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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대장전(1)
“정말이지. 다들 따라줘서 다행이야.”
얇은 도신의 레이피어가 가느다랗게 뻗어 나와 햇살을 반사하며 그 위용을 뽐냈다.
주인을 잃고 엘퀴라즈 숲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기름칠 해주는 이 없이 오랫동안 홀로 시간을 보냈건만, 예리한 검날은 그런 시간조차 베어버릴 만큼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검은 아직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핀이 상대에게 등을 보인 채 다른 이들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구경할 건 다 구경했다 생각한 핀은 다시 대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장은 검끝을 아래로 내린 채 핀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몸을 돌리자 다시 검을 세웠다.
“이제 다 봤는데…… 언제 시작할거야?”
상대가 공격하기를 기다리던 핀은 모험가들에게 대장이라 불리는 사내가 왜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했다.
핀은 상대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자들을 관찰하고 있었기에 공격한다면 최고의 찬스였던 것이다.
“준비도 안 된 상대를 공격할 만큼 저는 무례한 자가 아닙니다.”
“모험가라기에 험하게 살아왔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침입자로 간주되는 상태에서 그런 짓까지 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겠죠.”
아직 핀을 대화로 설득할 마음을 버리지 않은 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아아. 됐어. 알고 있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귀에 딱지가 생길 것 같아.”
하지만 그의 말을 끊으며 핀이 대화를 가로챘다. 싱글벙글 웃는 그녀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죄송하다고 했지? 그렇지만 남의 집에 들어온 도둑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어.”
장난감을 휘두르듯 레이피어를 팔자 형태로 뱅글뱅글 돌리며 핀이 제안을 하나 꺼냈다.
“날 이기면 너희 모두 용서해 줄게. 거기에…….”
그녀의 미소는, 대장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을 머금고 있었다.
“너희가 찾는 물건, 그것도 줄게.”
“그걸 어떻게!?”
“저기 저 엘프가 다 말하던걸. 내가 귀가 좋아서 다 들어버렸어.”
멀찌감치 떨어져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에르나르를 힐끗 보며 대장은 나중에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덕분에 잘하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상대는 엘프다. 엘프가 다른 종족보다 강한 것은 맞지만 대장은 대인전이라면 몇몇 괴물 같은 자들을 제외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히려 엘프이기에 더 상대하기 쉬웠다. 본능과 인간은 흉내 낼 수 없는 움직임으로 덤벼드는 마물보다는.
“좋습니다. 숲의 주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약속, 믿겠습니다.”
“표정이 보기 좋네.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모습이야.”
제대로 검을 고쳐 쥐며 핀을 노려보는 대장. 그는 결코 핀을 얕보고 있지 않았다.
특히 방금 전 엘리사에게 소리 높여 경고하는 핀에게서 대장은 강렬한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그 파장은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장의 몸을 옥죄는 듯한 강렬한 떨림을 선사해 주었다.
이와 같은 기운은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압도적인 힘.
앞서 이야기한 몇몇 괴물 같은 자들과 만났을 때 느낀 마력.
그들을 만났을 때 그가 얼마나 자신의 재능에 대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었는지…….
그 기억이 떠올라, 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금니가 비틀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예전에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짜식아. 강한 상대랑 싸워봐야 강해지는 거야. 약한 놈들이랑 싸운다고 실력이 늘 것 같아? 자기를 파리 죽이듯이 꾸욱 눌러죽일 정도로 강한 놈이랑도 싸워봐야지.”
스승은 그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괴물들 중 하나.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싸움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는 아직 침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예의를 지켜 자신을 소개하려 했다.
“제 이름은…….”
“알아. 대장이잖아.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이제 덤벼줘.”
대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보다 ‘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데다 핀이 어서 덤비길 바라는 것 같아서 딱히 정정하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마력을 힘껏 끌어올리며 그가 근육을 수축시켰다.
쪼그라든 근육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지더니 이내 순식간에 원래대로 팽창하며 열기를 뿜어냈다.
‘상대는 나를 얕보고 있다. 처음부터 강하게 간다!’
용수철처럼 땅에서 튕겨져 나가며 대장의 검이 핀의 목덜미를 노렸다.
섬광처럼 휘둘러진 검신이 가냘픈 여인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검은 유리가 깨지듯 날카로운 검과 검의 마찰음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아직 땅을 박차고 공중에 떠 있는 찰나의 순간에 대장은 핀의 검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신의 검을 쳐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핀의 흘겨보는 듯한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
‘이게 다야?’
‘그럴 리가.’
짧은 순간 마주친 눈빛에서 서로의 생각을 읽은 두 사람의 시간이 멈췄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직도 공중에 떠 핀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던 대장이었다.
대장의 검이 순식간에 핀의 가슴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번에도 핀의 레이피어에 검이 튕겨져 나갔지만 오히려 그 반동을 이용해 재차 핀의 허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두 사람의 검과 검이 부딪히며 반짝이는 벌레와 같은 섬광을 만들어냈다.
