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72화 (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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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불청객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실내. 장식품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은 평생을 저축해도 살 수 없는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은 잔디처럼 부드럽게 깔린 카펫 위를 걷는 드렌 왕자. 하나의 조각품처럼 주변과 어우러진 그의 황금색 갑옷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반사하며 보는 이들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그것이 단순히 눈이 부셔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찌푸린 이들만이 알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왔느냐.”

복도 끝에 다다라 왕자가 도착한 곳은 왕의 방. 부전자전이란 이런 것일까. 드렌 왕자의 갑옷 못지않게 왕의 방 역시 보석과 미술품으로 방이 도배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쯧. 쓰레기들을 처리하고 왔다지.”

“벌써 들으셨습니까?”

“다 보고 있었다. 이리 오거라.”

수정을 깎아 만든 유리잔에 적갈색의 포도주가 한 줄기 폭포수처럼 부어졌다.

잔의 곡면을 따라 유려하게 흘러 들어간 포도주는 약간의 거품을 내며 왕의 손에서 왕자에게 전해졌다.

드렌은 아버지의 이런 면이 싫었다. 온갖 좋은 물건들은 모두 갖추어놓고선 그걸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 거품이 생길 정도로 마구잡이로 따른 포도주를 마시라니. 비싼 포도주의 값어치가 거품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예전엔 이러시지 않았는데. 왕족으로서 배운 예의와 지식들은 모두 잊었단 말인가.

이래서 노인네들이란…….

“그래. 내일 떠난다고?”

“예.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어서요.”

질이 떨어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드렌은 포도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잘됐군. 한 번 쭉 둘러보고 오거라. 소문만 믿는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지.”

“소문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당연한 소릴. 모험가 따윌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

태연자약하게 말하며 포도주를 들이키는 왕을 보며 그 모습이 꼭 돼지 같다고 드렌은 생각했다.

소문을 믿을 수 없다면 왜 자신을 보내는가. 나를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건가.

“다 알고 계시니 더 이상 할 말은 없군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흠. 그래. 네가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일기장을 봤을 텐데? 그럼 숲이 정화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알 테고. 잡종이라 말을 못 알아듣는 게냐?”

드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잡종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거슬렸다.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제가 일기장을 봤다는 건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왕은 대답이 없었다. 포도주와 함께 굴을 먹으며 조용히 술 맛을 감상할 뿐이었다.

드렌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추잡스럽게 굴을 빨아먹는 왕의 얼굴을 상상했다. 기분이 힘껏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왕의 처소에서 빠져나왔다.

“잡종 주제에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궁금한 것도 많군.”

문을 닫는 드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방을 뒤흔들 정도로 강하게 문을 닫았다. 평범한 문이었다면 부서지고도 남을 힘이었다.

드렌이 처소에서 나가는 순간까지 왕은 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 *

“다녀오셨습니까.”

“잘 손질해 둬. 내일 바로 떠날 거니까.”

“알겠습니다. 왕자님.”

드렌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갑옷을 벗었다. 갑옷 안에 감춰져 있던 그의 근육은 얇은 옷으로 가려지지 않고 우람하게 부풀어 올라 옷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맞이한 기사가 그의 갑옷을 들고 손질하기 위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드렌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양 옆으로 나란히 줄을 선 그의 ‘수집품’들이 그를 맞이하여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아아.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그의 방에 있는 ‘수집품’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모두 여자였다. 미인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용모 단정한 여인들은 그가 침대에 눕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빌어먹을 노인네. 그냥 만나지 말고 떠날걸 그랬어.”

“또 왕께서 잔소리를 하셨나요?”

드렌의 수집품 중 하나가 그의 다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그녀는 중요한 부위를 가려줄 속옷과 맨다리를 감싼 스타킹 이외에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외설스런 옷차림은 비단 그녀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더군. 제기랄. 어디서 감시하는 거지? 분명 주변을 마법으로 샅샅이 확인했었는데.”

옆에서 건네준 포도를 씹자 시큼한 과육이 그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자기 자식조차 감시하는 그런 돼지 같은 놈이 왕이라니.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군.”

“정말 무섭네요. 우리 왕자님께서 그런 말을 하시다니.”

“미안.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네.”

드렌이 팔을 벌리고 자리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방 안에 있던 여자들이 한 명씩 다가와 그의 전신을 주물렀다. 그녀들의 힘으로 단단한 그의 근육을 풀어주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것은 안마라기보단 그저 손으로 쓰다듬는 것에 불과했다.

여인들은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다. 개개인마다 길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여인의 귀가 보통 사람보다 살짝 길었던 것이다.

드렌은 자신의 몸을 쓰다듬고 있는 그녀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는 항상 이 상태로 잠이 들곤 했지만, 오늘 그의 하루는 그의 이마를 몇 번이나 찌푸리게 만들었다.

팔을 쓰다듬고 있는 여인의 손길이 평소보다 약했던 것이다.

“이봐. 내가 널 주워온 게 몇 년 전이지?”

“4년 전입니다.”

“슬슬 갈아치울 때로군.”

