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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왕자
인류의 유래 없는 평화의 시대. 각 종족이 분쟁을 멈추고 함께 이웃이 되어 살고 있는, 천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그런 시대가 지속되고 있었다.
전쟁이 사라지고 난 뒤, 국가는 군대에 투자하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만일을 대비한 병력만을 남겨둔 채, 남은 돈과 시간을 시민들을 위해 투자하기 시작했고 천 년 전과 다르게 사람들은 이제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해준 용사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으며 그들을 찬양했다.
그 용사들 중 한 명이 시초가 되어 세워진 나라 비루스 왕국. 이 왕국의 수도 역시 평화라는 이름이 꽃을 피운 것처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말끔하게 옷매무새가 정돈된 턱시도를 입은 남자들이 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양산을 쓰고 다른 여인들과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한 장면. 왕국의 수도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여러 시설들이 도시에 설치되어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봉사하며 인류의 평화가 가져다 준 현 주소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의 외곽으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런 시설물들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잘 포장된 도로 역시 이가 빠진 빗처럼 듬성듬성 부서진 벽돌이 휑하니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사람들을 위한 시설물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길 끝, 수도 외곽의 가장 끝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차마 집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조악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하수시설조차 없어서 씻지 못해 거무죽죽한 때로 뒤덮인 자들. 수도 중심부에 살고 있는 이들과 같은 도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여기서조차 쫓아내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한 남성이 거적때기로 만든 문 앞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남자의 뒤에는 아내가 딸을 감싸며 기사들을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뿐일까. 이 주변에 살고 있는 그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두려운 눈빛으로 기사를 보고 있었고, 그중에는 분노와 멸시가 담긴 사람도 있었다.
기사란 무엇인가.
귀족들조차 예의를 갖추는, 왕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그들은 일반 병사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예를 가지고 때로는 국민들을 위해 마물을 퇴치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기사를 존경과 예의, 선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으앙. 엄마.”
“데른. 괜찮아.”
하지만 엄마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아이가 기사들을 보는 눈에는 존경도, 예의도, 선망도 없었다. 담겨있는 것은 오로지 공포뿐.
그런 아이의 시선이 부담됐는지 기사가 멋쩍은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 명령이 중요했기에, 그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말했다.
“이미 몇 차례 경고했을 텐데. 너희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은 왕자님께서 사들이신 개인 부지다. 지금 너희는 불법거주를 하고 있으므로, 내일까지 이곳에서 철수하길 바란다.”
“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그 개 같은 양식장인지 뭔지 짓는다고 집을 뺏을 땐 언제고, 여기서도 못 살게 하면 우리는 어쩌라는 거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들었다. 그 돈으로 새로 집을 샀으면 되지 않았나.”
기사 역시 사람들에게 말하면서도 마음이 씁쓸했다.
양식장을 지으며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상금으로 얼마를 지급했는지 소문으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난민이었다. 양식장이 지어지면서 강제로 살 곳을 잃은 난민. 집을 잃고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
“돈? 그깟 푼돈으로? 한 달 먹고 살기도 빠듯한 그 돈으로 집을 어떻게 사!”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말을 외친 남자는 붉어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사가 되면서 그는 항상 기사로서의 본분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목숨을 다해 왕을 지키라는 정훈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마음에 새겨진 정훈.
-국민을 지키는 데 목숨을 아끼지 마라.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그들의 사는 터전을 빼앗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다. 내일 왕자가 이 땅을 확인하러 온다고 전해 들었다. 이곳에 무엇을 세우려는지 알 수 없지만 직접 나서는 걸 보면 이곳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만. 불만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 명심해라. 내일까지다. 내일까지 비우지 않으면…….”
“내일까지라고 했었나?”
자신의 목소리를 짓누르며 파고든 나른한 남자 목소리에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한 마리의 백마를 타고, 황금색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나가다 마주치면 누구든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잘생긴 미남자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에 꽂혀 장식품처럼 그를 뽐내주었는데, 손잡이 머리까지 푸른 보석이 박혀 있어서 검이라기 보단 보석을 장식하는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었어. 오늘까지 다들 나가줬으면 해.”
“왕자님. 이런 곳엔 어인 일로?”
남자의 정체는 바로 비루스 왕국의 차기 왕위 계승자. 미르시온 A. 드렌 왕자였다.
“아아. 내일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 말이야. 오늘 중으로 여기가 정리된 모습을 봐야 내일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최소한 여기가 좀 깨끗해져야 여행을 가도 내가 찜찜하지 않잖아.”
“아…….”
“그러니까 다들 어서 내 땅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그 집…… 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건 굳이 치울 필요 없어. 내가 치우라고 시킬 테니까 하루 빨리 몸만 빼달라고.”
드렌 왕자가 ‘나는 너무 착하단 말이야’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불똥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장작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들어가는 마음이 분노가 되어 사람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애초에 이 땅에 주인이 어디 있어! 마음대로 쫓아내서 겨우 잡은 터전인데 여기서 까지 꺼지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맞아! 왕자면 다냐!”
“왕자가 아니라 도둑놈이잖아! 지 애비랑 똑같은 자식!”
“어딜 감히!”
사람들의 비난에 몇몇 기사들이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왕자는 그들을 멈춰 세우지 않았다. 대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천한 잡종들이라 어쩔 수 없구나.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별수 없지.”
