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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화염(2)
핀의 주먹이 드렌 왕자의 미간에 정통으로 꽂혔다.
핀의 주먹을 기억하는가.
바위든 땅이든 아버지의 비늘이든, 뭐가 됐든 간에 한 방에 작살내는 핀의 주먹.
최근엔 벨룸의 깨달음인 결인지 뭔지를 수련해서 산산조각을 뛰어넘어 가루로 만드는 주먹인데.
그 주먹이 향하는 대상이 수박보다 조금 단단한 사람의 두개골이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상하기 싫은데도 자꾸 그 끔찍한 모습이 자동으로 뇌리에 떠오른다.
아니,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지. 가루로 만들면 피도, 뼈도, 뇌도 가루가 될지도 모르잖아?
“어라? 주먹이 안 들어가?”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다르게, 핀의 주먹은 드렌 왕자의 얼굴에 닿지 못했다.
핀의 몸이 천천히,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듯이 왕자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앞으로 나아갔다.
“으윽? 아빠?”
『내가 한 거 아니야.』
“잡종 주제에 어딜 감히!”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핀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핀은 날랜 원숭이처럼 바닥에 손을 짚으며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으아. 저게 대체……. 아빠랑 같은 힘을 쓰고 있어요.”
『그러게. 나도 막고 싶은데 막을 방법이 없네.』
나와 같은 힘이라곤 하지만 그 힘의 차이가 역력하다.
똑같이 마력을 움직이지만 나는 단순하게 움직이기만 할 수 있는 반면에, 드렌 왕자는 불꽃으로 바꾸는 기술까지 있다.
게다가 그것뿐일까. 내가 어린아이라면 드렌 왕자는 어른. 마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 힘의 차이까지 역력하니…….
크윽. 이거 완전…….
“아빠?”
『사회에 나가면 너 같은 놈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 응? 핀? 왜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빠의 특기는 싸움이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지. 내 특기는 싸움이 아니지. 잠깐, 그럼 내 특기는 뭐지?』
“으음, 아빠의 특기는……. 아이 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빠는 우리가 지켜드릴게요!”
……·그래. 지켜주겠다니 정말 고맙구나. 고맙긴 고마운데 끝까지 내 특기는 말해주지 않는 거니?
“그렇소. 주공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관람하시면 좋을 듯싶소.”
마력의 끈을 다시 꺼내며 내게 말하는 필로우. 역시 언제 봐도 남자다운 눈매라 필로우의 말이 신용이 간다.
아. 필로우가 말한 관람이라는 단어를 듣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내 주특기가 하나 있잖아. 바로 관찰.
그래. 저 녀석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살펴…….
“곰…… 곰!”
「지금이야말로…… 내가 활약할 때다!」
『자, 잠깐. 곰! 멈춰!』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는데 놈에게 곰이 달려들었다. 이런 급박한 순간에도 너는 그렇게 존재감을 어필하고 싶은 거냐!
드렌 왕자에게 달려가는 곰. 하지만 곰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더니, 아까의 핀처럼 뒤로 튕겨나가 버렸다.
“꼬옴!”
「꾸엑!」
“우선 아까와는 상황이 달라졌구려. 무뢰한을 보아하니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나한테 방법이 있어.”
“아씨에게 비책이? 소인도 들어보고 싶소이다.”
필로우와 핀이 서로를 마주보며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아무도 곰한테는 관심이 없는 거니?
“그러니까 방법이 뭐냐면…….”
“이 가짜엘프!”
그래. 저 녀석도 있었지. 잠깐 잊고 있었다. 곰한테 존재감으로 밀린 거냐. 너.
또 한 명의 존재감 없는 존재. 곰이 다시 일어나서 왕자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고오오옴!”
「아직이다!」
곰이 또다시 드렌 왕자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또 나가 떨어졌다. 또 덤벼든다…….
계속 도전하는 곰도 그렇지만 왕자 녀석도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지 계속해서 상대해 준다. 좋아. 지금이 기회다.
『핀. 어서 계획을 말해봐.』
“제 계획은 이거예요.”
핀이 우선 마법을 써서 물을 만들어낸다. 하도 주먹으로 수련만 해서 나도 잊고 있었지만 핀은 불이나 물, 바람과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선 물을 만들어낸 후, 저 녀석의 푸른 불꽃과 상쇄시킨다. 그럼 엄청난 수증기가 이곳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상대의 시야를 봉쇄할 수 있다. 여기서 이점이 있다면, 나는 수증기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마력을 느끼고 조종할 수 있는 상대에게, 시야를 봉인하는 것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필로우가 몸을 묶었을 때 멈칫했던 그 반응을 생각해 보면 녀석은 기계가 아니다.
미쳤지만 감정이 있는 인간, 인간은 예외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당황하기 마련이다.
당황하면 방심하기 마련,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하다.
우리에겐 원펀맨…… 이 아니라 핀이 있으니까. 단 한 방이면 저 녀석을 녹다운시킬 수 있다.
“고옴!”
「꾸엑!」
『좋아. 핀! 시작하자!』
“네!”
곰이 나가떨어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핀이 손을 뻗었다. 핀의 손앞에서 강물이 범람하듯이 물이 쏟아져 나왔다.
“크윽!”
드렌 왕자의 푸른 불꽃과 핀이 만들어 낸 홍수처럼 쏟아지는 물이 만났다.
