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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용사의 후손
은색의 덮개로 닫은 접시를 들고 복도를 걷는 시종장은 오늘도 향긋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바다를 상상했다.
내륙에 위치한 비루스왕국에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는 그에게 바다란 상상으로밖에 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이 시종장이란 직업도 고향인 비루스에서 하고 있었다. 그가 바다와 그나마 비슷한 곳을 본 건 지금 가지고 가는 굴을 따온 양식장에 들렀을 때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왕의 지시로 만들어진 양식장은 바다와 비슷하다고 했다. 확실히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먼, 거대한 호수로 보이기는 했다. 양식장을 만드느라 많은 군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동원해 양식장의 환경을 바다처럼 바꾸었다.
‘싱싱한 굴이 먹고 싶도다.’
고작 굴을 양식하기 위해 도시에 작은 바다를 만든 것이다.
양식장을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갔는지 시종장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걸 지은 해에 세금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사실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양식장을 만든 데에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굴은 선도가 생명이로다. 싱싱하지 않으면 맛이 시들어 버리지.’
양식장을 생각하자, 시종장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양식장이 완성된 직후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보아라. 위대하지 않느냐. 내가 바다를 만들었도다.’
그걸 만든 것은 국경을 지켜야 할 병사들과 마법사들이며 거기에 들어간 돈은 모두 세금이었다. 왕이 한 일이라곤 손가락으로 양식장이 세워질 부지를 가리킨 것밖에 없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이 고아원과 빈민가 부락이었지만 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거리가 깨끗해졌구나.’
오히려 그것조차 왕의 업적이 되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시종장은 알지 못했다.
거대한 부지와 세금, 그리고 살 곳을 잃은 국민들 위에 세워진 양식장에 대해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그 누가 주인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시종장은 자신의 주인이자 비루스 왕국의 왕인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와라.”
어전(御殿)이 아닌 별관의 어느 방. 조심스럽게 왕의 허락을 맡고 문을 열고 시종장이 들어갔다.
별관에서도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밀회(密會)의 장소라 그런지 평소 왕이 좋아하는 화려함이나 사치스러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좁은 방이었다.
원탁의 테이블 너머에 왕이 앉아 있었다. 늙어 흐물흐물해진 얼굴가죽이 아래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얗게 센 수염이 길게 자라나 현자(賢者)의 지혜를 가진 노인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굴을 보며 희열을 빛내는 눈동자가 그런 여지를 덮쳐 깨끗이 흐트러뜨렸다.
“신선하군. 올려 두거라.”
“예. 전하.”
시종장은 왕의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왕이 지금 보여준 능력이 신기했다.
멀리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잠깐 맡는 것만으로도 왕은 해산물이 신선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선하지 않으면 왕은 절대 그 해산물을 먹지 않았다.
왕이란 원래 이렇게 비범한 구석이 있는 것일까. 시종장은 이상한 쪽으로 왕의 평가를 높이 사고 있었다.
“나가 있게나.”
“알겠습니다. 전하.”
왕의 명령에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뒤로 돌아 나가는 시종장의 시야에, 왕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손님이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다. 그것은 시종장의 추측이었다.
손님은 하얀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의 윤곽조차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호위 한 명 없이 이런 수상한 자를 만나는 왕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런 밀회가 하루 이틀은 아닌지라 별말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왕과 정체불명의 사내 둘만이 남았다. 왕은 손을 뻗어 굴 껍질을 들었다.
싱싱한 굴 위에 뿌려진 레몬즙이 왕의 입속에서 군침을 감돌게 했고, 그에 보답하여 굴을 입에 대고 빨아들였다.
“맛있군.”
추잡스러운 소리를 내며 굴을 연달아 빨아들이는 왕을 보며 사내는 그가 돼지 같다고 느꼈다.
굴이란 원래 먹으면 소리가 나기 마련이니 딱히 문제될 것은 없는데 어째서 왕이 그러니까 추잡스러워 보일까.
사내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덕분에 찡그린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군.”
“확실할 겁니다. 소문까지 퍼진 마당이니.”
여전히 한 손에 굴 껍질을 들고 말을 꺼내던 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는 자신이 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게 문제야. 소문이 퍼졌잖은가. 모험가란 족속들은 입이 싸. 역시 믿을 만한 놈들은 아니야.”
“원래 모험가들이란 비렁뱅이 같은 족속들이지 않습니까. 천한 놈들은 어쩔 수 없지요.”
그의 말에 먹던 굴을 내려놓으며 왕이 큰소리로 웃었다. 주름진 목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호탕하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들어 말라 죽어가는 고목나무를 비벼대는 것만 같은 불쾌한 웃음소리에 사내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왕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거늘, 왕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네는 우리 선조님께서 모험가였다는 사실을 잊은 겐가?”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됐네. 잘 알고 있네. 요즘 모험가들이 비렁뱅이 같은 놈들이긴 하지. 선조님 때와는 다르게 말이야.”
