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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기억(1)
왕자의 갑옷을 내가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했지만, 그저 단순한 황금색의 갑옷이라고 표현하기엔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우선 전체적으로 황금색인 것은 맞다. 그게 도금이든, 속까지 황금이든 간에 금색으로 된 갑옷은 왁스라도 칠한 것처럼 거울처럼 반질반질해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갑옷을 만든 제작자는 그저 황금색이기만 하면 심심할 거라 생각했는지 갑옷엔 군데군데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이 없었다면 넓고 황량한 공간이 됐을 갑옷의 빈 공간들에서 나오는 빛은, 황금의 반짝임을 잘게 쪼개는 푸르고 붉은 보석들을 통과하며 형형색색의 빛의 결정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솔직히 갑옷을 보며 멋지다거나 예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저거 얼마일까?’ 하는 의문뿐.
황금의 값어치만 하더라도 제대로 측정이 불가능한데 거기에 딸린 보석들까지.
동시에 갑옷 모양으로 세공하는데 들어간 수고나 예술적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저걸 들고 지구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3대는 사치스럽게 돈을 쓰며 먹고 놀 수 있는 돈이 나오지 않을까.
근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는 상상만 했을 뿐이다. 저 갑옷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렸을 뿐이고, 갑옷을 가지고 싶다거나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의 물건이기도 하고, 굳이 돈이 필요한 삶은 아니니까.
갑옷을 가진다 해도 그냥 빛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본체 옆에 두면 조금 멋있으려나.
……숲에 들어온 모험가의 유품처럼 보이겠구나. 장식품으로도 못 써먹겠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만…….”
“그게, 갑옷이 너무 멋져서요. 반짝반짝하는 게 너무 가지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달려와 버렸지 뭐예요. 헤헤.”
“예?”
멋쩍게 왕자에게 웃음을 보내는 핀.
왕자는 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는 했지만 충격이 컸던 것인지 멍하니 눈만 덩그러니 뜨고 입을 벌렸다.
왕자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나도 지금 그렇거든.
『핀……. 아빠랑 이야기 좀 할까?』
“네. 아빠. 왜 그러세요?”
『너……. 저 녀석한테 반한 거 아니었어?』
“반하다뇨! 아빠도 참. 저한테는 아빠뿐이라구욧!”
『응? 아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게 설마 나였어?』
“당연하죠. 헤헤. 아빠 말고 제가 또 누굴 좋아하겠어요.”
나를 좋아한다니. 좋아한다는 게 ‘Love’의 뜻을 가진 좋아한다일까. 아니면 ‘Like’의 뜻을 가진 좋아한다 일까.
“당연히 ‘Love’죠. 아빠는 진짜 제 마음도 모르고…….”
이 문제는 여러모로 복잡해질 것 같으니까 우선 넘기자.
그나저나 그래서 왕자가 갑옷을 벗는 순간 뛰쳐나간 거였나. 갑옷이 가지고 싶어서?
핀이 이 정도로 물욕이 강한 줄은 미처 몰랐는데.
『갑옷이 가지고 싶은 것치고는 대하는 태도가 너무……. 뭐랄까.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는 태도 같았는데.』
“으음. 당연히 잘 보여야죠. 아까 왕자가 그랬잖아요. 일이 끝나면 선물로 갑옷을 주겠다고. 괜히 기분 상해서 안 준다고 말을 돌리면 큰일이니까 예의바르게 행동해야죠.”
『……핀. 네 물욕이 무섭구나. 어차피 저런 갑옷을 가진다고 해도 숲에선 딱히 쓸 일도 없는데.』
“그건 그렇지만,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게 너무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는걸요. 할아버지의 미궁에 있던 보물들처럼 저도 한가득 쌓아두고 싶어요.”
네가 무슨 까마귀냐. 잠깐,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미궁에 보물이 한 가득이었는데.
설마 유전이냐. 아니지. 어쩌면 아버지의 마력을 받아서 핀이 아버지와 비슷한 취향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 드래곤은 반짝거리는 보물을 수집하는 게 취미라고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 그게 이쪽세계에서도 통용되는 거였나.
『너한테 가르쳐야 할 진짜 ‘예의’가 산더미로구나. 선물을 준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그게 사랑이라면 더더욱.』
“사랑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요.”
『……왕자가 널 사랑한다잖아.』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눈치 못 채고 있었냐! 세상에나…….
『내 딸이 이렇게나 둔감할 줄이야……. 충격이로다.』
“곰.”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다.」
“소인도 무뢰한의 말에 동감이오.”
얘들은 또 갑자기 무슨 소리래. 태클을 거는 건 딱히 말리지 않겠지만 너무 뜬금없잖아.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질 않으니 받아칠 수도 없군.