푸른 불꽃은 평범한 불꽃이 아니라 그런지 단숨에 꺼지지 않고 물을 끓여대며 간간히 저항했지만, 결국 소멸하며 큰 수증기를 내뿜어댔다.
『가랏! 핀!』
수증기가 주변을 가득 매우며 안개를 만들어냈다. 나는 핀을 번쩍 들어 드렌 왕자에게로 날렸다. 핀의 신형이 드렌 왕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수증기는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우리에겐 내가 있다. 나는 핀이 날아가는 타이밍에 맞춰, 공격을 지시했다.
『지금이야! 공격해!』
“이건 갑옷에 대한 몫이다!”
핀의 주먹이 드렌 왕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드렌 왕자의 얼굴이 조각나는 것도, 그가 주먹에 맞아 뒤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핀의 주먹이 닿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충격파. 수증기를 날려버리며 주변의 나무들을 떨게 만드는 강력한 충격파가 땅을 뒤흔들었다.
“어? 뭐야?”
드렌 왕자의 얼굴에 얇게 펴 바른 듯이 생겨난 한 겹의 방어막이 핀의 주먹을 피부에 닿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나는 볼 수 있었다. 견고하게 짜여있는 마력의 그물을. 그 짧은 순간 마력으로 갑옷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드렌 왕자는 핀이 다가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먹이 날아가고, 얼굴에 닿는 그 순간까지.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나온 거라는 뜻인가. 저 자식. 뭐야, 저건. 핀의 주먹까지 막다니. 절대방어냐.
“잡았다.”
핀의 팔목을 잡은 드렌 왕자. 왕자의 팔에서부터 불꽃이 피어나 핀의 몸을 감쌌다.
푸른 불꽃이 아니었다. 이번엔 검은 불꽃이었다.
『핀!』
“흐잇!”
핀이 재빠르게 왕자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 불꽃은 핀이 있던 자리를 머물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검은 불꽃이 떨어진 대지가 불에 타들어갔다. 종이에 떨어진 불꽃처럼. 땅을 태우며 지하로 계속해서 파고들어 갔다.
저거 뭐야. 흙까지 태우는 불꽃?
“흐아. 저거, 피부가 찌릿찌릿한 게 엄청 위험한 느낌이 들어요.”
『딱 봐도 위험해 보여.』
하지만 닿지만 않으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근처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미꾸라지 같은……!”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왕자의 주변에서 검은 불꽃들이 뾰족한 이쑤시개 형태로 변하면서 핀과 아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날리려는 것 같은데. 응? 그러네. 왕자가 팔을 뻗고…….
『도망쳐!』
제길. 나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이쑤시개 형태로 변한 검은 불꽃들이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 아이들을 향해 날아왔다.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잖아요. 날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은 최선의 방어!”
『잠깐 핀. 아까도 공격하려다가 몸이…….』
내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핀이 왕자에게 달려갔지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몸이 느려지는 것을 느끼곤 다시 뒤로 도망쳐 나왔다.
“저거 뭐야. 무서워.”
달리는 아이들을 쫓아 함께 달리며 검은 불꽃을 날려대는 드렌 왕자.
“나는 엘프다. 엘프야! 숲은 나의 집! 내 불로 정화시켜 주마, 가짜 엘프도, 이 미친 숲도!”
미친놈답게 말이 오락가락한다. 숲이 네 집이라며! 근데 숲을 왜 태운다는 거야! 네 손으로 네 집을 다 태울 셈이냐!
『잠깐! 애들아! 너무 멀리 가지 마! 거기까지만, 그리고 아까 있던 곳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시간을 끌어!』
“아빠?”
『이 아빠한테 다 계획이 있어서 그래!』
“네! 알았어요!”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저 녀석의 약점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 주렴. 이게 다 저 미친놈을 막기 위한 거니까.
나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이 다시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드렌 왕자는 아이들을 쫓아 검은 불꽃의 화살을 날렸다. 아이들만큼이나 빠른 속도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며 숲을 불태웠다.
“주공! 이러다가 숲이 몽땅 불타겠소이다!”
『크윽.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주변의 나무들이 불타는 것은 안타깝지만, 여기서 이놈을 막지 못한다면 엘퀴라즈 숲 전체가 불타 버릴지도 모른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다는 가식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모두 내가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드렌 왕자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평화로울 것이라 생각하며 나태한 일상을 보낸 나의 잘못이다.
아이들. 핀, 필로우, 곰이 숲을 지켜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한가하게 숲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 나의 잘못이다.
자책은 그만하자.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하는 거야.
“아빠. 아직 멀었나요!”
“주공! 점점 설 땅이 없어지고 있소이다!”
“고옴!”
「이러다가 구멍에 빠지면 끝이다!」
점점 숲이 불타며 대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은 다행히 번지지 않았다. 검은 불꽃의 화력이 너무 강력하여 나무들이 불에 타기보단 거의 증발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미안. 나무들아. 내 마력을 나눠주어 너희를 보호하기엔, 다른 쪽에 힘을 집중하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구나.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줘. 이제 거의 다 됐어.』
그렇게 말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야 할까. 아직도 멀었나?
“잔챙이 같은 놈들이…….”
드렌 왕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하늘로 손을 뻗었다. 주변의 마력이 그의 위로 눈덩이처럼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태양이었다. 검게 타오르는 작은 태양. 일식(日蝕) 때의 태양처럼 완전히 검고 둥근.
검은 태양.
“전부……. 죽어 버려!”
드렌 왕자가 손을 땅으로 휘둘렀다.
검은 태양이 대지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