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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소문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2)
“자. 여기 의뢰금. 공평하게 배분해서 넣었다.”
숙소로 돌아온 대장이 세 개의 주머니를 각자에게 하나씩 넘겨주었다. 주머니는 상당히 묵직해서 에르나르나 엘리사는 팔이 뻐근할 정도였다.
“엄청 많네. 고생한 보람이 있다니까.”
주머니를 품에 끌어안은 채 엘리사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르나르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의뢰금을 엘리사에게 넘겨주고픈 욕구가 끌어 올랐다.
“오늘도 저금인가요?”
“응? 당연하지. 저축은 생명이라고. 에르나르 넌 언젠가 숲으로 다시 돌아가니까 잘 모르겠지만, 원래 이런 현금은 계속 저금해 둬야 해. 노후를 대비해야지.”
가벼운 태도와 다르게 엘리사는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번 돈을 모두 은행에 저금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의뢰금을 모두 저금할 생각이었고, 그녀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숙소 밖으로 나가는 엘리사 곁으로 에르나르가 다가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에르나르는 문 밖을 보면서 함께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응? 어디 가게?”
“살 게 있어서요. 나가는 김에 같이 나가려고요.”
“흐응. 그러시든지. 대장, 나 나갔다 올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대장과 그릴스만이 숙소에 남아 거리의 소음을 들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함께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우정을 쌓아 왔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 더 친했다. 중년의 과묵한 남성들이기에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색해 보일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 둘의 공기는 지금 의뢰금이 든 주머니만큼이나 무거웠다. 일방적으로 대장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으음. 그래. 그릴스. 자네 괜찮나?”
“…괜찮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릴스의 눈이 토끼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던 것이다.
눈꺼풀을 깜빡거리기라도 하면 눈에 고인 눈물이 당장에라도 폭포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저 두 사람,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거다. 야생의 감이 말해주고 있다.”
“무슨 일?”
창문 너머로 길거리를 사이좋게 걸어가고 있는 에르나르와 엘리사를 보며 그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은 그릴스가 말한 무슨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곤 떨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질투는 보기 좋지 않다. 친구.”
“……나도 안다.”
“언젠간 너도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말, 대장한테 듣고 싶지 않다. 똑같은 노총각이면서.”
그릴스. 올해로 42세. 연애 경력 없음.
대장. 올해로 45세. 연애 경력 없음.
제 코가 석 자라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흠흠. 그릴스. 같이 나가겠나?”
대장은 무안한 듯 그릴스에게 외출을 권유했다. 그릴스는 평소 대장이 의뢰가 끝나면 무기를 손질하러 간다는 것을 알기에 짧게 고개를 저었다.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닌 것이다.
“무기점에 가려는 게 아닐세. 길드 승급원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승급원?”
“그래. 이제 슬슬 승급 신청을 해 보려고.”
A급 모험가인 대장의 위로는 이제 단 하나의 등급만이 존재한다.
바로 S급 모험가.
천재들만이 올라 올 수 있는 A급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천외천(天外天)의 등급.
보통 모험가들이 승급하기 위해 만족해야 할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해당 등급에서 의뢰 수행을 100건 이상 수주, 그리고 90%이상 완수할 것.
두 번째, 인격적으로 큰 문제가 없을 것.
세 번째, 승급하고자 하는 등급에 걸맞은 실력이 있을 것.
첫 번째 조건에서 보는 것은 모험가의 ‘신뢰도’이다.
모험가라는 직업은 의뢰를 해결하며 먹고사는 직업. 의뢰는 그들의 삶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의뢰를 자주 실패한다면? 그자는 모험가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의뢰 성공률은 높은데 의뢰를 자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것.
잦은 의뢰 수행과 성공률은 길드가 모험가를 신뢰할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두 번째 조건에서 보는 것은 바로 ‘명성과 인망’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의뢰 수행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모험가의 됨됨이가 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모험가가 일반인을 공격한다거나 도둑질을 하는 등, ‘모험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면 모험가들의 집합체나 다름없는 길드 역시 손가락질 받게 되기에 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모험가들은 모험가 자격증을 박탈당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을 만족시킨 모험자들 대다수가 부딪히는 마지막 벽.
