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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소녀는 왕자를 바란다(2)
“결혼…… 하셨습니까?”
침입자, 드렌 왕자는 핀에게 머뭇거리듯이 결혼여부를 물어보았다.
그것을 묻는 저의는 무엇인가. 핀과 결혼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이 자식. 굉장한 녀석이다.
아무리 첫눈에 반했더라도 순서란 게 있는 법이거늘. 그런데 연인 단계는 가뿐하게 건너뛰고 결혼 단계까지 진행하는 거냐.
보통은 ‘혹시 사귀는 사람 있으신가요?’나 ‘좋아하는 사람 있으신가요?’로 시작하지 않아?
불도저다. 이 녀석은 불도저야!
핀도 놈에게 반한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가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두 사람은 한 쌍의 결혼반지를 낄지도 모른다. 반지가 뭐야. 그 이상으로 진도가 나가서…….
상상도 하기 싫다. 안 돼! 거기까지는!
“안 돼!”
나도 모르게 정령으로 뛰쳐나와 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령 상태의 나의 뜀박질로는 핀이 있는 곳까지 수십 일이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안 돼에에에에…….”
물론 내가 본체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곰…….”
「주인님 너무 흥분했다…….」
“주공! 진정하시지요.”
“끄으응……. 그래. 진정해야지.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네.”
나는 다시 나무로 돌아가서 핀과 드렌 왕자의 만남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핀은 드렌 왕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쪽에 관심을 보였다.
“마법인가요?”
“예?”
핀이 주변에 쳐져 있는 마력의 껍질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곤충이 탈피하고 나온 마른 번데기 껍질처럼 마력의 벽이 찔린 곳을 중심으로 갈라지더니 우수수 부서졌다.
드렌 왕자라는 놈의 표정이 놀람을 넘어서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잘생긴 놈이라 그런지 이런 표정인데도 나름 볼만했다.
“……굉장하십니다. 역시 엘프들은 저처럼 마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거였군요.”
“마력을 다룰 줄 아세요?”
나 역시 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드렌 왕자에게선 한 톨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력을 보고 느낀다고? 마력이 없는 사람도 마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걸까?
“그것 때문에……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마력 따윈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넘긴 드렌 왕자는, 핀이 결혼 상대가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한 듯했다.
하지만 마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직후부터 녀석의 표정은 사막에서 찾아 헤매던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처럼, 바라 마지않는 이상향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녀석. 대체 목적이 뭐냐.
『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아직 저 녀석의 목적이 뭔지도 모르잖아. 나쁜 녀석일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아빠. 인간이라고 다 나쁜 녀석만 있는 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걸 알아보려면 우선 함께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응? 어…… 그렇지……. 그러네.』
핀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맞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원하는 건…….”
“아버님이십니까? 놀랍군요. 아무런 도구도 없이 원거리로 마력만으로 통신을 주고받다니.”
뭐야. 저 녀석. 지금 나와 핀이 나눈 이야기를 훔쳐 들은 거야?
음성이 아니라 마력으로 나눈 이야기였는데 그걸 훔쳐 듣는 게 가능한가?
“어라? 들으셨어요?”
“엘프님께서, 아. 그러고 보니 성함을 듣지 못했군요.”
“핀이라고 해요.”
“핀이라……. 예쁜 이름이십니다. 아까 말했듯이 제가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체질이라서 마력으로 하는 통신도 본의 아니게 전부 듣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핀 님께서 중얼거리시지 않으셨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도 말의 어미를 맞춰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대화였습니다.”
그렇지. 나와 대화하면서 핀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니까 귀가 좀 밝은 녀석이라면 충분히 들을 만하지. 외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다보니 자꾸 잊어버린다.
“이제 그러면…… 부디 제가 했던 질문에 답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핀 님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만 느끼는 감정이었나요?”
드렌 왕자가 핀의 손을 잡았다. 가녀린 핀의 손이 드렌 왕자의 강철 장갑 위에 얹혀졌다.
핀은 손을 빼지 않고 그의 손목 위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갑옷을 섬세하게 더듬는 핀의 손길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만큼이나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아……! 핀, 어째서 저런 놈한테…….
『크흑…….』
“주공……. 외람된 말이오나 질투는 좋지 않소이다.”
『질투라니. 이건 질투가 아니야.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핀이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 고생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고.』
“곰, 곰.”