『핀. 왕자는 너한테 한눈에 반했다고 말까지 했잖아. 그게 바로 사랑한다는 뜻이야. 그걸 이런 식으로…… 처절하게 박살 내면 안 되지. 지금 왕자를 봐. 살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니 저게?』
나와 핀의 대화를 라이브로 듣고 있는 드렌 왕자의 표정은 ‘나라 잃은 사람의 표정이 이러할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나와 핀이 아까부터 이야기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선 지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사람을 만나자마자 판단하는 건 너무 섣부른 일일 테니 확답은 내리지 말자.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조금…… 미안하네요. 저는 나름대로 신경 써서 친절하게 대해주려던 것뿐인데.”
『때로는 호의가 오히려 독이 될 때가 있어. 왕자가 정신을 차리면 사과해.』
“네! 아빠.”
활기차게 대답하는 핀을 보며 나는 걱정에 빠졌다.
아직 왕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서 핀이 자신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매우 비싸 보이는 갑옷, 잘생긴 이목구비가 진짜 왕자인 것 같은데. 설마 숲으로 군대라도 이끌고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금 제거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화들짝 놀라 방금 전에 한 생각을 부정했다.
한순간 나도 모르게 잔인한 생각을 해버렸다. 딱히 무슨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나 혼자만의 추측으로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니.
핀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뭐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저기요? 드렌 왕자님?”
핀이 손바닥을 왕자의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었다. 왕자의 두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는 상태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특이하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빨리 깨어나 줬으면 좋겠는데.
* * *
그곳에 발을 디딘 건 그저 우연한 실수였다.
왕실 가장 깊숙한 곳, 왕의 처소를 지나 위치한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수염이 희끗희끗 새어가는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언제나 새기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받는 미움은 지금도 차고 넘쳤으니까. 조금이나마 말을 잘 들으면 사랑해 주시지 않을까.
그저 우연이었다. 그날도 아버지께 허락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며 크게 혼났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왕궁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며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마법을 쓰는 걸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허락한 일이 아닌 이상.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기에, 그저 평범하게 마법을 쓰고 싶어서 혼자 몰래 사용했던 거였는데. 어떻게 아셨을까.
아버지는 나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알고 계신다.
신전에서는 신이라는 분이 세상 모두를 굽어 살핀다고 했지만 내게 있어서 신은 아버지였다.
머리를 찧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있어야 했지만, 아버지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만큼은 문지기들조차 그 주변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아버지께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여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문이었지만,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생각하니 어서 빨리 사과드리고 용서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문을 열어서는 안 됐다.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그저 엄격한 아버지인 것으로 기억했을 텐데.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강한 마력을 지닌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했을 텐데.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주변에서 맴도는 진실을 언제까지나 거부하며 아버지를 훌륭한 왕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그 문을 열었을 때, 호화스런 왕실에 설치된 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낡고 뻑뻑한 잡음이 들렸던 것이, 어쩌면 내게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도 지금처럼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
아버지께선 누구와 대화하는 걸까. 마법으로 빛나는 등불 아래, 아버지의 그림자 말곤 아무도 없었다.
이 순간에 나는 들어와선 안 될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호기심은 이성을 앞서서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왜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전부 내꺼야……. 아무도 못 줘…….”
불빛은 뭔가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며 방 안에서 반짝거렸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끌어안고 있는 금화의 산을 보았다.
왕실에서 나와 함께 해줄 친구는 없었다. 왕자라는 신분 때문일까. 아버지에게 미움받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무도 나와 어울려 주지 않았고, 내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책뿐이었다.
그리고 그 책 속에 나온 골동품이라 불리는 물건들과 보물이라 불리는 물건들이 주변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이곳은 보물창고로구나. 우리 왕실에서 관리하는, 왕족들의 비밀금고였구나.
이상한 쪽으로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 이곳을 보여주지 않으신 걸까. 어째서 내게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불허하신 걸까. 왕족의 창고인데도 어째서 아버지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아버지는 나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신 걸까?
“전부……. 내꺼야…….”
갑자기 아버지께선 금화를 껴안은 채 울기 시작했다. 근엄하고 내게 엄격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가고,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충격이었다.
“죽기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아아. 죽으면 내 것이 아니잖아. 영원히 살고 싶단 말이다!”
나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신발이 땅에 끌렸다.
“누구냐!”
더 이상 내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은 없었다. 금화를 허둥지둥 뒤로 감추며 보물을 필사적으로 몸으로 가린 아버지의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탐욕스런 악당의 모습이었다.
“아…….”
“드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광기에 찬 아버지의 눈과 마주치자 입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드렌…….”
아버지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의 당당하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가 아닌, 이미 죽어 되살아난 시체 같은 몸짓이었다.
“여기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니.”
아버지의 손이, 내 목을 감쌌다. 목이 졸리며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버지의 손이 단단하고, 그리고 차갑다는 것이었다.
“이 잡종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