인격적 문제는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고, 첫 번째 조건도 길드에서 적절한 의뢰를 추천해 주니 성실하기만 하면 몇 년 안에 달성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그 궤를 달리했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실력을 갖추는 것. 그것은 꾸준한 자기 수련과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특히나 B급 모험가까지는 오랫동안 노력하면 나름의 경험에 의해 일반인도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재능의 문제라는 것을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알고 있다.
세 번째 조건의 경우, 길드에서 각 도시에 설치해 둔 ‘승급원’이라는 곳에서 그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다. 승급을 원하는 모험가는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을 만족시킨 후 승급원으로 가면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받는다.
“이번 의뢰금을 전부 시험료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두둑이 받았으니까.”
승급을 위해선 시험료가 필요했다.
물론 등급이 올라갈수록 그 비용은 높아졌기에 A급 모험가들의 시험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하긴. 생각해 보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장도 나도 돈은 많으니까 언제든지 시험은 볼 수 있었지.”
“그렇지. 그래. 그렇고말고.”
“우리 둘 다 가족도 없고. 결혼도 안 했다.”
“취미도 없고, 사치도 안 부린다.”
“그래…….”
“만나서 돈 쓸 친구도 없다.”
“그릴스…….”
방금 전까지 그릴스의 질투를 충고하던 대장의 마음속에 한 가지 감정과 함께 에르나르와 엘리사의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감정은 질투라기보단, 45년 인생의 한이 서린 원한이었다.
“그만해……!”
하지만 노련하고 경험 많은 대장은 원한을 억누르며 더 말하려는 그릴스의 입을 막았다.
좁은 방 안에서 두 중년 남성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결혼. 그 인생의 시기를 놓친 두 중년의 한탄 섞인 오오라가 방 안에 가득 찼다.
* * *
“그래서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열기는, 하늘 중앙에 걸린 한낮의 태양만큼이나 뜨겁고 활기찼다.
붐비는 시장통에서 엘리사는 도적답게 사람들과 스치지도 않고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은행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법사인 에르나르에게 인파를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비 사이를 지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끊임없이 고개 숙여 사과하면서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같이 가요. 엘리사 씨!”
“흥!”
에르나르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평소의 그녀라면 에르나르 옆에서 동생을 돌보듯 함께 길을 걸어갔겠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잡힐 듯 말 듯 그의 시야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를 뿌리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시지?’
이런 애매한 거리감은 오늘 하루 일이 아니었다.
에르나르는 엘퀴라즈 숲에서 나온 후부터 계속 예전과 다르게 거리를 두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날부터 계속 고민해 봤지만 그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릴스가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걸 이야기해 줄 만큼 타인의 연애문제에 너그럽지 못했다.
은행에 간신히 도착한 에르나르. 그는 은행 안으로 들어가는 엘리사를 보며 그 뒤를 따라가려 했다.
“자네들은 여전하구만.”
하지만 어느 남자의 부름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목소리의 출처는 은행 옆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과일가게의 주인이었다.
엘리사와 에르나르가 이 마을에 머물면서 자주 과일을 사간 일종의 단골 가게였다.
“아. 안녕하세요.”
“자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오늘 따라 커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잘못을 저지른 걸까요. 아니, 그보다 저희는 커플이 아니에요. 정말, 만날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시네.”
에르나르는 만날 때마다 커플이라고 말하는 과일가게 주인 때문에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엘리사가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녀는 언제나 에르나르의 등짝을 때리거나 괜히 목을 감싸 졸라대기 일상이었다.
“아직도 부정하는 건가? 쯧쯧. 여자가 불쌍하구먼. 그래서 뭐 때문에 싸운 겐가?”
“싸우다뇨? 으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저를 피하시네요.”
“결혼 경력 20년 차인 내가 봤을 때, 갑자기란 없어. 다 마음이 상할 짓을 자네가 한 거겠지. 곰곰이 잘 생각해 보라고. 언제부터 그랬는데?”
베테랑의 조언에 에르나르는 입을 달싹였다. 엘리사가 엘퀴라즈 숲에서 나온 후로 계속 이 상태였다고 말할 뻔했지만, 도시로 오는 중에 대장에게 의뢰 내용에 대해선 함부로 발설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한소리 들었기에 어떻게 말할까 잠시 고민하였다.
‘의뢰 때문에 숲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온 후부터 그랬다고 하면 되겠지?’
