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66화 (6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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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소문은 일상에서 시작된다(4)

“으하하하! 하긴.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냐. 불러서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거지. 네 이름은 콧수염이 딱이야, 딱.”

“하하…… 저야 상관없습니다. 이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동료가 생겼다고 하지 않았냐? 설마 걔들도 콧수염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니지만. 대장이라고 부릅니다.”

“그건 또 그거대로 웃기는데? 으하하하! 골목대장 하던 놈이 대장이라니. 다 네 복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비웃음처럼 느껴졌을 법한 웃음소리도 스승이라서 그런지 대장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호탕하게 웃는 홀랜드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의 밑에서 수련하고 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스승님. 저, 시험은…….”

“네 이야기나 더 해봐. 너는 모를 거다.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 사는 게 얼마나 외로운지.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이라도 할 거 그랬어.”

“친구 분들은 이제 안 찾아오십니까?”

“마제(魔帝) 영감탱이는 안 온 지 한참 됐다. 어디 처박혀서 마법 연구나 하고 있겠지. 투제(鬪帝) 녀석도 요즘엔 안 보이네. 그 친구야 뭐 나나 마제 놈처럼 자유로운 몸이 아니니까. 꽤 바쁘겠지. 그러니까 빨리 이야기해 봐. 사람이랑 말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 네. 알겠습니다.”

대장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스승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인 처음으로 승급시험에 도전하고 난 뒤의 이야기들. 동료들을 만나고, 그들과 지냈던 추억들, 자신이 수행한 의뢰들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 내 스승에게 알려주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구나. 그렇게 강한 녀석이 아직 있단 말이야?”

“예?”

“그 엘프 말이야. 엘퀴라즈 숲이 정화됐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지금의 너조차 방심한 틈을 타서 겨우 손바닥에 상처 낸 게 전부라며.”

대장은 갑자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홀랜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엘프 이야기가 나오고 엘퀴라즈 숲이 나온단 말인가.

‘잠깐. 엘퀴라즈 숲? 엘프? 그건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아니, 그랬던가? 내가 지금 말한 건가? 하지만……’

머릿속에 어디 한군데가 바위로 틀어 막힌 것처럼 제대로 생각이 흘러가지 않는다. 그때 대장의 뇌리에 한 가지 명령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며 그를 유혹했고, 그 생각은 달콤한 꿀처럼 이성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으음…… 아.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흠. 너 아직도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먹느냐?”

“하하…… 스승님도 참.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땅에 떨어져도 3초 안에만 주워 먹으면 괜찮다니까요.”

“잠깐 기다려 봐라.”

잠시 자리를 비운 홀랜드는 물건을 가지러 오두막 안에 들어갔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수정구슬이 들려있었다.

“자. 여기에 손을 올려봐.”

대장이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자, 모기처럼 수정구슬이 그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푸른색의 마력이 반투명한 수정 구슬을 채우더니, 다시 썰물처럼 마력이 대장에게 돌아갔다.

“대체 왜 그러시는……!”

갑자기 강한 현기증을 느낀 대장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수정구슬에서 손을 떼버리려고 했지만, 접착제로 붙인 듯이 손에서 구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수정구슬로 빨려 들어가는 검은색의 마력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마기(魔氣)!”

“마기라고 하기에는 깨끗한데. 그냥 검은색의 마력 같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마력이 제 몸속에?”

검은 마력을 모두 빨아들이자 수정구슬은 제 역할을 끝냈다고 말하듯 금이 가며 깨져 버렸다. 흡수했던 검은 마력도 구슬에서 풀려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누군가 네게 마법을 건 것 같구나. 이거 마제 놈한테 고마워해야겠는걸. 쓰잘데기 없는 것만 만드는 줄 알았더니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대장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보다 먼저 그가 떠올린 것은 엘퀴라즈 숲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겠다던 숲에서의 약속과 스승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방금 전의 자신이었다.

“아!”

“이제 좀 정신이 돌아왔구나.”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말했잖아. 마법에 걸렸었다고. 아마 그 숲의 엘프가 걸었던 것 같네. 마제 녀석이 준 도구가 꽤나 쓸 만했어. 상대에게 걸린 수준 높은 마법까지 무효화시킬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네.”

홀랜드가 바닥에 흩어져 빛을 반사하고 있는 유리 조각들을 발로 흩뜨렸다.

“근데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더니 일회용이잖아 이거. 자기도 걸리는 게 있어서 여러 개 준 거였구먼.”

“마법이라니. 그런 기척은 전혀 못 느꼈는데…….”

“콧수염아.”

대장은 스승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반쯤 입을 벌린 채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던 스승의 진지한 얼굴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왜 여기서 시험관 노릇이나 하고 있는 줄 아느냐?”

“예. 처음으로 시험 보던 날,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홀랜드는 S급으로 도달하기 위한 승급시험의 시험관이자 관문 그 자체. 하지만 처음부터 A급 모험가의 승급시험이 이러한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40년 전에는 A급에서 S급으로 승급하는데 남들보다 조금 뛰어나기만 하다면 형식적인 시험을 통해 쉽게 승급할 수 있었다.

S급이라는 등급은 그저 명예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혜성처럼 홀랜드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A급 모험가로 승급했으며, 단숨에 S급까지 올라가 버렸다.

“뭐야. S급이란 거 별거 없잖아.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S급이란 길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홀랜드는 승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 버렸다.

“앞으로 S급으로 승급하고 싶으면 나랑 한 번 붙어보자고. 강한 녀석이면 인정해 줄게.”

