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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화염(1)
“하하…….”
어떤 책이었을까.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특별나게 낡은 종이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는 정도다.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에 숨겨져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첫 페이지에 나온 구절은 변변찮은 내용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책 속의 지식이 모두 진실은 아닐지니…….”
네가 보는 모든 것이 사실일 거라 단정 짓지 말라.
“그래. 그럼 누구 말이 거짓일까.”
책에 나온 엘프에 관한 정보가 거짓이었던 걸까. 그 매력적인 종족이란 그저 책을 팔기 위한 사탕발림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어. 그 수많은 책들이 하나같이 거짓말을 기록했다고?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너로구나…….”
그래. 가짜는 이 녀석이다. 엘프라는 고귀한 종족이 보석과 황금에 매혹되다니. 그런 탐욕은 인간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잖아? 엘프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네 녀석은 대체 누구냐?
아아……. 그래! 이 녀석도 잡종이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엘프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너무 기대감을 품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걸까.
저 녀석의 눈동자를 보라고. 파란색이잖아. 엘프의 눈동자는 녹색인데. 확실해! 이 녀석은 엘프가 아니야. 잡종이거나, 엘프를 따라하는 사기꾼이겠지.
“틀린 건 너였어. 이 가짜 엘프…….”
머리의 피가 끓어오른다. 날 속이다니. 잡종 주제에.
감히 나를 기만하다니.
“죽여 버리겠어!”
* * *
『핀!』
갑작스럽게 드렌 왕자의 마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나는 핀을 들어 뒤로 재빨리 끌어냈다.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느낀 왕자 녀석의 마력은 마치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주변으로 요동쳤다.
아니다. 끓는 물보다 더 심각하다. 이것은 마치…….
『용암 같아.』
파란 스파크가 드렌 왕자의 주변에서 파직거리며 별처럼 반짝였다. 스파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기처럼 반짝이던 스파크들이 푸른 불꽃으로 변해 왕자의 몸을 감쌌다.
“곰!”
「대장!」
“아씨!”
곰과 필로우가 핀을 돕기 위해 숲을 박차고 뛰어갔다. 이 아이들도 왕자의 마력을 느낀 것일까.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너 따위가 엘프일 리가 없어!”
분노에 찬 왕자의 고함에 공기가 떨렸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왕자의 뒤로 보이는 숲의 전경이 일그러졌다.
열기가 느껴진다.
왕자 주변의 풀들이 갈색으로 점점 변하더니 말라 비틀어져 바스러졌다. 근처의 나무들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마른 장작처럼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나뭇잎과 함께 불타기 시작했다.
“더러운 잡종 주제에!”
푸른 불꽃이 왕자 주변에서 피어났다.
불꽃의 열기가 왕자의 갑옷을 녹이기 시작했다. 갑옷에 붙어 있던 보석들이 갑옷보다 먼저 녹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보석은 불에 순식간에 타오르며 증발했다.
갑옷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하지만 왕자의 몸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갑옷 안에 입고 있던 옷만이 남아서 그의 몸을 감쌌다.
『저 자식. 뭐야!』
“아, 안 돼!”
핀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나 역시 핀과 함께 놀랐다. 왕자의 주변으로 불길이 점점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결국 숲에 불이 번지게 될 테고, 광활한 숲이 제어할 수 없는 화마(火魔)에 휩싸여 재가 될 것이다.
“내 갑옷!”
그쪽이었냐! 그리고 언제부터 갑옷이 네 거였냐! 핀, 너 저 녀석 말처럼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물처럼 흥건하게 녹아 바닥에 고인 갑옷은 뜨끈뜨끈한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핀은 그 황금색 웅덩이를 보며 절규했다.
아아. 핀을 나무라지 말자. 그래. 이건 다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가 준 마력만 아니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거야.
……그렇겠지? 아버지 마력 때문이겠지? 본성이 아니겠지?
