다.
그리고 그곳부터 마력의 흐름을 차단한다!
드렌 왕자가 근처의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쓴다면, 그 원동력을 빼앗으면 되는 것이다. 불꽃의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굉장한 위력의 마법이라서 그런 걸까. 드렌 왕자가 마법을 쓸 때마다 주변의 마력들이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력이 소모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했던 실험이 생각났다. 촛불에 유리컵을 뒤집어씌우면, 그 안에 공기를 모두 소모한 뒤 건드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촛불이 꺼지던 실험.
산소의 존재를 눈으로 보지 않고 확인할 수 있던 그 실험. 그것을 마력에 적용시킨다.
이름하야 “꺼져가는 촛불처럼 네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작전.
멋진 작전명이라 생각해서 핀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는데. 쳇!
“어쨌든 이제 마법은 못 쓰는 거네. 좋아.”
핀이 주먹을 주무르며 드렌 왕자에게 다가갔다. 왕자는 이미 도망갈 생각을 포기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프…… 내 엘프의 힘이…….”
어째서 이렇게 엘프에 집착하는 것일까.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하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우선 이건…… 내 갑옷에 대한 몫이다!”
핀의 주먹이 드렌 왕자의 얼굴에 박혔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렌 왕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드렌 왕자의 얼굴은 멀쩡했다. 핀의 주먹에 맞았지만, 얼굴에 얇은 막이 형성되며 공격을 무효화 시켰다.
나는 그것이 드렌 왕자가 가지고 있는 마력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마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적은 양의 마력이지만 왕자의 마력은 오밀조밀하게 뭉쳐서 견고한 보석처럼 보였다. 나는 거기에 간섭해 보려고 했지만, 그 구조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숲의 몫!”
핀이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계속해서 드렌 왕자의 얼굴을 때렸다. 흥분한 상태인지라 드렌 왕자의 이변에 대해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갑옷보다 불타 버린 숲이 뒷전이냐.
“흐음. 안 부서지네. 결이 계속해서 변해서 맞추질 못하겠어.”
자신의 주먹을 들여다보며 핀이 중얼거렸다. 핀의 공격을 방어한다고 자신의 마력과 주변의 마력을 왕자가 사용한 탓에 나는 핀의 목소리가 저 멀리 강 건너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작고 연하게 들렸다.
“그럼 부서질 때까지 두들겨 봐야지.”
핀! 그건 너무 무식하잖아!
한 번 내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열의를 담아서 핀이 주먹으로 드렌 왕자를 두들겨 팼다.
복날 개 패듯이 맞는다는 말이 어울릴까. 아니면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말이 어울릴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복날 개 패듯이 팬다고 해두자. 이건 하나의 속담으로 커버가 불가능할 정도의 구타다.
“크아악! 그, 그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때리면 깨질 것 같은데!”
속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다. 아니, 이거 속담 맞나? 맞겠지?
제정신이 아니라 대화가 불가능하던 드렌 왕자가 계속되는 폭력에 이기지 못했는지 드디어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졌다.
비록 무자비한 구타에 대항하여 때리지 말라달라는 호소 섞인 말이었지만.
“허억. 허억.”
딱히 타격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드렌 왕자의 피부를 감싼 방어막은 깨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력을 다루는 일도,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지 왕자는 지쳐가고 있었다.
드렌 왕자 내부의 마력이 거의 고갈되었다. 이제 곧 왕자의 방어막이 깨지고, 그가 묵사발이 나는 앞날이 내게 보였다.
『응? 뭔가…… 느낌이……?』
그러나 나는 드렌 왕자에게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전에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기분. 그리운 그 느낌.
『이건…… 그래. 이 느낌은 분명히…….』
드렌 왕자의 마력이 바닥까지 드러났다. 남은 마력은 아주 적고, 간당간당하게 왕자의 생명을 붙잡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내게 기시감을 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것은…….
『어머니의 마력?』
나의 어머니.
세계수의 마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