드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명쾌한 소리와 함께 팔을 주무르던 그녀의 눈동자가 탁해지더니 끈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드렌에게 돌아갔다. 마력이 빠져나올수록 그녀의 몸은 점점 말라가더니 이내 건어물처럼 바짝 말라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목 부근에서 부서져 옆으로 구른 그녀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인형 그 자체였다.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몇 명의 여인이 청소를 시작하자, 부서졌던 여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는 없던 것처럼 남은 여인들 중 하나가 그의 팔을 주물렀다.

“너희도 참으로 딱하구나.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엘프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잡종으로 태어나다니.”

“아뇨. 저희는 왕자님을 모실 수 있어서 행복한걸요.”

“왕자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왕자님.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나를 만난 게 오히려 너희들에게 불운이었겠지.”

몸을 일으키고 드렌이 그녀들의 눈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초점이 맞지 않는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인형과 같은 눈빛.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이었지만 드렌은 오늘 따라 그녀들의 눈빛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를 인형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놀면 즐거워?”

“너도 똑같은 잡종이잖아.”

“역겨운 놈. 너도 우리와 같은 인형에 불과해. 왕의 꼭두각시. 이참에 숲에 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시끄러워.”

그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여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처음 위치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인형처럼 멈췄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손가락으로 건드린다 해도 그녀들은 깜빡이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지만 자아가 없는 인형들. 드렌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말하는 ‘수집품’들. 그녀들을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제길.”

그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인형들과 함께 잘 기분이 아니었다.

감은 눈 너머의 어둠속에서 자꾸만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독한 이종족혐오자이자 인간우월주의자. 권력에 미친 늙은이. 불사를 꿈꾸며 아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늙은 괴물.

왕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자기 자신까지 싫어지는 드렌이었다. 자신뿐만일까. 그는 엘프와 결혼했을지 모를, 누군지 모를 조상을 증오하고 역겨워했다.

‘격세유전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드렌이 자신의 귀를 만졌다. 뭉툭하고, 귓바퀴가 있는 평범한 인간의 귀. 엘프의 피가 들어있다고는 생각조차 들지 않은 귀.

정말로 격세유전일까. 그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보통 인간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이고, 아버지이자 현재의 왕은 권력에 미친 돼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잡종이라는 매도는 그저 왕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명분일 뿐.

아니, 그 이상이다. 왕은 그저 나를 도구로 써 먹을 생각일지도 모른다.

엘프 이상의 마력을 가진 나는 여러 가지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일 테니까.

드렌은 내일 출발할 엘퀴라즈 숲에 대해 떠올리며 역겨운 왕의 얼굴을 잊으려 애썼다.

정말로 숲이 정화되었다면, 소문처럼 엘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들은 숲에 침입하는 것을 싫어한다. 몇 몇 엘프 부족들은 숲에 침입한 인간을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죽을 그가 아니었지만. 드렌은 엘프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드렌은 엘프들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숲이 정말로 정화되었다면, 왕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실현된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정화되었다면, 그것은 세계수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차라리 엘프들 편에 서서 세계수를 지키는 쪽이 더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 동안 그의 머릿속을 맴돌다가, 물에 떨어뜨린 잉크 한방울처럼 옅어지며 뇌리에서 사라졌다.

비어버린 생각의 틈이 다른 생각으로 메꿔졌다. 드렌은 그 노인네가 지금보다 더 오래 산다면 어쩌면 자신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미쳤는데 이 이상으로 미칠 리가.”

그는 방문 앞에 일렬로 서 있는 혼혈들을 보며 이미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엘프혼혈을 납치하거나 데리고 와서 마법으로 이지를 지워버리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짓이 정상일리가 없다.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삶. 나와 똑같다. 왕에게 도구처럼 부림당하는 나와.

그는 내일이 기대되었다. 왕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나가는 첫 왕국 밖으로의 외출. 그는 순수한 엘프가 보고 싶었다. 방 안에 있는 혼혈들이 아닌, 인간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엘프가.

“엘프라…….”

인간들과 부대끼며 사는 엘프의 긍지조차 잊은 그런 하등한 녀석들이 아닌.

“엘프…….”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잡종들이 아닌.

“꼭 만나보고 싶군.”

순수한 피와 자긍심을 가진 진짜 엘프를.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잡종이라 불리던 그의 꿈이었다.

“차라리 엘프로 태어났었더라면…….”

드렌은 오늘도 엘프가 된 자신을 상상하며,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인형이 된 엘프혼혈들만이 그와 같은 방 안에서, 그가 잠들자 눈꺼풀을 감으며 함께 잠이 들었다.

* * *

한 마리의 말에 의지하여, 황금빛 갑주를 입은 드렌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엘퀴라즈 숲을 바라보았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과연 저곳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토벌조차 불가능하다는 흉측한 마물과 마기일까.

아니면 그토록 보고 싶던 엘프들일까.

드렌은 마력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순수한 인간은 지닐 수 없다고 늙은 왕에게 매도당했던, 비정상적인 마력.

원망도 했고 때로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증거로 여기기도 했지만 이 날만큼 마력이 든든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자. 뭐가 됐든 나를 맞이하라. 이 몸이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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