핀이 웅덩이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드렌 왕자 주변에 있는 마력들은 더욱 더 소용돌이치며 푸른 불꽃을 만들어냈다.
마치 작은 태양이 현세에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주변의 마력이 움직이고 있어?』
드렌 왕자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선 특출하게 많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난번 모험가들을 생각해 보면 드렌 왕자가 가지고 있는 마력은 아주 평범했다. 숲의 동물들이나 심지어 나무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작은 양의 마력만이 그에게서 느껴졌었다.
하지만 마력을 느끼고 다룬다고 했었나. 그것이 바로 이런 의미일 줄이야.
왕자의 주변 마력이 불꽃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그것은 왕자의 마력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마력을 따로 가지고 있음에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을 조종하며 물건을 움직이듯이, 드렌 왕자 역시 본신의 마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왕자 주변에 떠다니던 마력들이 그물에 걸린 듯이 그의 주변에서 고정되더니,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마법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자신의 마력이 아닌 주변의 마력을 이용해서 마법을 사용하다니.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마법을 다루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나 이래봬도 세계수인데. 이런 능력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데. 아니, 잠깐.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숲을 태우게 둘쏘냐!』
나는 녀석이 조종하는 푸른 불꽃들을 멈추기 위해 마력으로 붙잡으려 했다.
주변의 마력을 조종해서 불꽃을 만든다면, 똑같이 마력을 조종할 수 있는 내 힘으로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으윽. 움직일 수가 없잖아.』
하지만 나보다 녀석이 마력을 조종하는 힘이 더 강했는지, 내 힘으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땅에 깊숙이 박힌 바위처럼 녀석 주변의 마력은 단단하게 굳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 나 너무 쓸모없는 거 아니야? 제기랄.
“곰!”
「그만둬라!」
푸른 불꽃의 바다로 곰이 뛰어들었다. 곰이 다리를 축으로 삼아 땅을 박차고 회전했다. 푸른 불꽃이 곰의 회전을 따라 곰 주변에서 소용돌이 쳤다.
“곰!”
「이런 것쯤은!」
곰이 회전을 멈추며 손을 하늘로 뻗었다. 몸을 감싸던 회전이 곰의 손을 따라 하늘로 솟구쳤고, 회전에 빨려 들어갔던 푸른 불꽃들도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고오옴!”
「아무것도 아니다아아아!」
불꽃들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멋지게 폼을 잡는 곰. 꼭 내게 ‘나의 활약상을 봐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데 설마 그럴 리가.
“곰. 곰. 곰.”
「어떤가, 주인님. 나의 활약상이.」
……여러분. 애정결핍, 아니 관심결핍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분위기를 못 읽어.
왕자가 무서운 얼굴로 날파리를 쫓아 내듯 손짓했다.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곰의 주변으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불꽃 없이 순수한 마력의 폭풍이었다. 곰의 몸이 살짝 공중으로 뜨기 시작했다. 폭풍은 강철이라도 찢어발길 듯이 점점 더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곰!”
「어딜!」
곰이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과 반대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래. 뭘 노리는지 알겠다. 회전하는 마력과 반대로 회전하여 마력의 폭풍을 무효화시킬 작정이구나.
“고, 곰?”
「이, 이런?」
근데 곰의 회전력보다, 드렌 왕자의 힘이 더 강했다.
“고오오옴!”
「이게 아닌데에에에!」
『곰!』
곰의 몸이 점점 비틀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간 곰이 폭풍에 갈기갈기 찢어져 버릴 거야!
나는 최대한 드렌 왕자와 힘 싸움을 벌여보려고 했지만, 갓난아이가 성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나의 힘은 드렌 왕자의 힘을 멈출 수 없었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간 곰이……. 곰이……!
“아아. 안 돼. 나는…… 엘프……. 엘프는 자연을 사랑해…….”
드렌 왕자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엘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불꽃을 뿜어 댈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곰을 감싸던 폭풍이 점점 약해졌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뿐, 미친놈이니 만큼 다시 정신을 차리고 폭풍이 강해질지도 모른다.
