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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대장전(2)
싸움이란 어느 한쪽이 강하다고 해서 간단하게 승부가 정해질 만큼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모든 면에서 강할지라도 한 번의 실수로, 한 번의 방심으로 승부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장은 압도적으로 강한 핀 앞에서 승리의 열쇠를 엿볼 수 있었다.
핀이 강하다는 것을 대장은 만난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딱히 무슨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만의 감이자 일종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이 핀을 이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핀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장난기 덕분이었다.
승부에서 강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승부에 임하는 자세.
바로 상대의 방심에서 나오는 ‘허’를 찌르는 것.
그렇기에 대장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평범한 공격과 평범한 행동으로 마력을 비축해 두었다.
검사라고 해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력이 없으면 오로지 육체의 힘만으로 싸워야 하기에, 검사에게도 마력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핀이 평범한 공격들에 익숙해질 무렵, 강한 기술을 준비하며 ‘지금부터 강하게 나간다’라고 어필하였다.
그의 의도에 맞게 핀은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고, 대장의 의도대로 피하지 않고 기술에 부딪혔다.
그 후 틈을 노린 제압. 서로 죽고 죽이는 승부가 아니라고 한 이상, 제압당한 순간 여기서 끝나야 정상이다.
“뭐해? 공격 안 해?”
“제 승리로 승부는 끝났습니다.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전, 핀의 뒤를 차지하고 그녀의 목을 벨 수 있었지만 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굳이 핀을 죽여서 숲을 적으로 돌려선 안 되었다. 주변에 다른 엘프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대장의 머릿속엔, 방금 전 혼신의 마력을 쏟아 부은 공격을 한 손으로 간단하게 막아낸 핀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딱히 마력을 사용한 것 같지 않았는데. 그런 의문이 그의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시…….”
제압으로 끝내려는 대장의 바람과 다르게, 그의 검을 움켜쥔 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희는 너무 약해.”
움켜쥔 검을 자신의 목으로 끌어당기는 핀. 대장은 황급히 검을 당겼지만 바닥에 깊이 박힌 것처럼 검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라고 말하려던 대장의 표정이 굳었다.
핀이 검을 당겨 스스로의 목을 찔렀지만 예리한 검날은 그녀의 목을 파고들지 못했다. 오히려 검끝이 오랫동안 말린 진흙처럼 부스러졌다.
“처음부터 너는 날 죽일 수 없었어. 그 정도는 파악해 줬으면 했는데.”
핀이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놓았다. 아직 검을 당기고 있던 대장은 자기 힘에 의해 던져지듯 뒷걸음질 쳤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핀이 꼴사납다는 듯이 입 꼬리를 올렸다.
“아아. 정말이지. 계획에도 필요 없는 녀석들이라 파악이라도 해두려고 했더니. 그것도 제대로 못 도와주네.”
‘계획?’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가 대장의 머릿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그저 숲에 침입했다고, 혼래빗을 건드렸다고 이런 전투를 계획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생각을 더 진행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니면 인간들은 원래 다 이렇게 약한가? 하긴, 그러니 비겁하게 그런 짓을 저지른 거겠지.”
꺼내든 레이피어를 검집에 넣은 뒤, 핀이 한 걸음씩 대장에게 다가갔다.
대장은 가만히 그 걸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핀이 다가올수록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험가로서 많은 의뢰를 수행한 그였지만, 이렇게 전신의 털이 곤두설 만큼 강한 살기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게 전부라면 어쩔 수 없네.”
“자, 잠시 만요!”
멀리서 핀의 살의를 느낀 에르나르가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원래 얼굴색이 보라색이었던 것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고, 핀에게 달려오다가 그녀의 살기에 다리 힘이 풀려 몇 번이나 넘어져 몸이 흙투성이였다.
“왜, 왜 그렇게 인간을 증오하시는 겁니까?”
에르나르가 느낀 핀의 살기는, 여기 있는 대장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특정인물을 향한 것이 아닌 좀 더 넓은 범위의, 인간을 향한 증오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응? 그걸 왜 물어? 당연한 거 아니야? 너도 엘프라면 알고 있잖아?”
“이, 이해는 해요! 저희 숲에서도 항상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건 마치…….”
에르나르 역시 숲에서 살 적엔 인간들에 대해 안 좋은 소문만을 들어온지라 그 평가가 좋지 않았다.
그가 들은 이야기라곤 나이 많은 엘프들의 것뿐이었고,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인간은 탐욕에 찌든 놈들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나와서 본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인간들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고 오히려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엘프들보다 훨씬 더 선량하고 깨끗한 인간들도 많이 있었다.
“인간들을 멸종시키려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숲의 어르신들 중 그 누구도 이 정도의 살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간들을 증오하지만 멸종까지는 바라지 않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이 꽤나 섞여 있어서. 방해하지 말아줄래?”
핀은 몸을 감싸는 마력을 간단하게 없애 버렸다. 그것은 에르나르가 전개한 구속마법이었다.
