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소문은 일상에서 시작된다(5)
시장 한복판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른 에르나르. 그의 목소리는 엘리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도 충분한 성량이었다.
엘프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두 사람이 이 도시에 머문 1년간 그들의 관계는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쑥덕거리며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뭐야. 왜 불러.”
엘리사는 에르나르가 애칭으로 불러준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지난번과 같은 실망감을 느낄까 봐 두려웠다. 에르나르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겁 많고, 눈치 없고, 소심한 남자였으니까. 지금의 애칭도 다음에 꺼낸 대화에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 그러니까…… 엘리사 씨.”
“하!”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이곳에서 큰소리로 자신을 애칭으로 불러준 그에게 한 가닥 기대감을 품었던 그녀는 그 기대감 이상으로 실망했다. 그리고 한순간 애칭으로 불렸던 것에 대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 장난해?”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의심과 불신이었다.
어리숙하고 눈치 없어 보이는 에르나르의 모든 행동들이 사실은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은근히 당황하는 나의 반응을 보며, 어린아이가 곤충을 가지고 장난치듯이 이곳저것 건드리며 장난치는 것은 아닐까.
날개가 찢어지든, 다리가 떨어지든 그저 짧은 순간의 장난처럼 나를 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그녀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날 가지고 장난치면 좋아? 그 잘난 마력은 뒀다가 어디에 써먹는 거야?”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에르나르는 마력으로 상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나의 감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자꾸 거리감을 두는 걸까. 내가 싫은 걸까? 싫다면 왜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데? 혹시 내가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
그런 불만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뭉쳐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괴로움은 한줄기 눈물이 되어 그녀의 눈가를 적셨다.
“쳇.”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울었다는 것이 창피했는지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까지도 에르나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물에 당황한 에르나르. 어떻게 해야 할지 백지처럼 머리가 멍해진 그가 선택한 행동은 그저 한 마디 탄식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아……”
‘저런 멍청이! 여자가 울고 있잖아! 뭐해, 이 자식아!’
두 남녀의 애틋한 고백 장면을 기다리고 있던 시장 통의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한마음이 돼서 외쳤다.
드디어 두 사람이 사귀는 게 아닐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간다면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순간, 시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둘을 이어주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엇차. 실례.”
“으앗?”
누군가가 에르나르의 뒤를 지나가는 척하면서 그를 앞으로 밀어버렸다. 에르나르와 엘리사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자자. 이쪽으로 가자고.”
“어? 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엘리사 쪽으로 지나갔다.
무리의 한가운데 끼여 에르나르가 강제적으로 엘리사 쪽으로 끌려갔다. 임무를 마쳤다는 듯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에르나르를 비켜주며 엘리사의 뒤쪽으로 사라졌다.
“뭐해? 이 멍청아. 이대로 포기할거야? 이렇게 포기할 거면 내가 채간다?”
에르나르를 끌고 간 사람들 중 누군가가 사라지기 직전에 에르나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에르나르의 망설이는 마음에 불을 지켜주기 위한 장작이었을 뿐이었다.
“……!”
에르나르가 그 말을 듣고 누가 말했는지 찾으려 해봤지만 이미 무리는 멀리 떨어진 후였다.
찾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마음은 범인을 찾고자 하는 것에서 멀어져 있었다. 범인의 의도대로 그의 마음에 불이 지펴진 것이다.
장작불이 지펴진 그의 마음은 순간 엘리사가 사라진 미래를 상상해 버렸다.
그녀가 없던 시절이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었고, 그동안 살아온 삶이 특별히 불행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 그는 신선한 충격에 머리 위의 하늘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다른 여자와 다르게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며, 때로는 누나 같기도 하고 때로는 선배 모험가로서 조언을 해주는 특이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녀가 사라진 미래를 상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고백을 하지 못했다.
“엘리사 씨. 아니, 엘.”
“……왜.”
그녀를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감정도 알지 못했을 텐데. 그랬다면 이전과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엘리사를 만나게 되었고, 에르나르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엔 언제나 그녀가 곁에 있었다.
반드시 연인의 모습으로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쭉 모험가로서, 동료로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래서 그는 고백을 할 수 없었다.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인 지금 이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으응.”
그러나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생겼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상상. 차라리 그녀와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백배는 낫다고 생각될 정도의 최악의 미래.
그녀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는 미래. 그 미래가 에르나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엘.”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이제야 둘이서 사귀는구나, 라며 커플이 된 둘을 마음속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작불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에르나르의 행동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에르나르가 무릎을 꿇고 작은 상자를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딸칵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반지가 들어 있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너무 빠르잖아!”
극단적으로 빠른 진도에 참을 수 없던 어느 군중이 큰소리로 외쳤다.
방금 전까지 어색했던 관계가 이제 풀어지나 싶었는데 이 상황에서 프러포즈라니. 최악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읏…… 아, 안 되나요?”
