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73화 (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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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소녀는 왕자를 바란다(1)

“주공! 침입자가 나타났소!”

낮잠을 자던 나는 갑작스레 외치는 필로우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굴을 만지며 잠을 깨려 노력했다.

“으, 응? 뭐라고? 침입자?”

“아빠. 진정하세요.”

핀이 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주며 나를 달래…… 가 아니라 진정시켜 주었다. 이런, 창피하게스리. 근데 분명 잘 때는 혼자였는데 언제 내게 무릎베개까지 해주고 있었을까.

평소에 자다 일어났을 때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혹시 내가 잘 때마다 이렇게 해준 건가?

“주공.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소만?”

“아니야. 잠깐 생각 좀 했어. 그래서 침입자라니? 아니, 내가 직접 보는 편이 빠르겠네.”

나는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나무로 돌아갔다. 매일같이 숲을 감시하는 게 내 일이라고 했었는데 잠의 유혹에 빠져 중요할 때 놓쳐 버리니 창피하기 그지없다.

아니야. 필로우가 내 대신 잡아줬으니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 그래. 오늘은 반차 쓴 셈 치자. 나는 쉬는 날 끌려나온 불쌍한 직장인이야.

『크아. 저게 뭐야!?』

나무로 돌아가 확인한 침입자를 보고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상에. 저런 갑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내가 본 갑옷은 전생에 봤던 중세기사의 갑옷이 전부였다.

지난번의 모험가들은 갑옷이 아닌 평범하게 두툼한 긴팔 가죽옷을 입고 있었기에 갑옷은 이번이 처음 보는 것인데, 내 기억속의 갑옷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건 갑옷이라기 보단 거의 나이트클럽의 미러볼 수준이잖아!

모험가는 황금으로 도금한 건지 아니면 통짜 금으로 만든 건지 금빛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햇빛이 갑옷에 반사되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그게 지나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것뿐일까. 망토마저 금색 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것마저 햇빛을 반사하고, 검이며 여기저기 달린 보석들도 햇빛을 반사했다. 무슨 인간거울이 따로 없다.

갑옷까지 입은 걸보니 기사인 것 같은데 혹시 왕따라도 당하는 걸까. 이건 완전 왕따 수준인데. 아니면 벌칙게임인가?

『근데 잘생겼네.』

저런 벌칙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복장을 입었으면 웃겨야 정상인데 웃기지가 않다.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갑옷을 얼굴이 받쳐주고 있다.

침입자의 얼굴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이란 이렇다! 라고 현실에 구현해 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단정한 머리카락, 강인한 눈매지만 부드러운 상냥함이 담긴 눈빛. 또렷한 이목구비.

예전에 인터넷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목이 늘어난 하얀 티와 후줄근한 바지를 입은 연예인의 사진이었다.

나나 일반인이 입으면 한숨이 절로 나올 옷이었지만 한창 주가를 달리는 잘생긴 연예인이 입자 빈티지 스타일처럼 멋진 옷이 되었다. 그걸 보며 역시 스타일의 중심은 ‘외모’라고 자기 비하를 했었는데.

진짜 얼굴이 잘생기니 저런 갑옷도 잘 어울리잖아. 제길.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

이 자식. 진짜 왕자인 거 아니야? 우스꽝스러운 건 둘째 치고 저거, 몸에 걸친 거 다 팔면 가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왕자인지 기사인지 모를 침입자는 말을 숲 어귀에 묶어 놓고 검을 휘두르며 한 발짝씩 발을 딛고 있었다. 숲에는 마력으로 된 가느다란 실이 거미줄처럼 이곳저곳에 쳐져 있었다. 저건 또 뭐야?

『필로우. 저거 혹시 네가 쳐둔 거니?』

“소인이 연습 삼아 숲 외곽에 쳐두었소이다. 자꾸 하다 보니 마력으로 끈을 뽑는데 성공했소이다.”

그렇게 끈을 가지고 수련하더니 성공했구나. 마력으로 만든 끈이라. 진짜로 너 스파이더맨이 되가는 것 같다?

