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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 마리의 개그맨(외전)
나는 곰이다.
엘퀴라즈 숲에서 주인님과 함께 살고 있는 그냥 평범한 곰이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냥 곰이다. 제길.
성의 없는 이름이라는 건 나도 안다. 곰에게 곰이라니.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건 정말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지어진 것을.
다른 멋진 이름을 쓰고 싶어도 내 본능엔 곰이라고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이름 따윈 포기한 지 오래다. 나는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곰.”
「오늘도 실패했다.」
요즘 들어서 나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지난번 모험가들과 싸웠을 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전투를 치렀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아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명승부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전투가 끝난 후 모두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 남자가 이상한 약을 먹고선 갑자기 너랑 비슷해지는 모습까지는 봤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 남자랑 이야기하느라 못 봤어.”
『미안. 나도 못 봤어. 다른 쪽에 신경 쓸 게 있어서…….』
“소인도 전투가 끝나고 싸움을 복습하느라 보지 못했소이다만……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서 자만하면 안 되지 않소이까?”
아무도 내 전투를 보지 못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한다. 다들 바빴으니까. 못 볼 수도 있다. 싸움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괜찮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내 존재의 정체성을 상실할 만큼 큰 좌절을 겪었다.
요즘 들어 존재감이 희미해진다는 초조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주인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주인님이 인간형으로 변하길 기다렸다.
주인님이 인간형으로 변하신다는 것은 곧 쉬겠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그 순간을 노려 오랜만에 나의 개그를 들려드릴 생각이었다.
“그럼 조금 쉬어볼까.”
언제나처럼 주인님은 인간으로 변해 누워서 낮잠을 자려 했다.
솔직히 나무일 때나 인간일 때나 주인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껏 그 사실을 말한 적은 없는데, 주인님은 상냥하신 분이라 화를 내지 않으셔도 풀이 죽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잠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삼천포는 포를 삼천 번 뜬 것!
훌륭하다. 기억해 놨다 나중에 꼭 써먹어야겠다.
주인님께서 쉬는 시간. 내 존재감을 다시 수면위로 띄울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곰. 곰. 곰.”
「주인님. 문제 하나 내겠다. 정답을 맞춰봐라.」
“응? 문제?”
나는 그동안 나의 개그를 되짚어보며 한 가지 허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개그는 곰을 주제로 하는 개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곰인 나만 웃기고 나무나 엘프, 토끼에겐 웃기지 않았던 거겠지.
그래서 이번엔 미리 준비해 둔 ‘나무’개그를 시도해 보았다.
“곰. 곰.”
「그럼 시작한다. 길을 가다 나무를 주우면?」
“으음…… 나무를 줍는다. 잘 모르겠는데. 답이 뭐야?”
“곰.”
「우드득.」
그 순간 주인님이 지은 표정이 망막에 새겨진 듯 잊히지 않는다.
거기서 끝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개그계의 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범하고 말았다.
“곰…… 곰곰…….”
「그러니까…… 나무는 우드고 그걸 주웠으니 득했다는 뜻에서…….」
자신의 개그를 설명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말이다.
주인님의 차갑게 식은 눈빛이 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모험가와 치렀던 엄청난 전투에서 입은 부상조차 이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나도 알아. 곰. 그래. 재미있네.”
나를 동정하듯이 말하는 전형적인 칭찬 따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미 눈빛에서 나의 개그가 재미없다는 티가 팍팍 났다.
여기서 끝냈더라면 차라리 나았다. 주인님께 이런 종류의 개그가 통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얻었다는 셈치고 그냥 물러났더라면. 하지만 나는 초조한 나머지,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관객에게 준비해 온 개그를 연달아 해버렸다.
이때부터 이미 자포자기 해버렸다. 마구 개그를 던지고 하나만 걸려라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곰? 곰.”
「나무가 네 개 있으면? 포트리스.」
“…….”
“곰? 곰.”
「나무가 다섯 개 있으면? 오목.」
“…….”
“곰, 곰.”
「재, 재미없나. 잼이 없으면 냉장고에…….」
“곰. 이제 그만해도 돼.”
“곰? 곰곰? 곰…….”
「으음? 개그가 이상한가? 이상하면 치과에…….」
“하아.”
주인님의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숨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최악의 보상을 받고 말았다.
“하.하.하.정.말.재.미.있.네. 곰.나.중.에.더.해.줘.”
꿰뚫린 심장이 터져 버렸다. 나는 기운이 빠져 바닥에 스러졌다. 주인님은 그런 나를 본체만체 평소처럼 낮잠을 주무셨다.
그리하여 나는 좌절감을 등에 업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개그. 그것은 이 숲에서 유일하게 남들에게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나만의 특기였다.
싸움? 싸움은 나보다 대장이 더 잘한다. 나는 필로우보다는 강하지만 대장보단 약한, 중간에 낀 존재라 더욱 애매하다.
귀여움? 귀여움은 아쉽게도 필로우를 당할 수 없다. 그 녀석은 눈매도, 말투도 남자 같은데 이상하게 다들 귀엽게 봐준다. 그리고 대장도 나보단 귀여울 거다. 애초에 수컷인 내게 귀여움을 어필하라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대장과 필로우에게 없는 나만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개그였거늘, 나는 오늘 그것을 부정당한 것이다.