에르나르는 대장에게 다가가는 핀을 저지하려고 계속 구속마법을 걸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 그만두세요!”
분명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핀의 감정은 장난 그 자체였거늘. 에르나르는 이 정도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엘프인 핀이 보일 줄은 몰랐다.
“계속 대장에게 다가가신다면 저도…….”
에르나르는 전혀 통하지 않는 구속마법을 그만두고 다른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가 주문을 외울 때마다 핀의 머리 위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천벌(天罰)을 내려주소서!”
주문의 마지막 영창을 끝내자, 먹구름처럼 모여 있던 마력이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시리고 푸른색의 번개가 되어 핀에게 내리쳤다.
마력의 구름은 사라지지 않고 몇 번이고 목표를 부술 때까지 계속해서 내리쳤다.
폭뇌운(爆雷雲).
에르나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공격마법. 그의 마력이 다하기 전까지 마력의 구름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적을 공격한다. 단 한 발로도 마법 장비를 갖춘 자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번개를 무수히 쏟아붓는, 그의 비장의 수였다.
“흐윽……!”
에르나르의 마력이 다하자 마력의 구름도 하늘에서 걷혔다.
급속한 마력의 소모에 에르나르는 허탈감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검게 타버린 지면. 그러나 애달픈 그의 마지막 공격에도 불구하고 핀에게는 그슬린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동료가 저렇게 애쓰고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잠시 에르나르를 쳐다본 핀은 나무라듯 대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랄한 비판에도 대장은 아무 말 없이 공포에 질려 떨리는 눈동자를 억지로 참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비 없이 몸과 마음을 떨게 만드는 공포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지나친 공포로 인한 최후의 발악인 것일까.
그러나 대장은 그것이 발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검을 원래 가야 할 길에 올려놓듯이 휘두르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싶다. 승패도, 생사도 뛰어넘어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게 얼마만 이었을까.
모험가가 되기 전부터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그에겐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강하다. 나는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자부심이.
수련조차 받지 않은 몸으로 마물을 해치운 전적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고, 그는 여타 다른 천재들처럼 기사가 되기 위해 왕국의 기사수련원으로 입학했었다.
하지만…….
“끝?”
단 한마디. 단 일격.
수련원에서 만난 동기생과 첫 대련에서 그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던진 돌멩이에 깨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가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일은 최고가 될 것이라 믿었던 그에겐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털도 안 난 꼬맹이가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뭐하냐. 술맛 떨어지게.”
기사 수련원에서 도망치듯 나와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했던 그는 또 다른 운명처럼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너는 재능이 있어. 내가 보증해 줄게. 아. 돈 거는 거 아니다?”
꺾였던 자신감이 스승을 만나며 회복되었다.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괴물의 보증. 그것만큼 확실한 영양제는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스승의 곁을 떠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 순간, 그는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는 기사의 길을 포기하고 대륙 이곳저것을 떠돌아다니는 모험가의 길로 향했다.
그렇게 모험가가 된 후로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A급 모험가라는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마물이든, 인간이든 그를 겁먹게 한 자는 없었다.
괴물과 같은 몇몇 강자들조차 경외심을 느낄 뿐,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어? 도망이라도 치지?”
핀이 점점 다가오는 와중에도 그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과 다르게 전신의 힘을 빼고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야. 뭘 그리 힘을 팍팍 주고 있냐. 마력이란 거에 너무 의존하지 마. 결국엔 믿을 건 네 몸뚱이 하나뿐이니까.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는 스승이 선보인 절기 중 그 어떤 것도 따라 할 수 없었다.
그것들 중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면 그때 그 녀석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스승은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또 그 위의 하늘같은 남자였다.
“자연스럽게. 이게 안 돼? 잘 봐. 마력이든, 근육이든 그런 거 다 잊어. 그냥 벤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아. 진짜. 이거 진짜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천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 그의 스승도 그 범주에 들어가 있었다.
마력을 쓰지 말라니. 힘을 주지 말라니. 대체 그 상태로 어떻게 상대를 베라는 말인가.
그저 너무 잘난 스승을 만나서, 그리고 나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끝낼까?”
핀의 손이, 대장을 덮쳤다. 작고 여린 여자아이의 손이었지만 대장이 썼던 기술보다 빠르게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덮쳐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대장은 겁먹지 않았다.
손이 목에 닿으면 붉은 피를 내뿜으며 자신이 죽을 것이란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기도로 혈액이 들어가고, 피거품을 흘려내며 정신을 잃는 자신의 모습도 예상되었다.
“자연스럽게.”
스승이 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이 머리로 하는 이해인지, 두루뭉술한 생각으로조차 표현되지 않는 깨달음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느껴본 적 없는 공포의 끝에서 얻어낸 그만의 해답이었다.
대장의 눈에 비친 세상이 멈췄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그가 검을 쥐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핀을 향해, 그가 휘둘러 온 수십, 수백만 번의 검격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검이 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