“얼마 전에 의뢰 때문에 『정화된 엘퀴라즈 숲』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온 후부터 계속 쌀쌀맞으세요.”
과일가게 주인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에르나르가 A급 모험가임을 깨닫고 힘든 의뢰를 수행하러 그곳에 갔었다고 결론지었다.
앞에 붙은 『정화된』의 의미는 연애상담이라는 흥미로운 화제에 의해 잠시 묻혀 버렸다.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거야?”
“글쎄요. 딱히 큰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 자네가 별일 아니라고 느끼는 것도 상대가 느끼기엔 큰일인 경우도 많으니까. 특히 연애관계에선 그런 일이 아주 자주 일어난다고. 경험자의 말이니까 믿어도 돼.”
“그런가요?”
에르나르의 인간평가목록에서 과일장수는 어느새 연애 선배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조언에 따라 숲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는 자가 아무리 고민해 봐야 해답을 찾을 순 없는 법. 그는 조심스럽게 엘퀴라즈 숲에서 있었던 일을 연애 선배에게 말해보기로 결심했다.
‘엘퀴라즈 숲이라는 것만 안 들키면 되겠지. 엘리사 씨가 적에게 묶였을 때 안 구해준 거랑, 그 숲의 엘프 분에게 치료받고 나서 말실수한 정도만 말해볼까.’
“으음……. 엘리사 씨가 『혼래빗한테 묶였을 때 안 구해드려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정화된 엘퀴라즈 숲의 엘프 분이 치료해 준 후로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서 그런 걸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만…… 앞에 내용은 이해가 안 되지만, 말실수했다는 건 뭔가? 그게 걸리는군.”
“저도 모르게 엘리사 씨를 ‘엘’이라고 애칭으로 불렀거든요. 저는 ‘에르’라고 불러달라고 했고. 지금도 마음을 놓으면 또 그런 실수를 할까봐 걱정돼요.”
“그거구만.”
“네?”
“자네, 그 이후로 그녀를 ‘엘’이라고 부른 적이 있나?”
“에이. 그냥 실수였는걸요. 어떻게 말해요.”
“하아. 바보 같으니라고. 자네는 자네들 상태가 어떤지 잘 모르나 본데, 내가 볼 땐 자네들은 서로 좋아하는 게 확실해. 다만 서로 용기가 없어서 먼저 고백을 못 할 뿐이지. 그 상황에서 애칭으로 부른다? 그건 반쯤 고백한 거나 다름없는 짓이야. 근데 그걸 실수로 치부하고 없던 일로 하겠다고? 상대에게 고백하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자네는 기분 좋겠나?”
“흐아아아……. 아니, 진짜 그런 게 아닌데…….”
고백이라니. 그런 대담한 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그저 실수로 부른 애칭이 그런 의미를 가진다니. 에르나르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란 상대가 받아들이는 의미에 따라 바뀐다고. 자네는 이미 고백을 한 거나 다름없어. 쯧쯧. 그 여자 마음이 이해가 되는구먼.”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으으, 다시 애칭으로 부, 부르면 흐아악……!”
“선물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선물이요?”
“실수를 덮으려면 더 큰 충격을 주는 게 최고라고. 나도 아내한테 실수한 날은 언제나 그녀가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주곤 하지. 그럼 실수한 건 뒤로 덮어두고 아주 좋아해준다고.”
“선물이라…….”
과일가게 주인은 이 엘프와 인간 커플을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가히 이자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에르나르와 엘리사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다 그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릴스만 빼고.
그때, 주인은 에르나르가 아직 인간들의 풍습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둘을 이어주기 위한 한 가지 작전을 세웠다.
“반지라도 선물해 주는 게 어떻겠나? 여자들은 반지를 아주 좋아한다고.”
“반지라. 으음. 지금 바로 사러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저 멀리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에르나르를 보며 과일가게 주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엘퀴라즈 숲이라니. 역시 A급 모험가들은 대단해.”
아직 에르나르가 자기도 모르게 흘린 말을 이해하지 못한 주인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에르나르가 엘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엘프는 감정을 속일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혼래빗이 있고, 엘프가 살고 있다.
엘퀴라즈 숲이 정화되었다.
손님들에게 과일을 팔며 잡담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과일가게 주인.
이 평범한 상인의 입에서부터 소문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