어쨌든 필로우는 자신이 설치해 둔 마력의 끈이 잘리는 것을 느끼고는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에게 알려준 것이라 했다. 마력이란 보통은 볼 수 없는 것인데 그걸 보고 검으로 자르면서 들어왔다는 것은, 저 침입자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로군.

“…….”

그런데 핀이 아까부터 조용하다. 침입자가 들어오면 누구보다 득달같이 달려갈 녀석인데. 혹시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조금은 성격이 누그러진 건가?

“멋있어…….”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그렇지 핀?

“우와…….”

정수리로, 아니 나무니까 정수리가 없지만, 어쨌든 몸통에 벼락 한 줄기가 내리친 것만 같다.

눈망울에서 흠뻑 젖은 감정이 흘러나온다. 너무 눈이 부셔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핀이 이런 눈동자를 할 줄이야. 무슨 감정인지 겪어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생물의 본능이 아니라, 딸을 가진 아버지의 본능이 내게 경고한다.

저건 사랑에 빠진 눈이야!

핀. 남자다운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니? 저런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녀석이 뭐가 좋다고 눈을 반짝거리고 있어!

“흐음. 날이 덥군. 갑옷은 이래서 문제야.”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갑옷 상의를 벗는 침입자. 우람한 근육이 안에 입은 셔츠를 뚫고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인 내가 봐도 저건 한 번 만져보고 싶은, 그런 매력적인 근육이었다.

이거 완전히 핀의 스트라이크 존이잖아!

“벗었어?”

『핀! 보면 안 돼! 저런 거 보면 눈 버려!』

애타게 외쳐봤자 손도 없어서 핀의 눈을 가릴 수가 없었다. 아! 지금 나랑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앗! 아빠! 왜 갑자기 변하신 거예요!”

“핀! 저런 녀석한테 빠지면 안 돼. 저런 놈들은 여자를 등쳐먹는 나쁜 놈들이라고!”

하지만 내 말을 듣기도 전에 핀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나는 재빨리 다시 나무로 돌아가 침입자를 살폈다. 침입자는 땀을 닦아 낸 후 옷을 갈아입고 갑옷을 다시 입은 뒤였다.

“누구냐!”

가까이 다가가는 핀의 기척을 느낀 침입자가 검을 빼들었다. 그 모습마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멋진 왕자처럼 보여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디서 온 놈팡이인지 몰라도 핀을 빼앗길쏘냐? 나는 마력으로 녀석을 잡아 숲 밖으로 던지려고 했다.

“마력?”

하지만 나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침입자는 내가 움직이는 마력을 검으로 베어버렸다. 마력이란 거 원래 이렇게 쉽게 무력화되는 거였어? 제기랄!

“저기…….”

침입자가 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역력히 새겨진 감정은…….

“아아……. 엘프……!”

“안녕하세요?”

『아, 안 돼!』

누가 봐도 사랑이었다. 이런 젠장!

* * *

드디어 만났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고, 나는 흐르는 땀방울이 눈가를 스치는 느낌으로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어디서 오셨나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비루스 왕국의 왕자. 미르시온 A. 드렌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나를 소개했지만 시간을 조금 전으로 돌리고 싶다. ‘아. 네’라니.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어리바리하게 보이진 않았을까.

그녀는 내 상상 속에 존재했던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다.

숲의 종족다운 기품. 곧게 뻗은 허리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세워주는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고개 숙이지 않을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엘프라는 종족답게 아름다웠다. 곧게 뻗은 흰 다리는 나의 눈길을 끌었고 그녀의 외모는 내가 가진 ‘수집품’따위와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돌아가는 즉시 ‘수집품’들을 처분해야겠다. 그런 것들을 엘프와 비교하고 있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의 복장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합된 옷은 꽤나 매력적이었지만 프릴이 달리지 않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맨다리. 어째서 맨다리인가. 엘프들에게 스타킹이란 개념은 없는 것일까.

……이런 실수. 고귀한 종족에게 내 취향을 덧씌우려 하다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비루스 왕국에서 오셨군요.”