치치치치칭!
대체 몇 번의 검이 오고 가는 것일까. 밤의 등불에 모인 벌레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양의 섬광이 둘 사이를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대장이 땅에 착지했다. 원래 자리에서 이곳으로 이동하기까지의 시간은 대략 1초 남짓. 그사이에 오고 간 공방은 무려 백여 차례.
일반인들은 눈으로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대결이었다.
“빠르고 힘도 있지만, 으음. 뭐랄까. 너무 평범하지 않아?”
핀이 빈정대듯이 말을 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숲에 들어온 모험가들 중에 가장 강한 상대라 조금 기대한 것이 있어서였을까.
“궁금한 게 있는데. 인간들 중에 너는 강한 걸로 따지면 어느 정도야?”
말을 하던 도중, 핀이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핀을 베려 했지만 레이피어에 의해 둘로 쪼개지며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참격까지 막아내다니. 역시 잔기술은 안 되나.’
검에 마력을 실어 원거리의 적을 베는 기술. 참격(斬格).
오로지 검에 재능이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범재들을 무릎 꿇게 만든 통곡의 벽과 같은 이 기술이었다. 범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는 그 기술이 간단하게 휘둘러진 얇은 검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가장 강한 일격. 그것으로 간다.’
“저기. 말 안 해줄 거야?”
끊임없이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핀이 말했다.
검이 휘둘러지는 곳마다 대장의 참격이 베어졌다. 찢어진 참격은 목표를 잃은 채 애꿎은 땅에 상흔을 새기며 사라졌다.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격을 날리는 와중에도 대장은 몸 속 깊숙한 곳으로 계속해서 마력을 응축하고 있었다.
그를 A급 모험가로 승급시켜 주었던,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가 만들어 낸 기술.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과연 이 기술이 괴물에게 먹힐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연습했을 때와 승급시험 때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이 기술을 쓸 만한 상황을 겪지 못했다.
대부분의 적들은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이 기술은 동료들과 함께 진형을 짜고 싸울 때는 사용할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동료들까지 휘말려 다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 동료들은 다른 쪽에서 싸우고 있었고, 전부 쓰러진 뒤였다.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법이지.’
싸우기 전, 에르나르에게 귀띔을 받았지만 그는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님. 당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만든 기술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검사. 그로서는 다른 종족이 되어서 수명이 늘어난다 하여도 영원히 닿지 못할 것 같은 존재.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남자.
“꽤나 엄청난 기술 같네.”
대장의 검에 마력이 모이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보통의 검사는 마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육체를 강화하는 쪽으로 사용하는데, 그 마력까지 모두 끌어 모은, 그가 가진 마력의 전부였다.
“받아보시죠.”
“후후. 그래. 이제 좀 봐줄 만하네.”
대장이 검을 들고 덤벼들 거라 생각한 핀은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핀에게 다가오는 것 같더니 갑자기 허공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에 모여 있던 마력이 한줄기 광선처럼 핀에게 쏘아져 나갔다.
대장의 기술은 검에 마력을 잔뜩 모아 강력한 일격을 가할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그 정체는 참격과 같은 원거리형 기술. 겉모습과 검사에 대한 선입견을 노린 기술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보다 빠른 공격이었지만 핀은 그 공격을 피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피하기 직전,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을 한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피하면 뒤에 있는 나무들이 맞을 텐데?’
위그드라실이 나무를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달라는 말이 기억난 핀은,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그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으로 베거나 튕겨낼 수 있었지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숲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강하네. 하지만…….”
핀의 손아귀를 강타한 마력의 광선. 하지만 그 광선이 사라진 후, 핀의 손바닥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이 정도론 무리야. 너무 약해.”
“그래도 당신의 시선을 끄는 덴 성공했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핀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한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언제?”
하지만 검은 핀을 베지 않고 차가운 칼날을 가냘픈 목덜미에 댄 채 멈춰 있었다.
“처음의 공격은 눈속임. 실제론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상대의 등을 취하는 기술입니다.”
“페이크라고 하기엔 처음 공격이 너무 강했는걸.”
“거기에 맞아준다면 수고를 덜겠지만, 당신은 멀쩡하군요. 그걸 어떻게 받아내신 겁니까?”
대장의 질문에 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덜미에 겨눠진 검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다른 질문을 했다.
“안 벨 거야?”
“당신을 베는 순간 진짜 침입자가 될 테니까요. 그럼 숲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겠죠.”
“흐응.”
갑자기, 손가락으로 건드리던 대장의 검을 핀이 움켜쥐었다. 검을 움직이면 핀의 손이 베일 것이라 생각한 대장은 움직이지 못한 채 동요하는 눈동자만 내비췄다.
“자, 봐줄 필요 없어. 어서 베어봐.”