터덜터덜 기운 없이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나무에 부딪혔다. 어디서 많이 본 나무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났다. 대장이 사천왕이라고 데리고 왔던 토마스인지 뭔지 하는 나무다.
나무가 사천왕이라니…… 재미있다.
잠깐. 이럴 수가. 나는 개그에서조차 대장에게 밀리고 있던 것인가!
등에 업고 있던 좌절감이 더욱 커졌다.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나의 개그는 재미없는 것인가.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이 숲에선 개그를 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개그란 무엇인가. 주변 환경, 개그를 하는 타이밍, 개그를 들어줄 관객이라는 삼박자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우선 관객이 없으면 아무리 재미있는 개그라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냥 관객만 있어선 안 된다. 개그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대장, 필로우, 주인님은 좋은 관객이 아니다. 대장은 주인님에게만 관심 있고, 필로우는 수련만 하고, 주인님은 개그보다 자는 걸 선호한다.
관객의 수준이 이러니 타이밍이 나올 리가 있나.
언제나 곁에서 개그 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초조함에 이기지 못하고 오늘 일을 저질러 버렸고, 당연하단 듯이 실패로 이어졌다.
“고오오옴!”
「왜 숲인 것이냐아아아!」
가장 난관인 점은 이곳이 숲이라는 것이다.
숲. 어디를 둘러봐도 숲이다. 나무, 돌, 절벽, 강.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숲이란 소풍이나 나들이를 오는 곳이지 개그를 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진정한 개그란 사회, 정치, 환경을 풍자해야 하는 법이다. 개그란 단순히 웃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닌, 그 안에 희극을 담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높은 수준의 풍자인 것이다.
근데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라곤 모험가들이 한 번 찾아온 것뿐이다. 그 외에는 화폭에 박힌 그림처럼 무서울 정도로 변화가 없다.
모두가 변하지 않으니 개그소재가 없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니 생활에서도 소재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환경도 항상 같은 환경, 사람들도 같은 사람, 생활도 같은 생활…….
“고오오옴!”
「이런 곳에서 좋은 개그가 나오겠냐!」
그렇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모두 이 빌어먹을 환경 때문이다.
환경이 따라줘야 내가 좋은 개그를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환경 탓으로 내 처지를 비관하고 나니 개그에 대한 자부심이 조금 살아나는 것 같다.
나도 안다. 다 핑계라는 것을.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상담할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결하는 수밖에.
“누가 소리를 지르나 했더니 무뢰한 당신이었소?”
내가 지른 고함 소리를 듣고 필로우 녀석이 찾아왔다.
이래저래 내게 자꾸 싸움을 걸어오는 귀찮은 녀석. 그래도 귀찮기는 하지만 내게 조금은 관심을 주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일이다. 최근엔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자기 혼자 수련하기 바쁘다.
귀찮게 엉겨 붙던 나날들이 그립게 느껴질 줄이야.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그래. 이 녀석에게 상담해 보자. 그래도 내게 일푼의 관심이나 주는 녀석이지 않는가.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열심히 지금 내 상황에 대해 필로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녀석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니 무뢰한의 고민은 개그가 재미없다는 것이오?”
“곰! 곰!”
「내 개그가 재미없는 게 아니다! 환경이 문제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인에겐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소이다.”
심장이 아프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내 개그는 아저씨들이나 웃을 개그란 것을. 하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하던 사실을 타인의 입으로 듣자 더욱 고통스럽다.
“그리고 소인이 보기엔, 무뢰한 그대는 말로 웃기는 것보다 몸으로 웃기는 편이 나을 것 같소이다. 그대의 말마따마 숲에서 소재가 나오지 않는다면 몸으로 웃기는 쪽이 훨씬 편하지 않겠소?”
“고옴! 곰!”
「그건 사도다! 진정한 개그는 말로 웃겨야 한다!」
“사도고 뭐고 그대가 고를 처지는 아닌 것 같소만……. 뭐, 수고하시오.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소.”
내 고민에 대해 별것 아니라는 투로 해답을 내고 필로우 녀석은 사라졌다.
다시 수련이라도 하러 간 것일 것이다.
제길. 몸으로 웃기라니. 그건 지적 유희가 아니지 않는가.
몸 개그란 자고로 타인의 고통을 보고 웃는 저질들이나 즐기는 하급개그다. 넘어지고, 다치고, 부딪히는 모습에서 웃음을 찾는 것부터가 비정상이지 않은가. 그게 대체 왜 우습단 말인가. 걱정해 주고 치료해줘야 하는 상황이거늘.
“곰…….”
「하지만 부정할 순 없다…….」
그렇지만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다. 어차피 내가 다칠 일은 없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몸 하나만큼은 튼튼하다.
혹시라도 상처입거나 다쳐도 주인님이 치료해 주실 거다.
몸 개그라. 시도해 볼까. 어쩌면 주인님의 취향은 그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토끼녀석. 조금은 도움이 됐군.
자. 밑져야 본전이다. 주인님께 가자. 재도전이다!
* * *
곰이 떠나고, 혼자 남은 토마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푸핫! 우드득이라니. 포트리스에 오목까지. 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