「옆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질투가 맞다.」
이 녀석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꼭 중학생들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멀리서 지켜보는 친구를 놀리면서 엮어주는 것 같잖아.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왕자 녀석이 핀을 보며 말을 걸었다. 핀은 아직도 왕자의 갑옷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길은 팔을 넘어서 왕자의 가슴까지 닿아 있었다.
말려야 할까. 하지만 핀도 저 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말린다면 핀이 싫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놈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움받는 편이 더 속이 편할지도 모른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저 녀석의 머릿속은 핀과 결혼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단 말인가.
이해는 된다. 판타지 세계에서 엘프란 미모의 화신과 같은 존재. 핀은 부모의 마음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확실히 아름다웠다.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부터 저러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녀의 교제란 무엇인가. 서로 손뼉이 맞아야 시작될 수 있는 하나의 탄생이 아니던가.
……아. 핀의 반응을 보고 저러는 건가. 핀도 저 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은 반응이라서?
하지만 핀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그렇게 왕자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죄송해요. 결혼은 받아들일 수 없네요.”
“……어째서죠?”
어째서는 무슨 어째서야. 그래도 핀이 조금 상식적으로 행동해 줘서 다행이다.
당연한 거 아니야? 처음 만나는 사인데 결혼하자고 해서 넙죽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거냐.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말을 해준 건 고맙지만, 죄송해요.”
“좋아하는 사람? 그렇군요. 저는 인간이라 안 되는 것이었군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제게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왕자는 흥분해서 핀에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 모습이 꼭 교회에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교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젠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처럼 마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조사해 봤지만 적어도 인간 중엔 없었죠. 하지만 엘프인 당신은 저처럼 마력을 감지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시도해 본적은 없지만, 도구 없이 마력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저처럼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왕자가 봇물 터지듯이 말을 쏟아냈다. 핀이 의문에 잠긴 표정을 했지만 왕자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이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잡종이라고, 엘프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비난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인간들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들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들에게 반한 적 없는 제가 당신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것이 제게 엘프의 피가, 인간의 피보다 진하게 흐른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어쩐지, 자꾸 숲에 오고 싶더라니. 그게 전부 제 속에 잠들어 있던 엘프의 피가 시킨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괴변이다!
태생에 관한 문제는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해 넘겼지만, 핀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 엘프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어서라니. 그냥 예뻐서 그런 거잖아 이 자식아.
저 녀석,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뭔가 생각이 비뚤어져 있다. 초점이 전부 자신의 ‘혈통’이 중심이 되어 상황을 전개시킨다.
숲에 온 것도 자신 안에 깃든 엘프의 피 때문에.
핀에게 반한 것도 엘프의 피 때문에.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이해할 수 없지만, 마력에 관한 것도 엘프의 피 때문에.
원래 왕족이란 지구에서도 혈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심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인 건가.
대략적인 정보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저 녀석은 엘프와의 혼혈이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핀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디어 깨달았다는 건가.
“제 안엔 인간의 피보다 엘프의 피가 더 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거절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네?”
“제가 인간이라 부담돼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엘프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엘프가 인간과 결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저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과 같아요.”
핀이 드렌 왕자에게서 물러났다. 드렌 왕자의 표정은 간절함을 넘어서 무언가 광기마저 느껴졌다.
“거기에 당신도 저와 같지 않습니까. 피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감정을 말한 겁니다. 저를 보던 그 표정, 목소리, 행동. 그 모든 게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일까. 그렇기에 저는 오늘 처음 만난 당신에게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꺼낸 것입니다.”
“저기, 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말해주세요.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따로 없다. 이젠 더 이상 이 녀석이 왕자로 보이지 않는다. 살짝 머리가 이상한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또 거절하시는 겁니까?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였습니까? 아니,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당신의 의도는 아니겠군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반대하시는 건가요? 그분께선 인간을 싫어하십니까?”
“아뇨. 아버지께선 인간을 좋아하세요. 걱정은 하고 계시지만……. 그리고 잘못 알고 계시는데 사랑이라뇨.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돼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도 제게 관심 있잖아요!”
드렌 왕자는 이제 광기에 더해져 분노가 서린 표정이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마음대로 청혼했다고 하기엔 핀의 반응을 생각하면 분노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저기, 미안하지만 제가 관심 있던 건…….”
핀이 미안한 표정을 하다가 한 순간 눈망울을 반짝였다.
처음 왕자를 보며 내가, 그리고 드렌 왕자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그 감정이 담긴 눈망울이었다.
“-당신의 갑옷이에요.”
“……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