나답지 않게 또 실수를 해버렸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우리 왕국은 고깝게 보이지 않는 경계 대상이지 않은가. 이종족에 대한 편협한 차별정책으로 가득 찬 인간의 왕국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게 적의를 품으면 어떻게 하지? 겨우 만난 인연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

“아. 제가 숲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요. 바깥세계에 대해선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그러셨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엘프분들 중에서 고향에서만 평생을 보내는 분들도 계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행이다. 비루스 왕국의 악명에 대해 듣지 못했나보군.

신기하다.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늘이 이어준 인연처럼 우리 사이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혹시나 내가 이 숲에 온 것도 인연이 아닐까.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보통의 엘프라면 허락해 주지 않을 금기와 같은 일.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정말로 인연이라면 그녀는 나의 부탁을 허락해 줄 것이다.

“숲을 제게 소개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눈동자가 저 하늘만큼이나 맑고 푸르렀다. 지금까지 본 파란색의 보석들도 저 눈동자 앞에선 빛을 잃으리라.

“좋아요.”

* * *

세상에 마상에. 핀이 침입자에게 숲을 소개시켜 주고 있다니. 대체 왜? 인간이란 소리만 들으면 냅다 달려가서 말리지 않으면 때려죽일 듯이 행동하던 핀이? 설마 저런 놈한테 반한 거야?

『누가…… 이 상황 좀 설명해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곰……. 곰.”

「에……. 대장의 마음이 저놈한테 꿰인 것 같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씨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 말이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딸이, 핀이 사랑에 빠졌다 그 말인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침입자 네 이놈…….』

사이좋게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숲을 산책하듯 걸어가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보기 좋은데, 그게 내 딸이면 안 돼!

“갑옷이 참 멋지네요.”

“그러십니까? 원하신다면 일이 끝난 뒤에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진짜로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하하. 이 드렌. 왕족으로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와아! 고마워요!”

크윽. 저 놈팡이 자식이. 갑옷으로 내 딸을 유혹하다니. 벌칙게임이 아니라 네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거였냐. 취향 한 번 고약하군.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돈만 많은 양아치 자식. 왕자면 다야?

“숲이 정말 넓군요. 어디까지 이어져 있습니까?”

“으음. 지금 속도면 일주일은 걸어야 숲 중앙에 도착하겠네요.”

“일주일이나……. 거기에 거처가 있으신 겁니까?”

“예. 숲 중앙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지내고 있어요.”

핀!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아니지. 여기는 숲 중앙이 아니구나. 오히려 더 깊숙한 곳이네. 거짓말을 한 건가?

다행이다. 혹시나 남자한테 반해서 모든 걸 술술 다 말하는 줄 알았네.

“그렇군요. 가족이라……. 형제도 있습니까?”

뭘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물어보냐. 호구조사 하냐. 으으.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

“아버지랑 동생들이 있어요. 헤헤. 아, 남에게 가족들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내가 잘 못 들었나?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한 것 같은데.

“아버지는 정말 자상하세요. 동생들도, 가끔 말썽을 피우지만 다들 착하구요.”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계시지만…… 제게 상냥하신 분이 아니라.”

“아. 정말인가요?”

핀이 가엾은 동물을 보는 눈빛으로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침입자 녀석의 표정이 변했다. 맨 처음 보여주었던 ‘나,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소!’ 하는 표정이었다.

“저기 실례지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촉이 온다. 저건 막아야 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안 되지만, 나의 ‘아빠’ 레이더가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나는 마력으로 핀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말을 걸 수 없었다. 침입자의 몸에서 풍겨 나온 마력이 주변에 얇은 막을 만들며 내 마력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다.

갑자기 경계심이 강해진다. 이 녀석, 위험하다. 보통 실력의 침입자가 아니다.

“혹시…….”

나의 ‘아빠’ 레이더가 경고음을 내보내다 못해 터져 버렸다. 안 돼. 설마 물어보려는 것이 그것인가!

진지한 표정으로, 침입자가 핀에게 말했다.

“결혼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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