나긋하게 말하는 왕의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내는 방심하지 않았다.
왕은 선조가 직업으로 삼았던 모험가와 지금의 모험가는 전혀 다른 직업인 것처럼 분리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 물건을 볼까.”
손가락을 빨며 말하는 왕에게는 위엄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사내는 품에서 도끼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왕은 그것을 만져보더니 피식하고 헛웃음을 뿜었다.
“정말이었군. 그냥 도끼야. 평범한 도끼. 세계수로 만들어졌다곤 생각되지 않아.”
“가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험가들을 한 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아. 그럴 필요 없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이런 것쯤이야 숲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왕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굴 따위에 느끼던 탐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끈적끈적하고 농밀한 탐욕에 사내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 넓은 숲을 정화시킬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야. 세계수로 만든 무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무언가가. 어쩌면…….”
왕은 뒷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가면 쓴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이곳에서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니 됐네.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하지.”
가면의 사내는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동안 왕을 위해 뒤에서 노력해왔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들으니 반응할 수 없었다.
“내 앞에서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쥐새끼를 믿을 수야 없지. 자네 같으면 믿겠나?”
사내는 가면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끝까지 맨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자를 어떻게 믿겠는가.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인사를 받아들이며 사내는 축객령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네 주인에게 전하게나. 이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럼 이만.”
사내가 사라지고 난 후, 방 안에 홀로 남은 왕은 도끼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왕은 마치 맹인처럼 도끼를 구석구석 손으로 더듬으며 그 모양새를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듯이 눈으로 도끼를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끼에서 손을 뗀 왕은 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책은 장수가 백 장은 될까 싶을 정도로 얇았다.
책의 겉표지는 닳고 낡아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표지만큼이나 종이 역시 누렇다 못해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왕은 조심스럽게 표지를 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혹여나 책이 부스러질까 걱정되어 책장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한 장씩 집어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확실히 그 도끼가 맞군.”
독서에 심취한 것 같았던 왕은 어느 장에서 읽는 것을 멈췄다. 거기엔 테이블 위에 놓인 도끼와 똑같이 생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숲이 정화되었다니.”
늙은 왕은 흥분하여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뿜었다.
혈액이 몸을 달구는 것이 직접 느껴졌다. 지쳐 헐떡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말처럼 이젠 더 이상 뛰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이런 숨을 내쉰 게 얼마만일까. 왕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마기(魔氣)를 정화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세계수뿐. 하지만 숲을 정화하려면 이런 조그만 무기론 택도 없지.”
지금이라도 당장 정화된 숲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서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늙은 몸으로는 무리해서 움직일 수 없다. 시종들을 데리고, 군대를 이끌고 몸소 출정할 만큼 건강하지 않았다. 건강하냐고 한다면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웠다.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숲을 정화한 무언가가. 그건 분명히…….”
벌써부터 피부가 당겨오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번에야말로 더 많은 것들을 즐기리라. 음식, 놀음, 전투, 운동.
그리고 여자까지.
왕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며 웃었다.
“세계수겠지.”
* * *
밖으로 나온 사내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손으로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가면을 잡은 손을 이대로 내리면 이 갑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있는 곳은 아직 왕성 내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
대신 그는 다른 방식으로 갑갑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방 안에서 혼자 즐거워하고 있을 왕을 생각하며 함께 웃었다. 지금쯤이면 세계수가 있을 거라며 그 쭈글쭈글한 얼굴로 힘껏 웃고 있겠지.
참으로 역겹고 탐욕스러운 왕이 아닐 수 없었다.
무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재능을 가진 왕. 하지만 그 평범한 재능을 짓누르는 탐욕과 허영심이 문제였다.
평화로운 시대이기에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왕은 전란의 시대였다면 가장 먼저 신하들에게 배신당할 그런 종자였다.
과거 마왕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용사가 건국했다는 비루스 왕국. 그러나 저런 자가 용사의 후손이라니. 용사가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자신의 주인을 떠올렸다. 주인은 자신을 주인님이라 부르라고 시킨 적이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불렀다. 부를 수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그를 섬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그를 주인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분만큼 이상적인 주인은 없었다.
그분은 모르는 것이 없는 현명함을 지니고 계셨다.
그분은 원수를 사랑할 자애로움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판단력을 갖추고 계셨다.
그분은 이 세상의 왕이 될 자격이 차고 넘치셨다.
그런 주인님을 세상은 알지 못했다. 가면의 사내는 그것이 억울했다. 왕의 자질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것이 꼴같잖았다.
“후후후…….”
현명한 그의 주인은 비루스 왕국의 늙은 왕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늙은 왕에게 팽을 당했지만 분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진행될 테니까.
언젠간 모두가 그분을 우러러보며 찬양할 것이다.
가면의 사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