왕자의 말에 기사도 사람들도 모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모두가 멈춘 이 순간 오로지 정적만이 감돌았다.
인류가 하나로 뭉친 이후로, 다른 종족과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두 종족의 결실은 부모 모두의 특성을 이어받게 된다. 부모의 특성을 모두 이어받은 후손은 처음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물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의 수 덕분일까. 점점 대가 지날수록 강한 혼혈은 사라지고 인간의 특성을 많이 이어받는 자들이 늘어났다.
비루스 왕국은 타종족보다 인간이 월등히 많은 국가. 이곳에 사는 혼혈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아주 조금 다를 뿐, 완전히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잡종?”
하지만 혼혈이란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거의 금기나 다름없었다. 누가 법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은연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심지어 타종족을 싫어하는 자조차도 혼혈을 대놓고 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금기시되는 말을 한 나라의 왕자가 내뱉은 것이다.
“와, 왕자님!?”
“왜.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아인처럼 강하기를 해, 엘프나 마족처럼 마법을 잘 써. 그렇다고 인간인 것도 아니잖아. 그게 잡종이지 뭐겠어. 적어도 쓸 만하기라도 했으면 혼혈이라고 불러줄 의향이 있기는 한데 그런 놈이 이런 데 살 리가 없지.”
“이익! 우리가 잡종이라고?”
“빌어먹을 자식이!”
사람들이 분노로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에게 떠나라던 기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잡종’이라며 비웃은 왕자뿐. 왕자를 찢어죽이기 전까지 이들의 화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와, 왕자님. 피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몸으로 막으며 기사가 외쳤다. 차마 사람들을 벨 수 없었던 것이다.
“다들 물러터졌군. 물러서.”
“왕자님?”
왕자가 손을 뻗는 순간, 모든 기사들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만이 지금이 기회라며 왕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돌격은 왕자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불길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
“으아아악!”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길에 삼켜졌건만, 비명을 지른 자는 가장 옆에서 달려가 불길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았던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역시 왼쪽에 옮아 붙은 불길을 끄기 위해 땅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굴렀지만 곧 완전히 삼켜져 한 줌의 재가 돼 버렸다.
“여보!”
“아빠!”
남아 있던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왕자는 그런 외침조차 짐승이 시끄럽게 짖는 것처럼 느껴져 짜증스러웠다.
짜증의 원인은 없애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거적으로 둘러싸인 집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왕자의 손에서 또다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집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왕자님! 대체 무슨 짓을!”
“시끄러워. 어차피 이런 놈들 죽는다고 별일 있겠어.”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다가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자 환상처럼 사라졌다. 불꽃이 있던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검은 재뿐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국민이란 말입니다!”
재 가루가 된 사람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며 기사가 외쳤다. 처음 난민들에게 철거 명령을 내렸던 그 기사였다.
그는 후회했다. 차라리 이들을 힘으로 몰아낼 것을.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아. 아직도 너 같은 놈이 남아있다니. 아직도 모르겠어? 머리는 폼이 아니잖아.”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양식장 때부터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너만 모르는가 보구나. 네 동료들을 봐라.”
흠칫 몸을 떤 기사가 동료들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단 걸.
“처음부터…… 이런 계획이었습니까?”
기사가 공포심에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비루스 왕국에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이 은연중에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다른 곳에 비루스 왕국을 ‘인간우월주의자’들의 땅이라며 비꼬는 것을.
“얌전히 떠났으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겠지. 내일 급하게 여행만 안 갔어도 너희들에게 맡겼을지도. 뭐, 하는 짓을 보아하니 내가 직접 나서길 잘했네.”
지독하다. 기사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책하는 기사. 하지만 무언가 발견했는지 헐레벌떡 뛰어가 잿더미를 손으로 치웠다.
재를 털어내자 그곳엔 한 어린 아이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이를 떨었다.
“어, 엄마. 엄마.”
“흐음. 엄마가 지켜준 모양이구나. 귀가 조금 길쭉한 게 엘프 잡종인가. 좀 더 엘프 쪽 피가 진했으면 내 ‘수집품’에 넣어줬을 텐데. 아쉽네.”
소녀는 불길이 삼키기 직전, 자신을 감싸준 엄마의 얼굴 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것이다.
왕자가 멀리서 그런 소녀를 보며 품평하듯이 말했다.
“보아하니 이제 기사할 생각이 없을 것 같은데. 축하해. 한 명이나 살았잖아.”
소녀를 끌어안은 기사는, 말에 올라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사라지려는 왕자를 보며 물었다.
“그럼…… 이 땅은 왕자님께 아무 필요도 없는 곳이었습니까?”
“별장이나 지을까 생각 중인데 확실한 건 아니야. 우선 여행이나 다녀오고 다시 생각해 보지 뭐.”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부러져 강렬한 치통과 함께 비린 피 냄새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왕자에게 기사도, 방금 전까지 난민들이 살던 땅도 관심 밖이었다. 그는 내일 떠날 ‘여행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돌고 있는 소문의 장소가 그의 흥미를 자극했고 하루 빨리 떠나기 위해 일정을 바꿨던 것이다.
“엘퀴라즈 숲이라. 빨리 가보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