그의 파격적인 발언에 수많은 A급 모험가들이 반발했으며, 기존의 S급 모험가들조차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길드에 항의했다.

하지만 홀랜드의 다음 발언에 모험가들의 불만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내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는 놈이 있으면 내 전 재산을 주겠다. 더불어 강해질 수 있는 나만의 비급까지.”

그가 누구인가. 갑자기 등장한 베일에 싸인 신예가 아니던가.

그가 나타나고 S급이 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고, 그 중심엔 그의 강함이 있었다. 그가 비록 천둥벌거숭이처럼 괴팍한 내용을 승급시험으로 내걸었지만 그가 강하다는 것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강함을 탐낸 많은 모험가들이 그에게 도전했다. 심지어 기존의 S급 모험가들마저 자신이 이기면 승급시험에 내건 조건을 취소하라는 핑계를 대며 그에게 도전하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도 그에게 이기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현재 삶에 만족했고, 어떤 이는 그의 재능에 좌절하여 모험가를 포기하였으며, 어떤 이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덤비다가 생을 마감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 물음에 홀랜드가 답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강한 놈이랑 싸우고 싶어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내가 예전에도 이야기했지? 강해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강한 놈이랑 싸우는 거라고. 근데 길치인 나한테는 그런 놈들을 찾아가는 게 너무 힘들단 말이지. 많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꼭 그런 놈들은 오지에 꼭꼭 숨어 있고. 그래서 편하게 수련하려고 이렇게 억지까지 부려가며 시험관을 하고 있다 아니냐.”

홀랜드가 턱을 매만지며 상상에 빠졌다. 대장은 스승의 이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보여주던 버릇이었다.

“근데 콧수염 네 몸속에서 뽑아낸 마력.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포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다. 근데 닿지도 않았는데 양팔에 털이 곤두설 만큼 장난 아니게 소름이 쫙 퍼졌다 이거야.”

대장은 숲에서 만났던 엘프를 떠올렸다.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스승과 동격 또는 조금 위나 아래에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상대가 작정하고 마법을 걸면 눈치 못 채는 게 당연해. 근데 문제는 검을 썼단 말이지. 검과 마법 둘 다 나랑 마제 놈만큼 강하다는 걸까? 지금 난 그게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다.”

홀랜드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대장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래서 말이야. 콧수염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넌 눈치가 빨라서 좋아.”

“아뇨. 제 눈치는 스승님한테만 통합니다. 지금 그 눈빛, 저와 대련하기 전에 보여주시던 눈빛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하. 어쨌든 좋아. 그 엘프랑 싸워서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고 했지?”

대장이 일어나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애초에 편하게 승급할 마음은 없었기에 각오하고 있었다.

“자. 덤벼봐. 그 엘프랑 나. 둘 중에 누가 강한지 알아보자고.”

* * *

“총액 10만 3천 2백 골드 예금되었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엘리사가 은행원의 친절한 미소에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평소 그녀는 저금된 액수를 들을 때마다 황홀한 기분에 빠져 은행 밖으로 나오며 한동안 그 기분에 도취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오늘은 기분이 평범했다. 드디어 10만 골드를 넘기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야 했다. 하지만 평범했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이게 다 그 둔탱이 때문이야.”

엘리사는 에르나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었다. 하나 곧 자신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고선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바보…… 이럴 거면 애초에 기대하게 하지 말든가.”

엘퀴라즈 숲에서 밧줄에 대롱대롱 묶여 있던 그녀는 에르나르가 자신을 구해준 순간, 평소의 호감 이상으로 그가 멋지게 보였었다.

마치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자신을 구해주고 떨어지는 자신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따라올 거면 끝까지 따라오든가. 어디로 간 거야.”

애칭으로 서로를 부르자고 하는 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구나!’라며 부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었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원래의 얼빵한 모습으로 돌아온 에르나르를 보고 얼마나 실망했던가.

“에르…… 멍청이.”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숲에서 나온 다음 그를 애칭으로 불렀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전과 같은 ‘엘리사 씨’.

안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었다는 양 행동하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것만 같아 얄밉고 짜증났다.

“나이도 어린 게 그릴스보다 눈치가 없어. 아. 짜증나.”

그렇게 말해놓곤 에르나르의 나이가 몇 살인지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그를 생각하며 나이를 추측해 보려고 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에르나르의 얼굴을 지우려 애썼다.

“엘리사 씨!”

하지만 얼굴의 윤곽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에르나르의 목소리가 다시 지워져가던 얼굴을 되살려 버렸다.

“여전히 엘리사 씨…… 냐.”

그녀는 에르나르를 무시하고 인파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그녀를 찾아 달려오던 에르나르도 인파 속으로 들어왔다. 도적인 그녀에게 이런 곳은 집 앞마당처럼 자유로웠지만 엘프에겐 따라잡기는커녕 찾는 것조차 버거웠다.

“엘리사 씨! 어디 계세요!”

“……이젠 모르겠다. 몰라. 돌아가서 잠이나 잘래. 평생 찾아보라지.”

엘리사는 인파를 헤치고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에르나르는 여전히 인파 속에서 열심히 자신을 찾고 있었다.

“멍청이. 마법을 쓰면 될 거 아니야. 하여간.”

그러나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에르나르에겐 마법을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엘리사는 몇 분씩이나 그대로 서서 에르나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를 찾지 못한 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멀리서 에르나르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에르나르의 마지막 외침에 그녀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엘!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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