사람들의 염려대로 엘리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그 둘의 앞날을 예견해 주는 듯 했다.
“……풋! 아하하하!”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에르나르를 내려다보던 엘리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나르도, 관중들도 영문을 모른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하여간. 엘프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너라서 그런 거야? 결혼해 달라는 말은 일단 사귀고 난 다음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런가요? 그럼 엘! 저랑 사귀…….”
“아아. 됐어. 여기까지 오는데도 2년이나 걸렸는데. 결혼까지 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기다리다가 머리가 세겠다.”
“그, 그럼?”
“너, 내 직업 몰라? 도둑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고.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든 엘리사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반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자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좋아. 결혼하자.”
“엘!”
아직 광룡의 마력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기쁨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에르나르가 일어나 엘리사를 힘껏 끌어안았다. 엘리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지 그의 등을 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그만해! 사람들이 보잖아!”
“싫어요. 놓치지 않겠어요.”
“이 바보…….”
흥미진진하게 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 누군가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마냥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아이는 몇 명이 좋겠습니까?”
“에에?”
“너무 나갔잖아! 이 멍청아!”
박수를 치던 관중들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엘리사의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허억, 허억.”
간신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대장은 바닥에 검을 꽂아 지팡이처럼 몸을 지탱했다. 그는 어쩐지 이 장면이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많이 강해졌네. 그 정도면 됐다. S급 해도 되겠어.”
싸움이 막 끝난 이 와중에 품에서 꺼낸 종이에 추천서를 써주는 홀랜드.
대장의 상태에 비해 그는 막 산책을 나갔다 돌아온 청년처럼 아무런 상처도, 헐떡임도 없었다.
“자, 여기 있다. S급, 축하한다.”
“가, 감사합니다. 허억. 허억.”
“그래서 소감이 듣고 싶은데? 나랑 그 엘프. 둘 중에 누가 더 강하냐.”
“허억. 저는, 허억.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건 그렇지? 역시 직접 붙어봐야 되려나. 좋아. 오랜만에 세상구경 좀 할까.”
숨을 간신히 고른 대장은 스승의 말에 놀랐다.
거의 20년 가까이 이곳에서 틀어박혀 생활하던 스승이 아닌가.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대장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홀랜드가 길치라는 사실이었다. 괜히 이곳저곳 헤매다가 성질난 스승이 난장판을 치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안 돼. 안 그래도 싸움이라면 환장을 하는 분인데. 막아야 한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엘퀴라즈 숲까지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됐다. 나 이제 길치 아니다. 이것만 있으면…… 후후.”
대장의 제안을 거절한 그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검은 빛의 수상한 액체가 병 속에서 끈적끈적하게 흔들렸다.
“마제 영감 발명품은 영 믿음이 안 갔는데, 널 치료한 걸 보니 한 번쯤은 믿어 봐도 괜찮을 거 같다.”
“그게 뭡니까?”
“방향치 치료 마법 물약이라던가. 길치인 나도 치료할 수 있다더라고.”
홀랜드는 말을 끝내자마자 단숨에 검은 액체를 들이켰다. 끔찍한 맛이었는지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끄으.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없네. 입가심이라도 해야겠다. 콧수염. 술 한잔하자.”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제 곧 귀환마법이 작동할 시간이라서……”
“그거 언제 돌아가지는데? 시간 한참 지나지 않았냐?”
“으음. 그러고 보니…… 설마!”
대장은 아까 전 마력을 빨아들이던 수정구슬이 생각났다. 몸에 걸린 마법을 빨아들인다고 했는데 검은 마력뿐만 아니라 귀환마법까지 빨아들인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귀환마법까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잘됐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 자는 김에 술도 한잔하고.”
“하, 하지만 최대한 빨리…….”
대장은 위기감을 느꼈다.
홀랜드가 말하는 술 한잔의 의미는 밤새도록 마시는 것을 넘어서 며칠 동안 끊임없이 마시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밑에서 수련할 때 고생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하아. 하나밖에 없는 제자라는 놈이 스승이랑 술도 안 마셔주고. 인생 헛살았구나.”
“아, 알겠습니다. 마시죠. 예. 마시면 되죠.”
“오호! 자신이 있나 보구나. 그래. 지금 바로 시작하자고!”
S급이 되었다는 약간의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대장은 예전과 다르게 별문제 없을 것이라 여기며 홀랜드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은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2년 전 스스로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대장을 금주로 이끌었다고 한다.
* * *
엘퀴라즈 숲에서 도시로 돌아간 모험가들. 그리고 그들의 일상 속에서 서서히 퍼져나간 소문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과일장수의 입에서 일반 시민들에게로.
길드 관계자들의 입에서 다른 지역의 길드로.
은거하고 있던 스승의 귓속으로.
그리고……
“숲이 정화되었다라……”
어느 왕국을 다스리는 왕의 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