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76화 (76/200)

=======================================

[76] 기억(2)

숨이 막혔다. 얼굴이 터질 듯이 뜨겁고 먹먹했다. 아버지의 헐떡거리는 괴이한 신음소리와 중얼거림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께 감히 마력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지금이었다면 단숨에 아버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아버지를? 내가? 아니야. 그래선 안 돼. 하지만 어째서?

“이건 다 내꺼야. 아무한테도 못 줘. 잡종 놈에게는 더더욱!”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거슬렸지만 남은 잠기운을 쫓아내며 나를 방밖으로 이끌었다.

세상은 태양이 하늘 가운데 걸린 정오의 시간이었다. 뜨거운 태양빛이 낯설게 느껴져 나는 손을 뻗어 열기를 만져보려 했지만, 이내 완전히 정신이 들어서 다시 팔을 내렸다.

“…….”

어젯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목을 조르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 숨 쉬며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나는 죽었다. 내 안의 아버지와 함께.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탐욕에 미친 돼지일 뿐이었다. 최근에 보여준 역정과 짜증, 나에 대한 질타는 늙어가는 육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역겹다. 그렇게 돈이 좋은가? 그렇게 재물이 좋은가? 죽으면 한줌 먼지가 되어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물건들이?

더럽다. 그 입으로 내게 명령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잡친다. 이제 더 이상 그 돼지 같은 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리라.

“드렌 왕자님. 왕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찾았다. 나는 표정을 숨긴 채,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결심이 무색하게,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들으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왔느냐. 잡종.”

다시 만난 아버지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진 않았다. 말투에서 전보다 더 가시가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왕자나 이름이 아닌, 잡종이라 부르고 있었다.

“네 녀석은 참으로 말귀가 어두운 놈이구나.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니. 잡종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날 보고 잡종이라니.

아버지가 말하는 잡종의 뜻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수도에서 살고 있는 혼혈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들을 향해 잡종이라며 이 수도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항상 역정을 내셨다.

아버지는 그들은 더러운 존재라고 내게 말했었다. 인간도 이종족도 아닌 순수하지 못한 존재들. 종족이라는 뿌리를 잃고 썩어 문드러질 나무 같은 놈들이라고.

그 말을 들으며 자라온 내가 그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내 삶의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잡종이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는…….”

감히 아버지 앞에서 반론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주먹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잡종이 아닙니다.”

간신히 입을 열어 안에 담긴 속내를 뱉어냈다. 구역질을 하듯이 진득하게 새어나온 말투에 신물에 흠뻑 적셔지듯 목이 쓰렸다.

“너는 잡종이다.”

“저는 잡종이…….”

“쯧!”

혀 차는 소리가 나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춘 것처럼, 정적에 휩싸인 채 세상에서 동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다리에서 자꾸만 힘이 빠지려 했지만,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꼴사나운 모습을 간신히 면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렇게 책을 읽고도 눈치채지 못했느냐? 평범한 인간이 너와 같이 마력을 다루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느냐?”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문서에도, 어떤 역사서에도, 어떤 영웅과 같은 삶을 산 인물일지라도 나처럼 마력을 다루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는 종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내가 혼혈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기에, 그저 우연일 거라 치부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네 녀석은…….”

마력을 다루는데 있어서 인간이나 마족보다 뛰어난 종족. 그들이라고 무조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마력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마력을 다루고 느끼는 데 있어서 나에게 가장 근접한 종족.

“엘프의 혼혈이다. 선대 중에 누군가가 엘프와 몸을 섞고 그 피가 우리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도 수치스럽거늘, 그 힘까지 발현되다니. 네 녀석만큼 가문의 수치가 또 있을쏘냐.”

내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내게만 그 피가 흐른단 말인가? 아버지는? 다른 왕족들은?

왜 내게만?

“하지…….”

“그만 나가라. 더는 볼 일이 없도다. 앞으로는 그곳에 접근하지 말거라. 그리고…….”

내부에서 대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뇌를 파먹는 벌레처럼 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시는 내 명령을 어기지 말도록. 네 주제를 알거라.”

어떻게 방 안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또 다시 방 안이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비춘 내 모습은, 어딜 보나 인간의 얼굴이었다. 엘프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성에 있는 치료사를 찾아가 물었다. 그나마 이런 쪽으로 지식을 가진 자는 그 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은 엘프의 특징이 나오지 않느냐고. 왜 내게만 그 피가 흐르는 것이냐고. 이 힘이 정말 인간은 가질 수 없는 힘이냐고.

“격세유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나를 귀찮다는 듯이 외면하며 말을 던지곤 제 일로 다시 관심을 돌렸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격세유전에 대해 떠올렸다.