“무뢰한이 죄가 크다지만 아직 죽기엔 이르오.”
필로우가 마력의 끈으로 왕자의 몸을 묶었다. 그래. 평범한 끈이 아니라 마력으로 만든 끈이라면 타지도 않겠지.
“나는…… 엘프……!”
왕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일까. 아니면 미친놈이라 그런 것일까. 곰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던 마력의 폭풍이 사라졌다. 곰은 비틀비틀 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곰! 괜찮아!?』
“고옴……. 곰…….”
「세상이 뒤집힌다……. 세상이 뒤집히면 세하(下)…….」
『……괜찮구나.』
말도 안 돼는 개그를 하는 걸 보니 멀쩡하군. 괜히 걱정했다. 필로우한테나 집중해야지.
“나는…… 엘프……. 으아아아!!!”
드렌 왕자가 발악하듯이 비명을 질렀다. 필로우가 만든 마력의 끈이 산산이 분해되더니, 몸 주변에 또 다시 푸른 불꽃이 용솟음 쳤다.
뒤에서 왕자를 붙잡고 있던 필로우의 몸이 불꽃에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만 같았다.
“뻔하구려. 숲에서 불장난은 좋지 않소이다!”
드렌 왕자의 아래쪽 땅이 들썩거리더니, 조개처럼 땅 위로 솟구치며 왕자를 덮쳤다. 드렌 왕자는 솟아난 땅에 파묻혀 둥근 구체에 봉인되었다.
구체를 묶고 있는 것은 필로우의 마력의 끈. 그렇구나. 미리 땅 아래로 끈을 넣고 한 번에 끌어 올려 왕자를 가둔 거군.
“화(火)란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르면 수(水)에 약하지만, 급한 대로 흙으로 덮어버렸소이다. 그래도 나름 쓸 만하구려.”
넌 무사냐 풍수사(風水事)냐. 그래도 막긴 했으니까 잘했군.
흙더미에 갇힌 드렌 왕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은 숨이 막혀 죽거나, 압사(壓死)당했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미친놈을 걱정할 만큼 사정이 여유롭지가 않다.
“이대로 숲 밖으로……!?”
흙더미가 꿈틀거렸다. 점점 알을 깨부수는 새처럼 이곳저곳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흙에 불이 더해져 봐야 결국엔 쇠가 되기 마련이거늘……. 어떻게……?”
그것도 음양오행이냐.
잠깐. 쇠가 된다고? 근데 아까 갑옷도 녹였었는데?
내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왕자를 가둔 흙더미가 점점 붉게 물들더니, 깨진 균열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흙더미가 산산이 부서지며 드렌 왕자가 그 안에서 나왔다.
“흐아앗!”
파공성과 함께 필로우가 뒤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날아가는 필로우를 붙잡고 핀과 곰이 있는 쪽으로 이동시켰다.
“하아. 하아.”
위험하다. 이 녀석. 눈이 맛이 가버렸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위험은 다른 쪽으로도 존재했다.
이 자식. 그나마 남아 있던 옷까지 다 불타 사라졌다.
한마디로…….
알몸이다.
“으하하하……. 그래. 힘이란 이런 거였어. 아아. 이 해방감. 왜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거지?”
아니야. 그냥 힘 때문에 해방감을 느끼는 건 아닐 거야. 미쳤다고 해서 미안해. 인간성을 버리지 말아줘.
“우우……”
『핀!? 정신이 드니?』
그래. 우리에겐 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최강의 치트. 핀이 나선다면 저런 녀석쯤이야 단숨에 이길 수 있을 거야.
근데 저런 녀석의 알몸을 핀이 봐야 하잖아. 그건 또 싫은데.
“갑옷…….”
핀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갑옷? 설마…….
그리고 그대로 드렌 왕자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내 갑옷 물어내 이 자식아!”
아직도 갑옷 타령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