기억이 났다. 분명 읽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나 그 윗세대의 특징이 몇 세대를 건너뛰어 후세에 발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을 뜻하는 단어였다.

나의 조상 중에 엘프와 결혼한 사람이 있는 건가. 그런데 왜 하필 그 피가 내게 와서 깨어난 거지?

그날 이후로 귀를 만지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버렸다. 아무리 만져 봐도 인간의 귀일 뿐이었다.

또 다른 점이 생겼다면, 그날 있었던 일이 소문처럼 퍼져나가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불결한 생명체를 만났다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나를 두려워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아니다. 이건 예전부터 이랬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주변을 이제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겠지.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프에 관한 책들을 보며 그들에 대해 조사했다.

처음엔 그저 엘프가 증오스러웠다. 나란 존재를 비참하게 만든 악의 축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들의 삶은 내게 거대하게 다가왔다.

숲에 사는 고귀한 종족. 인간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모든 개체가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들.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은 숲에 살며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웠다.

매력적이다. 그들에 대해 동경심을 가질수록 인간들이 추하게 느껴졌다.

엘프들은 욕심이 없다. 자신들만의 숲에서, 그 영역만을 고수하며 다른 것에 눈독들이지 않는다. 누구처럼 황금에 목말라 영생을 바라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영생이라!

인간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그것을 엘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슷한 것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가. 지금까지 기록된 역사서를 샅샅이 찾아봤지만 엘프가 노환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죽이지 않으면 죽지 않는 삶. 불노(不老)의 삶. 내게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돼지 같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 내게 있는 것이니.

그보다 통쾌한 일이 또 있을까.

엘프에 대해 알아갈수록 인간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것이었을까. 그저 내가 혼혈이라서가 아니라, 내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그래서 그들처럼 장수할 가능성이 있어서 싫어했던 게 아닐까.

아버지는 나를 질투하고 있던 것일까.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었다.

내가 청년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누가 곁에 있건 없건 나를 잡종으로 불렀고, 나는 아버지가 내게 명령하기 전까지 먼저 찾아뵙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마력을 다루는 힘이 더욱 강해진 것과, 더 이상 나를 경멸어린 시선으로 보는 자가 아버지 외엔 없었다는 것뿐.

그럴 수밖에. 그들 대부분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내가 죽였으니까.

남은 대신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아버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꼭두각시들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은 인물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내가 처리했다.

혐오스럽다. 권력에 미쳐 아들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아버지가 혐오스러웠고,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그 혐오감은 점점 더 번져 인간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선물이다. 훌륭하구나. 잡종이지만.”

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갑옷을 선물해 주었다. 참으로 아버지다운 취향의 갑옷이라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선물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권력에 방해되는 대신을 내가 죽인 상이었다.

조금이지만 아버지에게 인간다운 면이 남아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갑옷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착용자를 즉사시키는 마법이었지만 내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나만 죽으면 방해꾼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

“후후……. 하하하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더럽고 인간이 최고라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 평범한 인간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죽이지 않았지?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같은 엘프 혼혈을 만나게 되었다. 나와 다르게 확연히 눈에 띄는 긴 귀와 옅은 녹색의 눈.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완전한 엘프는 되지 못했다.

엘프이지만 엘프가 되지 못한 자들. 인간이지만 인간취급 받지 못하는 자들.

아버지의 성격대로라면 이런 혼혈들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한 아버지도 결국엔 한 나라의 왕일뿐이었다. 혼혈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다른 나라의 눈이 두려운 나머지 아버지는 혼혈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만? 왜 나에게만 경멸을?

“괜찮으세요?”

“아……. 네, 네!”

그들이 부러웠다. 나와 같은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평민으로 태어난 그들이 부러웠다.

“자, 일어나세요.”

“저, 저기 혹시…….”

그들이 불쌍했다. 하필이면 비루스 왕국에서 태어나 은근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지내는 그들이 불쌍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아뇨. 괜찮아요!”

쓰러진 혼혈 여자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녀의 귀를 보며 미칠 듯한 질투를 느꼈다. 나조차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이, 내게는 없는 그것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도 가지고 싶다. 그들처럼, 조금 더 엘프와 가까워지고 싶다.

“혹시 모르니 저를 따라오시죠. 무릎을 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이 정도는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그녀가 나를 순순히 따라왔다. 그녀의 귀를 잡아 뜯어 내게 달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뽑아 나의 눈에 박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저기……. 왜, 왜 그러세요?”

“아프진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픔이란 게…….”

그들 자체를 가지겠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